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신쿤(@nerf171)님의 썰을 기반으로 작성했습니다.
---
-너는 이제 실험체가 아니다. 새롭게 바뀔 세상의 주인이다.-
자신을 사신(reaper)이라 소개한 사내는 확고한 목소리로 말했다. 리퍼가 숨을 내쉴 때마다 가면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썩은 내는 그 자신의 목소리가 가진 힘을 압도하지 못했고, 이내 목소리는 실험체였던 "그"의 영혼을 매료했다.
그렇게, 그는 실험체에서 테러조직의 요원이 되었다.
리퍼 사령관이 여자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녀는 리퍼가 데리고 오던, 단순히 범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죽여도 되는 그저 그런 가이드가 아니었다. 사령관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새로운 세계를 열게 할 중요한 열쇠라고 했다. 그렇기에 리퍼는 그녀에게 상처를 입혔을지는 몰라도 죽이지는 않았다.
-이제 올 센티넬은 세상을 바꿀 열쇠다. 이 여자애는 센티넬을 움직일 열쇠고. 센티넬이 말을 듣지 않는다면 억지로 말을 듣게 해야지. 내가 신호를 보내면 여자를 쏴라. 죽여도 좋다. 이후의 일은 내가 맡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로 가이드를 쏜 것은 사령관 자신 스스로였다.
멀찍이서 저격총으로 상황을 주시하던 그는 이내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열쇠라던 센티넬을 중심으로 검은 안개가 나오더니 주변의 모두를 감싸고 사라졌다. 그리고 일 분도 지나기 전에 그들은, 아니 열쇠 혼자만이 돌아왔다.
죽인거구나. 위험해. 나도 죽일지 몰라.
그는 다시 스코프에 눈을 가져다댔다. 여기를 보기 전에 먼저 죽여야 했다.
방아쇠를 당기려는데, 센티넬이 자신의 쪽으로 눈을 돌렸다. 앞이 보이는 건가? 봉사라면서?!
도망가, 몸이 외치는 것보다 한 박자 빠르게 시야에서 그녀가 사라졌다. 그리고는 한쪽 팔이 괴물의 손에 잡혔다.
그녀의 눈은 깊이를 알 수 없이 검었고 우리의 눈과는 달랐다. 새까만 돌, 오닉스. 그 와중에 그는 눈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아름답고, 또 위험하다 느꼈다. 보석을 박은 데스마스크를 보는 것 같아 소름이 돋았다.
"왜 날 쏘려고 했어? 나는 그저 그녀만 돌려받고 싶었을 뿐이야."
곧바로 대답이 이어지지 않자 팔을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대답해줘."
뼈가 으스러지는 역겨운 소리와 비명이 동시에 들렸다. 반사적으로 본심이 튀어나왔다.
"네가 죽였잖아! 네 주변에 있는 모두를!"
"내가?"
데스마스크에 비로소 생명이 돌아왔다. 혼란에 휩싸여 손아귀의 힘이 풀어지자,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 조금 더 힘이 풀어지면 도망갈 수 있어.
"네가 죽였어! 우리의 사령관도, 너희 기관의 배신자도! 그리고 그 귀한 가이드도! 뒤를 돌아봐! 흔적도 없이 사라졌..."
그는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레나가 반대편 손으로 그의 목을 졸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숨이 막히는 소리를 내며 레나에게 발길질을 했다. 발길질은 점차 난폭해졌다 천천히 잦아들었다. 그걸 느끼지 못한다는 듯, 레나의 눈은 쉴 새 없이 허공을 떠돌았다. 무장한 탈론의 요원들이 레나를 죽이기 위해 뛰어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 듯 중얼거렸다.
"내가 하나를 죽여? 내가? 난 죽이지 않았어."
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내 곁을 떠나는 걸까. 부모님도, 그리고 그녀까지.
내가 가장 아파하는 그 곳으로 와 준다고 했다. 그게 지금이야, 하나야.
레나는 입술을 달싹여 가이드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불퉁한 목소리도, 걱정하는 손길도 없었다. 그 손길을 지운 건, 바로 나다.
왜지, 왜 나는 그녀를 없앴지? 왜 사람들은 나를 가만히 두지 않지? 세상은 왜 내가 그녀를 없애게 했지?
그녀도, 세상도 나를 배신했어.
그녀가 없는 미래 따윈 나와 함께 없어지는 게 나아.
레나를 중심으로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아까는 그녀를 중심으로 땅에서 검은 안개가 퍼졌다면, 이번에는 그녀를 중심으로 검은 회오리가 허공으로 퍼졌다. 바닥의 모래가, 탈론의 천막이, 그 안에 있던 장비들이, 허공으로 올라 고운 입자로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변에 파괴할 것이 없어지자 회오리는 허공에서 회전하는 것을 멈추었다.
***
기다린다니, 참 바보 같은 말을 했구나.
다시 돌아온 모래사장은 방금 전과는 매우 달라져 있었다. 잠들어있던 폐허에서는 과거의 재해가 다시 반복되었다. 휘몰아치는 검은 회오리는 문명의 흔적마저도 집어삼켰다.
피부에 스쳐 상처를 내는 돌가루를 맞으며 하나는 이 재해의 중심에 누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모든 것을 분해시켜 무(無)로 되돌리는,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들을 이 시간대에서 없애고자 하는 유아적인 사고. 그녀다. 그녀가 저 가운데에서 아파하고 있었다.
얼마나 놀랐을까. 아마 그녀가 자신보다 이곳에 먼저 도착했으리라. 10년을 기다린 그녀의 눈앞에 하나는 시신조차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셈이다. 10년 후 미래에서 기다린다고? 기다려왔고 또 찾은 사람은 언니였다.
과거의 사람만 구해놓고는 뭐가 그렇게 자신만만했어, 송하나.
코와 입을 옷소매로 틀어막은 하나는 한 걸음, 한 걸음, 회오리의 한 가운데로 걸어갔다.
지금의 언니를 책임지기 위해.
“언니!”
폭풍의 가장자리는 그나마 양호한 편이었다. 미세한 돌가루가 내는 아릿한 상처를 뚫고 들어간 폭풍의 안쪽은 그야말로 재난지역 그 자체였다. 바람이 강해 몸을 곧게 펼 수도 없었고 한 걸음을 떼는 것조차 힘들었다. 자잘한 돌멩이부터 콘크리트 벽돌까지, 바닥에서 붕 떠오른 흉기들은 몸을 수그린 하나의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지나쳤다.
폭풍의 눈 속, 피 웅덩이의 한 가운데에 레나가 있었다. 고개를 위로 든 레나의 눈은 검었다. 대체 저 하늘에서 뭘 찾으려고 한 거야, 허공으로 사라져버린 그 어리숙한 여자애를 찾으려 한 거니. 하나는 그 초점 없는 눈에서 눈물을 느꼈다. 달래주고 싶어. 혼자가 아니야. 이제 내가 함께 있어줄게.
그녀는 레나를 달래고자 얼굴에 손을 댔다. 하나의 손이 닿자 창백한 레나의 볼에 핏기가 돌았다. 그래, 나 여기에 있어. 내가 언니를 진정시켜줄게. 눈물과 함께 웃음이 터지려고 했다. 이거야말로 내가 잘 하는 거잖아. 레나는 자신의 뺨에 닿은 하나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그녀의 검은 눈이 하나의 물기어린 눈과 마주했다.
내가 안일했어. 하나는 밭은기침을 내뱉으며 생각했다. 그녀의 마음 속 외로움은 손짓 한 번에 해결될 것은 아니었다. 마치 남극의 빙하를 체온으로 녹이려 한 것이 아닌가. 자신을 그렇게 소중히 대하던 언니는 몇 걸음 앞에서 그르렁거리는 짐승의 소리를 내고 있었다.
자신을 노려보며 걸어오는 언니를 보며 하나는 이것이 진정한 폭주임을 짐작했다. 육식동물과 눈을 마주치면 본능적으로 움직이지 못한다고 하던가. 이성의 끈을 놓은 레나는 천천히 걸어와 느긋하게 사냥감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체스말을 섬세하게 더듬던 긴 손가락이 이번에는 자신의 목을 우악스럽게 틀어쥐었다. 숨을 쉬지 못하게 되자 사고가 정지했다.
언니, 이렇게 할 거면 제발 이성을 찾지 말아줘. 언니의 손으로 날 죽였다는 사실 자체를 생각하지 말아줘.
“...했잖아. ...해”
응?
짐승의 으르렁거림 가운데에서 사람의 말이 들려왔다. 뇌에 산소가 공급되지 않아서인지 눈앞이 흐릿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눈에 힘을 줘 언니의 입술을 노려봤다.
“...아프...했잖아. ...지긋...해.”
아프다고 했잖아.
차라리 죽게 내버려두지 그랬어? 이런 삶은 지긋지긋해.
내가 10년의 시간을 거슬러오는 동안 언니는 10년 전의 시간으로 되돌아갔다.
외로움, 상실감, 고통. 언니가 느끼는 지금은 마치 10년 전 과거와 같으리라.
손을 들어 다시 언니의 얼굴을 쓸어내린다. 언니의 오른쪽 눈가, 지금은 금이 간 오닉스가 된 그 상처를 쓸어준다. 손이 눈 위를 감싸자 레나가 자연스럽게 눈을 감는다.
“많이...아팠지? 늦..어서...미안..해.”
기다려줘서 고마워. 늦어서 미안해. 아파하지 마. 나는 여기에 있어. 그러니까 도망가지 마.
슬픔이 밀려와 눈의 양 옆으로 눈물이 흐른다.
레나의 손아귀에서 힘이 빠졌다. 스르륵, 폭주가 지나간 탓인지 레나가 힘을 잃고 옆으로 쓰러졌다. 하나가 몸을 옆으로 돌리며 숨을 헐떡였다. 폭주가 제어됐다. 다행이야, 그제야 하나는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언니, 간신히 몸을 일으킨 하나는 옆에 쓰러진 레나를 흔들었다. 흐느끼던 하나가 숨을 들이마셨다. 레나를 똑바로 눕힌 하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코 아래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손가락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어깨까지 제멋대로 자란 긴 머리 사이로 보이는 야윈 목에서 위태로움을 느꼈다.
누구, 하고 물어보려는데 먼저 고개를 들었다. 눈을 덮은 긴 머리 사이에서 반짝이는 눈이 보였다. 양쪽 눈 모두에 자잘한 실금이 가 있었다.
거긴 어땠어.
그 앞으로 걸어가 주저앉았다.
엉망이야. 그래, 내가 더 엉망으로 만들었어.
손을 내려다본다. 피로 물든 손을 옷자락에 쓱쓱 닦는다.
목을 졸랐어. 내 아래에서 입을 벌리고 어떻게든 숨을 쉬려고 하는데 즐거움마저 느껴지더라고. 화가 났어. 왜 나에게서 모든 걸 앗아가는지 이해를 못 하겠어서, 그래서 너무 화가 났어. 부수려고 했어.
그런데...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애였어. 나에게 화를 내지도, 날 무서워하지도 않더라고. 오히려 나에게 아팠지? 미안해. 라고 하는 거 있지? 그래서 여기로 왔어. 내가 멈추질 못하겠더라고. 그래서 시간 자체를 멈췄어.
다행이다.
씩 웃는다. 다행이라고?
다행이야. 멈출 순 없었지만 적어도 내 편은 있는 거잖아. “아팠지.”라고 말해줄 사람이 있잖아.
그래, 그건 다행이다.
저 편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걱정 마. 그녀는 괜찮아. 일찍 멈춘 덕분일까.
그래? 어땠어?
응. 행복해. 엄청나게 장난치고 웃고, 또 떠들어. 그런데 있지. 이제 슬슬 돌아가야지. 그녀가 부르고 있어.
“나”는 씩 웃으며 “우리”에게 말했다. 그녀가 부르고 있어? 하지만...
괜찮을까?
괜찮을 거야. 그녀는 나에게도 손을 뻗어준걸.
“나”가 “나”에게 말한다. 내 야윈 손이 내 손등을 쓸어준다. 나는 그녀의 긴 머리를 귀 뒤로 넘겨준다. 괜찮을까.
걱정 마. 그녀는 내가 그녀를 위해 얼마나 먼 시간을 여행했는지 알고 있어. 그녀의 손을 잡아줄 사람은 너 뿐이야. 돌아가자.
일어난다. 나를 따라서 옆에 앉아있던 나도 함께 일어난다. 내가 이렇게 작았었구나. 우리 셋은 서로가 서로를 마주본다.
이제 이렇게 볼 일은 없을 거야. 다른걸 보게 되겠지.
나가는 나의 뒤로 내가 말한다. 무슨 소리야? 뒤를 돌아보지만 아무도 없다.
***
“미래에서 날 데리러 왔잖아. 내가 미래에서 언니가 오길 얼마나 기다려왔는데, 이젠 여기서 같이 웃으면 되잖아.”
왜 우리는 이렇게 닿을 듯 닿지 못하는 걸까. 이제야 내 마음을 알았는데. 이제야 언니에게 뭔가를 해 준다 생각했는데.
언니의 가슴을 주먹으로 친다.
“숨 쉬어. 숨 쉬라고. 날 봐.”
내가 이제 사랑한다고 고백할 생각이었는데, 기분이 좋다면 언니에게 내 첫 입맞춤을 줄 생각이었는데.
왜 언니는 이렇게 도망가는 거야.
“돌아와. 내가 이렇게 언니를 부르잖아.”
나는 언니의 입에 입을 맞춘다.
***
숨을 쉰다. 찝찔한 땀내와 비릿한 피 냄새. 등에 배기는 땅이 내가 현실을 살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감은 눈으로 붉은 빛이 보인다. 빛? 눈을 떴다. 눈이 부셔 눈물이 고인다. 다시 눈을 감는다.
처음으로 “제대로” 보는 현실에 놀라 다른 감각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입술에 부드럽게 닿는 입술을 느낀다. 볼에 떨어진 물기를 느낀다. 그녀의 슬픔을, 그리고 애 타는 마음을 느낀다.
이게 각인이구나. 나도 모르게 입 꼬리를 올리자 이상함을 느낀 하나가 살짝 눈을 뜬다. 가늘게 떴던 눈이 나와 마주치자 크게 커진다.
몸을 일으키려는 그녀의 뒷머리를 꾹 누른다. 입 열어봐. 혀로 톡톡, 그녀의 입술을 건드린다.
귀여워. 이렇게 화들짝 놀라는구나.
“예쁘게 생겼네, 우리 자기.”
“언ㅈ...!”
“기다려줘서 고마워. 정말 오래 기다렸어.”
언제, 대체 왜! 입을 뗄 때마다 하나는 나에게 말을 걸 때마다 다시 입을 맞춘다.
몇 번째일지 모를 입맞춤이 지나자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날 본다. 그녀의 눈에 다시 물기가 어린다.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다시 와 줘서 고마워요. 용기 내줘서 고마워요.”
“자기가 날 불렀으니까. 자기가 부르면 어디든 갈 거야.”
“기다려줘서 고마워요.”
“자기도 기다려줘서 고마워.”
“자기를 처음 본다. 안녕하세요, 레나 옥스턴입니다. 참 예쁘게 생겼네요.”
그녀의 뺨 위로 눈물이 흐른다. 손으로 눈물을 훔친 그녀도 날 따라 웃는다.
“네, 안녕하세요. 송하나에요. 언니도 예쁘게 생겼네요.”
우리는 가만히 앉아 서로를 바라본다. 서로를 보고 느끼는 반가움과 사랑이 전해진다. 말을 하지 않고도 서로의 마음이 통한다.
“이제, 내 곁을 떠나지 마요.”
“응, 약속할게.”
그녀가 내민 새끼손가락에 손가락을 건다. 우리는 지금, 서로라는 선물을 갖게 되었다.
'오버워치 > 트레디바트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센티넬버스AU) Present - Epilogue (1) | 2017.01.07 |
---|---|
(센티넬버스AU) Present - 13 (4) | 2016.12.01 |
(센티넬버스AU) Present - 12 (3) | 2016.11.10 |
(센티넬버스AU) Present - 11 (0) | 2016.11.08 |
(센티넬버스AU) Present - 10 (1) | 2016.1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