"꼬맹아! 야! 송하나!"
일은 늘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타난다.
바로 지금, 내가 언니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입 안 가득 초코바를 쑤셔넣었을 때.
"우리 사귈래?"
***
뭐야. 갑자기 사람 미치게. 그런 상황에서 고백이 말이 되냐고.
으왕, 토끼 초코바 뺏어먹자! 하고 덤비다가 사귀자라니...
샤워기의 물줄기를 맞으며 아까의 상황을 다시 머릿속에 떠올리자 얼굴이 붉어져 괜히 욕실 벽에 머리를 쿵쿵 찧었다.
당연히 거절해야 했다. 일단 볼이 미어터지게 음식을 넣고 있는 상황에서 고백을 받는 것도 싫었고, 언니와 그런 진지한 관계가 되는 것도 거북했다.
늘 장난만 치는 가벼운 여자. 여자가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누군가와 진지한 관계가 된다고 생각하면 일단 그 사람의 성격이 나와 맞아야 하지 않을까.
매사에 가벼운 태도로 대하는 사람, 매사가 행복한 사람, 즉흥적인 사람은 별로 내 타입은 아니야.
-아뇨. 언니는 별로.- 라는 말만 하더라도 괜찮았을 터였다.
하지만 왜 그랬을까.
-데이트 한번 하지 않고 사귈까 사귀지 않을까를 결정하는건 아닌거 같아요.-
언니의 가벼운 농담이, 그리고 그녀의 몸짓이 전투의 무거운 공기를 전환시켜 준다는걸 알고 있다.
그래서 거절을 하지 않은걸까. 그래. 만약 내가 거절해서 언니가 기분이 처진다면 전투의 분위기도 우울해질거 아냐.
그럼 언니가 납득할 수 있게, 거절할 방법을 생각하자. 게임을 하자고 할까? 나에게 게임을 이긴다면 사귄다고 하자. 그럼 어쩔 수 없을거니까.
그래. 너는 프로잖아. 프로답게, 계획대로 거절하는거야.
그러니까 이상한 걱정 하지말고 푹 자자. 내일 내가 예상했던 그대로, 최상의 모습으로 이겨야지.
***
"윈스턴!!! 그거 완성되었다고 한 때가 언젠데! 왜 아직도 안주는거야?"
윈스턴의 땅콩 버터를 한스푼 퍼먹으려다 참는다. 내일 그 중요한 데이트날에 뱃살이 나와보이면 안되잖아.
대신에 죄 없는 바나나 껍질만 집어다 쭉쭉 길게 찢는다.
"아직 실험이 완전하게 성공한건 아냐. 그러니까 못 주지."
"아저씨 실험이 완벽한 성공작이었던 적은 없잖아. 내가 내일 친히 실험해줄게. 나만큼 확실한 실험이 어디있다고 그래."
나에게 그걸 주지 않으려 손을 높게 올린 윈스턴의 어깨를 타고 올라 손에서 그걸 낚아챈다.
"레나! 일단 이곳에서 실험을 해 본 후에 밖으로 나가도록 해, 알았지?"
그가 걱정스럽게 날 바라본다. 알았다고 손을 흔드는데도 그는 미덥지 않다는듯 계속 미간을 찌푸린다.
"또 왜."
"하나양에게 고백한거 진심이야? 어린애에게 장난으로 그럼 안된다, 너."
"장난? 그렇게 보였어?"
나는 진심이었어. 나는 정말 그 애가 좋은걸?
"누구라도 그렇게 봤을거야 레나. 네가 좀 가벼운 애니. 하나양의 표정에서도 조금 기분 나쁜 티가 나던데?
네가 장난으로 그렇게 한다고 느꼈을지도 몰라. 그의 말을 듣고 나니 걱정이 밀려온다.
갑자기 좋아진것도 아니다. 잔잔하게, 마음 속으로 걸어온 아이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렇게 고백을 한 것일 뿐이다.
그게 문제야. 내일도 그렇게 즉흥적으로 나가다간 분명히 차인다, 좀 진지하게 해봐. 윈스턴의 충고를 듣자 머리가 복잡해진다.
모르겠어. 계획을 세운 적은 없는걸. 늘 즉흥적으로, 직감에 맞춰 살아왔어.
"충고 고마워 윈스턴. 어떻게든 해 볼게."
그에게 서둘러 인사를 하고 방을 나온다. 어떻게든. 잘 해왔잖아. 내일도 잘 될거야.
**
하나와 데이트를 하기로 한 시간보다 세시간 일찍 일어난 나는 윈스턴의 연구실에 있다.
예전에 내가 수 개월 갇혀 살았던 곳. 이곳이라면 어떤 실험을 해도 안전하다. 내 가슴에 가속기는 없다.
방으로 들어간 나는 기지에 퍼져있는 광범위 시간가속기의 영향을 제거한다.
그리고 서둘러 어제 윈스턴에게 받은 그것, 목걸이(초소형)형 시간가속기를 착용한다. 손바닥보다 살짝 작은 크기를 한 이거라면 셔츠를 입을 수 있다.
매일 티셔츠나 전신 타이즈형 전투복을 입은 모습만 보여주다 셔츠를 입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진지한 모습을 보여주라고? 셔츠를 입고 방에 있는 거울을 본다. 평소보다는 훨씬 덜 장난스럽고... 더 멋지잖아?
이정도면 그녀가 반하고도 남겠는데? 하는 순간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투명하게 보인다.
거울에 손을 가져가자 거울을 통과할 듯 통과하지 않을 듯. 분명히 거울을 만지는 촉감은 느껴지지 않지만 손 끝은 거울에 닿아있다.
서둘러 벽에 붙어있는 긴급 버튼을 눌러 가속기를 재가동한다. 다시 몸에 촉감이 돌아온다. 잠시만이지만 땀이 등을 타고 흐른다.
아, 안되는건가... 아쉬움에 입 안이 쓰다.
결국 내가 입은건 평소와 같은 청바지와 티셔츠, 그리고 커다란 시간 가속기.
***
밴드를 붙이며 입으로 중얼중얼 욕을 쏟아낸다. 분명히 잘 하려고 했는데.
잠을 자려는데 언니가 진지한 얼굴로 고백한 그 장면이 머릿속에서 뱅글뱅글 돌았다. 덕분에 잠을 설쳤고, 이렇게 서두르다 욕실의 문턱에서 크게 넘어졌다.
"아침부터 피를 보면 재수가 없다는데..."
내가 말을 해놓고 내 입을 친다. 말을 하면 그대로 이루어진단 말야.
치마를 입으면 안 예쁘겠지. 오히려 칠칠맞아 보일거야.
결국 내가 입은건 청바지와 티셔츠.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몸을 비춰보다 또 신경쓰이는게 생겼다.
앞머리... 좀 그렇지?
**
"하나! 좀 늦었네?"
언니가 차 안에서 나를 부른다. 내 얼굴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언니의 얼굴을 무시하고 옆자리에 올라탄다.
"꼬맹이, 어디 다쳤어?"
"아 조금요."
언니가 그렇게 걱정 할 만도 하다. 사이드미러에 비친 내 얼굴을 흘끗 본다. 볼에 하던 페인팅은 없지만 그보다 조금 위에, 밴드가 하나 붙어있다.
앞머리를 조금 자르려다 왕창 잘라버렸다. 숱가위를 든다는게 그냥 미용가위를 들어버렸다. 으앗, 하고 손을 확 내린다는게 그대로 쓱, 하고 얼굴을 그었고 그 결과가 이렇다.
모자와 밴드까지 덧붙이자 데이트는 무슨, 편의점 가는 복장도 이보다는 더 갖춰입었을거 같다.
아무 말 없이 시트에 몸을 파묻는다. 언니가 내 눈치를 살피더니 차를 운전한다. 부드럽게 차가 기지를 빠져나오더니 고속도로에 접어든다.
"어디 갈거에요?"
"응? 너도 나도 놀이공원을 좋아할거 같아서 싫어?"
놀이공원이면 게임센터도 많이 있겠지... 괜찮아요, 라고 간결하게 대답한다. 뭐 나쁘진 않다. 적당한 데이트 코스 계획이고, 적당하게 찰 이유도 만들어줬다.
*
역시 입이 방정이다. 아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화창하던 날씨는 순식간에 흐려졌고 폭우가 쏟아졌다. 결국 놀이공원은 조기 폐장.
돌아가는 길은 놀이공원에 있었던 차들과 뒤섞여 꽉 막혔다. 결국 언니가 예약했다던 레스토랑의 저녁식사는 물 건너갔고, 도중에 길에서 산 비에 젖은 와플과 커피 한잔이 우리의 저녁이다.
"아. 더럽게 재수없네."
결국 비가 쏟아지는 밤하늘을 보고 뱉어버렸다.
하루종일 내가 한 것은 게임이 전부, 그것도 휴대용 게임기도 가져오지 않아 휴대전화로 게임을 하다 배터리가 부족해 충전을 시키고 있다.
"Jae soo? 그게 뭐야?"
초조해하던 언니가 호기심을 가지고 물어본다. 결국 언니는 그렇게 가볍고, 즉흥적이고, 호기심 많은 여자일 뿐이다.
그래. 우린 통하지 않을지도 몰라.
"아...음... luck? 그러니까 내 말은 bad luck 이라고요."
아아... 언니가 다시 입을 다물고 운전대를 잡는다.
***
Bad luck이라고.. 그래. 오늘 하루는 불운한 날이네. 너에게는 하루를 낭비한 셈이고 난 처음으로 신청한 데이트에서 거하게 차이는 날이고.
좌우로 흔들리는 와이퍼만을 바라보며 나도 입으로 망할(suck)이라고 내뱉는다.
일기예보를 봐야 했을까. 비가 오기 시작했을때 미리 전화를 할걸. 플랜 B를 짜 두는것도 좋았을거야.
그래. 너무 즉흥적이었어. 나처럼 즐기는걸 좋아하니까 놀이공원을 가자고 했어. 나처럼 장난치는걸 좋아하니까 좋아했을지도 모르지.
교란팀. 절대 작전에 따라 흘러가지 않는 팀이다. 작전보다 현재의 감을 믿고 움직이는게 생존에 능하다.
그에 반해 그녀가 속해있는 돌격팀에서는 서로간의 팀워크를 믿고 정해진 작전에 따라, 전술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그래, 우리는 다를지도 몰라.
"오늘...즐거웠어요." 기지에 도착하자 아이가 나에게 뜸을 들이더니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먼저 내린다.
비가 내리는데! 후다닥 뛰어가는 아이의 뒤를 쫓아 뛴다. 기지에 들어가기 전 돌로 된 블록에 발이 걸렸는지 아이가 휘청, 한다.
그녀를 잡아주려고 뛰다가 나도 주르륵, 미끄러진다. 아이를 잡을 틈도 없이 내 발이 아이를 기지로 들어가는 입구 양 옆에 놓인 연못으로 차 버린다.
***
엇 하는 사이에 연못으로 빠졌다. 엉덩이가 아픈건 둘째치고 짜증이 확 솟았다.
이 사람이 하루를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최후까지 대단하게 장식을 하는구나.
"아... 더럽게 재수없네."
절대 욕이 안나올거 같던 언니의 입에서, 그것도 구수한 한국 욕이 나왔다. 놀라 언니를 바라보자 언니가 울상인 채 물에 젖어 얼굴에 붙은 머리를 쓸어올리며 나에게 손을 뻗는다.
저 언니가 저런 표정도, 저런 욕도 할 줄 아는구나. 한없이 행복하고 즐거워서 그런건 못하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정말, 영국 신사와 같던 언니의 입에서 '더럽게 재수없네'는 깨는 욕이라 웃음이 나온다. 아니 이 뭣같은 상황에 웃음이 나오는걸까.
한참을 웃자 언니가 나에게 손을 뻗은 채 이상하게 쳐다본다. 언니의 손을 잡아 연못에 처박는다.
연못에서 얼굴을 빼고 WTF 욕을 하려는 언니의 얼굴을 다시 물에 박았다. 그러자 아래에서 언니의 손이 내 다리를 쭉 잡아당겨 물에 거꾸로 빠진다.
에라이, 이왕 다 젖은 김에 더 젖어버리자. 그렇게 처음에는 싸움처럼, 그리고 나중에는 장난처럼 우리는 웃으며 물장구를 친다.
나중에 기지에서 박사님이 나와 호통을 칠 때까지 우리는 정말 우리다운 데이트를 했다.
***
등 뒤에서 기침소리가 난다. 강아지가 컹컹 짖는듯한 기침소리가 멎자 이번에는 높은 소리로 재채기가 연거푸 들린다.
이번에는 재채기 소리가 연거푸 나고 난 후에 다시 요란한 기침 소리가 들린다.
이게 벌써 몇시간째인지. 차라리 잠을 자면 둘 다 조용할텐데.
"둘 다 잠 잘 생각 없어요?"
"아뇨?/아니?" 레나는 마스크를 쓰고 하나는 코가 빨개진 채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게임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둘은 대화중이다. 말을 하면 목이 안 나을텐데. 입을 다물라고 했더니 베개싸움을 시작하기에 결국 내버려뒀다.
몇시간 후, 둘은 게임기를 팽개쳐놓고 사이좋게 누워서 잠을 잔다. 둘이 마주보고 자면 둘 중 누가 더 심한 감기에 걸리려나, 아니면 감기가 나을까. 궁금해진다.
그러다 나란히 이마를 맞대고 자는 둘의 모습에 웃음이 나온다. 아까 둘과 따로 나눴던 대화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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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나, 데이트 결과는 어때요?"
"글쎄. 간신히 차이지는 않은거 같은데... 다음에 더 전술을 세워서 나가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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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양, 그래서, 데이트 해 보니 어때요? 역시 레나는 별로인가요?"
"응? 아뇨? 재미있었어요. 사귀어도 괜찮을거 같은데요? 아니, 우리 사귀는거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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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흥적인 삶을 추구하는 레나의 입에서 전술이 나왔고, 전술 시뮬레이션 게이머 출신의 하나 입에서 즉흥적인 대답이 나왔다.
처음에 둘이 데이트를 나간다고 했을 때, 우리들 사이에서는 내기가 나왔다.
레나가 하나를 꼬실 수 있을 것이다. 아니다 하나가 레나를 뻥 차버릴 것이다. 가장 많은 지분을 얻은 대답은 이 두가지이다.
그리고 내기에서 가장 큰 배율을 받은, 즉 단 한명만이 지지한 답이 있었다.
"둘은 지들이 사귀는지도 모르게 사귈거야. 내가 장담하건데 둘은 결코 사귄다는 말을 하지 못할걸? 사랑한다는 말이 먼저 나올거야."
역시. 나이든 분, 특히 저격수의 눈은 피할 수 없네요 아나. 이번 내기의 심판인 나는 아나의 승리를 선언해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