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신쿤(@nerf171)님의 썰을 기반으로 작성했습니다. : http://sinkoonote.tistory.com/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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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는 이 것이 틀린 것은 아니겠지?"
다부진 얼굴을 한 가브가 나를 돌아본다. 그는 나에게 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한다.
"왜, 대체 뭐가 걱정되는건데?"
"우리가 하는 이 거. 사람을 죽이는거 아냐. 과연 우리가 우리보다 훨씬 더 약한 사람들을 죽이는 이 것, 이것이 틀린거면 어떻게 하지?"
"잭..."
그가 얼굴을 살짝 굳히며 나에게 1+1은 2라는 것을 알려주는 어른마냥 나에게 차근차근 얘기한다.
"잭, 우리가 하는 것은 폭력이라는 단어로 정의내릴 수 없는거야. 이들은 혼란과 파괴를 가져오는 존재이지. 이들에게 대화는 더 이상 통하지 않아.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질서와 선을 존중하는 우리는 더 큰 힘을 가지고 이 혼돈을 정리하는 것이지."
"그래, 가브가 그렇게 말하는 거라면야..."
나는 가브의 어깨에 고개를 기댄다. 반군의 본거지라고 모두 악마만이 사는 장소는 아니다. 반군의 아내와 아이, 그들이 꾸리는 삶의 터전, 시장과 학교, 이 북적거리는 모든 장소들이 피비린내 나는 침묵으로 뒤덮혔다. 오늘 우리가 처리한 시신들 중에서는 시신이 들어가는 비닐백의 반 정도밖에 채워지지 않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들, 그들도 이렇게 죽였어야 했을까.
"걱정 마 잭. 우리는 틀린 일을 하고 있지 않아. 힘을 가진 우리는 이 힘을 세상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쓰는 거야. 우리가 하는 일은 고귀한 일이야. 작은 희생에 너무 연연해하지 마. 그 희생이 가지고 올 더 큰 평화를 생각해보라고. 모든 것에는 그만한 대가가 필요한거야."
우리는 옳은 일을 하고 있어. 아무리 옳은 일이라도 어쩔 수 없는 희생은 필요해. 걱정하지 마, 잭.
그의 그 말을 믿었다. 아니, 믿고싶었다.
그런 그가 나의 곁을 떠나려고 한다. 적의 부비트랩은 가면 갈수록 지능화되어가고 있었고 점점 더 잔인해져 가고 있었다. 그가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리고 부비트랩은 정확하게 그의 급소만을 공격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의 이름을 크게 부르는 것 뿐이었다. '잭! 이 쪽으로 오지 마.' 아무리 그의 목소리에 힘이 없을지라도 나의 행동을 저지시킬 힘은 충분했다. 부비트랩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췄다고 생각했는지 그가 나를 불렀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보며 나는 본능적으로 그가 나의 곁을 떠난다는 것을 느꼈다.
그가 없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다른 센티넬들은 그처럼 굳건한 신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저 마음껏 자신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분쟁지역으로 뛰어들어 살육을 자행한다. 그런 그들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까. 그런 그들과 마음과 몸을 통할 수 있을까.
"안돼, 안돼 가브. 안돼, 어디에도 가지 말아줘. 내 옆에 있어줘."
그의 눈이 까무락대고 있었다. 힘이 빠지는 그의 손을 다시, 또 다시 단단하게 붙잡았다. 제발 내 곁을 떠나지 마. 나와 함께 있어줘. 나의 고통스러운 마음을 위로해줘.
나의 간절한 마음이 통했을까, 그의 신체에 가해진 부상이 천천히 회복되어가고 있었다. 세포의 움직임이 어마어마하게 빨라졌다. 빠르게 차오르는 부상 부위와 다르게 멀쩡한 부위의 살들은 노화를 지나 썩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썩어가는 살은 다시 새 살로 채워져간다. 산 채로 자신의 몸이 썩어들어가는 그 느낌, 그 고통 속에서 가브는 비명을 질렀다. 죽는 것이 더 나을 정도의 부상, 옆에 있는 총을 집어들었다. 관자놀이, 아니면 목, 아니면 심장, 그것도 아니면 세 군데 모두? 그를 죽여줬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의 존재, 그 자체가 나에게 위안이 되었기에, 죽지 못하는 몸을 죽이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두 번째 죄였기에.
그가, 그리고 내가 원한 것은 그리 큰 것이 아니었다. 내 갑작스러운 인핸싱 덕분에 망가져버린 그의 몸에서 고통을 감해주는 것, 그리고 할 수 있다면 원래의 구릿빛 건강한 피부를 가진 그의 모습을 되찾는 것, 그것 뿐이었다.
하지만 기관에서는 우리의 그 작은 부탁마저도 거부했다. 그와 나, 둘 모두는 각기 다른 실험실로 보내졌었다. 나는 하루가 멀다하고 빈사상태의 센티넬들을 마주했다. 그리고 그들을 어떻게든 살릴 것을 요구받았다. 힘을 불어넣으려는 순간, 살이 썩어들어가는 고통에 몸부림치던 가브가 떠올랐다. 그 이미지와 함께 내 앞에서 죽어가던 센티넬은 노화에 의해 사망했다. 그래, 나는 수많은 센티넬들에게 죽음을 선사했다.
가브의 처지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가 어떤 상황에서든지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일까. 연구원들은 그것을 가장 궁금해했다. 그렇기에 그를 가두어놓고 수 많은 방법으로 그를 계속해서 "죽이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 어떤 수에도 가브는 죽지 않았다. 끊임없이 세포들이 재생했고 성장했으며 사망했다. 그의 그 움직임을 멈출 수 있는 대상은 오직 하나, 나 자신 뿐이었다. 나의 손짓 아래에서 그의 몸은 성장을 멈췄으며 서서히 죽어가게 되었다.
"내가 이들에게 힘을 빌려준 것은 더 큰 선을 위해서였어 잭. 하지만 지금 이 일에는 어떤 목적이 있는거지? 내가 언제 죽는지 확인하는게 그들에게는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그는 나의 무릎을 베고 누워서 중얼거렸다.
"그들은 나와 같은 힘을 가지고 싶어해. 그저 나에게 부탁해서 내가 해결하도록 하면 될 것을. 그들은 나에게서 이 모든 힘을 빼앗아가려 해. 내 힘을 빼앗은 그 후에는 나를 버리겠지."
낮은 그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나지막한 목소리 안에 깔린 끈적한 분노. 그것은 후에 자신에 대한 혐오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 모든걸 알고 있었던 나는 그것을 나는 모른척했다. 그가 원하는 센티넬과 가이드에 대한 정보를 그에게 건네주는 것은 나였다. 세계의 질서를 향하던 그의 낭만적인 이상을 파괴해버린 나에 대한 속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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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 제발 진정해."
그는 눈 앞에 있는 모든것을 부수고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큰 빌딩에서 검은 연기가 올라가는 것을 보니 저 쪽으로 가면 레나 옥스턴이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레나 옥스턴의 모습은 이론상으로 배웠던 Code Black의 모습 그대로였다.
지금 이 곳을 파괴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화를 참지 못하고 자신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파괴시켰다.
"침착하고 레나 옥스턴이 있는 곳으로 가자. 괜히 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 필요는 없잖아."
지금 우리는 레나 옥스턴을 이용한 시간역행을 성공했다. 하지만 리퍼가 원하는 그 곳으로 이동하지는 않았다. 알 수 없는 문자를 쓰는 동양권의 국가, 그것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시간대로 오지 못했기 때문일까, 리퍼는 그 분노를 눈 앞에 있는 모든 곳에다 풀어대고 있었다.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어! 내가 그 인핸서를 다치게 해서 레나 옥스턴을 Code Black으로 유도했고, 인핸서와의 신체접촉으로 능력을 증폭시켰지. 그리고 마지막, 마지막으로 내가 레나 옥스턴을 조종했잖아! 그러면 이 곳으로 오면 안되는 거였지! 내가 원하는 그 곳! 최초로 센티넬과 가이드가 폭동을 일으킨 그 곳으로 갔었어야지! 그 곳에서 나는 센티넬들과 가이드들의 의식을 성장시킬 생각이었던 말이야!"
눈 앞에 있는 벤치를 총으로 난사하며 그는 고함을 질렀다. 그 큰 움직임조차도 그의 몸에 큰 부담이 될텐데, 그는 고통조차도 분노로 승화시키는것 같았다.
그를 말려야 한다는 생각에 허둥지둥 그에게 다가가 그의 몸을 움켜잡았다. 그의 정식 가이드인 나로서는 그의 몸에서 진행되는 변화, 그리고 그와 함께 오는 끔찍한 고통을 잠재울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분노를 조금이나마 진정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가브는 자신의 팔을 움켜쥔 내 손을 우악스럽게 잡아 길바닥에 패대기쳤다. 어떻게 네가 그럴 수 있어? 나는 입을 헤 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웃기지마. 내가 지금 하는게 단순히 화를 풀어내는 것으로 보여? 저기에서 올라오는 연기를 보면 레나 옥스턴, 그 빌어먹을 센티넬은 아직 충분히 폭주하지 않았어. 그렇기 때문에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은거라고! 나는 그 녀석을 폭주시켜서 꼭 이 세상 자체를 바꾸고 말거야. 나를 깔아뭉개던 그 벌레들을 역으로 내가 밟아죽일거라고!"
"잠깐 가브."
나는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에서 끈적이는 짓물과 고름들이 내 손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진정해, 지금 당신은 매우 흥분했어. 이대로라면 당신도 폭주해버린다고."
나는 오래전에 익힌 자전거 타는 기술을 꺼내듯 그의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나의 가슴을 거칠게 밀어 나를 거부했다.
"내 감정을 조절하려고 하지 마. 당신은 그저 내가 폭주하기 직전에만 필요한 약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냐. 네가 배운 그 온건한 사상으로 나를 막으려고 든다면 난 너를 용서하지 않을거야, 잭. 지금 네가 나에게 하려는 짓은 기관의 놈들과 마찬가지로 나를 속이는거야."
가브는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뒤로한 채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간다. 그런 그의 등만을 바라보던 나도 곧 그의 뒤를 따라갔다.
***
매캐한 연기와 뜨거운 열기. 내가 마지막으로 있었던 것은 무엇인가가 탈 수 없는, 먼지와 모래만이 있는 곳이었다.
언니를 지키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언니의 몸을 가렸었다. 하지만 그것 또한 리퍼의 계략이었다. 총알이 옆구리를 스치며 몸에서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의 계략대로 움직이면 안돼, 언니. 나는 괜찮으니까 진정해. 언니를 이용해서 이상한 곳으로 갈거야.' 내가 알고 있는 리퍼의 계략에 대해서 언니에게 모두 다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내 한쪽 눈이 다친 것만으로도 언니의 평정심은 한계에 도달했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언니의 호박색 눈이 오닉스와 같은 빛으로 물들어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어둠이 나와 언니를 모두 집어삼켰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나는 뜨거운 열기를 느끼며 이 곳이 내가 마지막으로 쓰러진 그 곳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얼마나 쓰러져 있었던 것일까,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하자 하늘이 뱅뱅 돌았다. 뜨거운 고통이 옆구리에서 온 몸으로 퍼져 무의식적으로 옆구리를 손으로 짚었다. 피가 내 옷을 흠뻑 적시고 내 손바닥 사이로 비집어 나왔다. 어떻게든 이 피를 멈추게 해야 한다. 언니를 찾아서 돌아가야 한다. 그의 복수에 언니를 이용하게 하지는 않겠다.
손을 뻗어 옆에 굴러다니던 각목을 집어들었다.
***
가브와 잭이 레나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파괴의 중심부, 그 곳을 중심으로 검은 회오리가 불고 있었다. 그리고 검은 회오리의 눈 안에 레나가 있었다. 무릎을 꿇은 채 초점이 맞지 않은 검은 눈으로 레나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있었다. 그녀가 만든 회오리에 휩쓸린 무엇인가는 순식간에 미세한 알갱이로 변화해서 허공으로 날아갔다.
"그만 둬."
가브는 총을 들어 레나를 향해 발사했다. 총알이 회오리 안으로 들어가는가 싶더니 레나에게 닿기도 전에 부스러져 사라졌다. 무의식중에서도 자신에게 끼치는 위협을 알았을까, 서서히 레나를 중심으로 회오리가 멎어들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레나는 총알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짧은 찰나에 리퍼는 레나에게 달려들어 무릎으로 그녀의 얼굴을 가격했다. 그리고 쓰러진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 억지로 일으켰다.
"대체 누구의 말을 들은거야. 내가 원한 곳은 이런 곳이 아니었어. 다시 이동해. 이 곳이 아니야."
나지막하게 으르렁거리는 리퍼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일까, 레나와 리퍼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리고 레나는 자신의 머리채를 잡고 있던 리퍼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바닥이 닿은 곳을 중심으로 팔이 순식간에 가루로 변했다. 황급하게 손을 뗐지만 이미 팔목을 중심으로 그의 팔이 서서히 사라졌다. 출혈은 없었다. 마치 팔 하나가 원래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매끈하게 그의 한쪽 팔이 사라졌다.
공포에 질린 쪽은 리퍼였다. 뒤로 주춤거리던 그에게 레나의 눈동자가 따라갔다. 이대로라면 '나 자신'이 없어질거란 본능적인 공포 때문일까, 리퍼는 뒤로 몸을 돌려 달아났다. 레나의 시선을 피해 도망가던 중 그의 눈 앞에 동양인 가족이 지나갔다. '나를 지켜라.' 리퍼는 두 동양인 부부를 레나와 자신의 사이로 밀어버렸다. 부부는 비명을 지를 사이도 없이, 아니 그들이 있었다는 흔적마저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들이 남긴 것은 지갑과 아내의 품에 안겨 있다 바닥으로 넘어진 한 명의 소녀 뿐이었다.
"뭐 하는 짓이야, 이들은 죄 없는 민간인이잖아!"
잭이 지갑을 집어들며 외쳤다. 비록 순식간에 형체도 없이 사라졌지만 그들의 죽음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가득 찼다.
"흔해 빠진 비능력자지. 알아서 번식하고 우리에게 빌붙어 사는 기생충같은 존재."
리퍼는 방패로 쓰려는 듯, 소녀를 안아들어 자신의 앞을 가렸다. 그리고 레나가 그를 향해 뻗는 그 알 수 없는 회오리를 막으려 작은 소녀의 뒤에 숨었다. 소녀의 겁에 질린 비명이 허공을 갈랐다. 비명은 순식간에 멈출 것이다. 모두가 다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소녀에게 무슨 힘이 있었던 것일까, 레나의 그 괴이한 바람은 소녀의 머리칼도 건드리지 못한 채 도중에 멎어버렸다.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너는 누군가를 지키려고 하는 건가? 맹수는 토끼를 잡아먹지, 그리고 토끼는 풀을 뜯어먹어. 그것이 자연의 섭리야. 그리고 그것을 거부하는 너에게 남은 것은 없지."
리퍼는 레나의 복부에 발길질을 했다. 그리고 한참동안이나 일방적인 발길질은 계속 되었다. '이래도 내 말을 거절할테냐, 이래도?' 리퍼의 구둣발이 레나를 걷어찰 때마다 레나의 몸은 힘없이 바닥을 뒹굴었다. 이 모든 고통을 견디려는 듯 레나는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자신의 앞에 있던 소녀를 향해 능력을 발휘하지 않았다.
가브의 분노에 찬 폭력을 잭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것을 말려야 하는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던 그는 발치에 부딪힌 지갑을 집어들었다. S...o...n...g... 익숙한 이름이었다. 알 수 없는 문자를 쓰는 동양권의 국가, Song... 레나가 공격할 수 없는 단 한 사람. 레나의 무의식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 조종사(Controller)인 리퍼, 무의식의 주인인 레나, 그리고 그녀의 가이드인 송하나. 레나와 하나는 어떤 바람을 가지고 자기 자신의 어둠을 열었을까. 깨달음으로 잭의 입이 점점 더 벌어졌다.
"가브, 그만 해. 이제 됐어. 이 애가 누구인지는 아는 거야? 레나는 그 혼란스러운 정신을 하고도 지금 자신의 가이드가 위험한 그 시간으로 온 거야. 단지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 너의 의지는 저들의 의지를 이기지 못해. 너의 뜻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거야. 내가 너를 지키려고 하듯, 레나 또한 이 아이를 지키려고 할거라고."
잭은 리퍼의 등에 손을 얹었다. 리퍼는 거칠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내가 말했지. 억지로 나를 진정시키려고 하지 마. 네가 나에게 하려는 것은 나를 속이려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야. 나를 이렇게 고통의 구렁텅이에 넣은 것도, 그 비합리적인 처사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것도 바로 너야. 내가 널 어떻게 생각할거 같아? 나는 네가 끔찍해. 나에게서 손 대지 마."
아아, 그렇게 생각해 온 것이었을까. 잭은 뒤로 두세 발자국 물러섰다. 그래, 너는 내가 너에게 보여준 호의마저도 모두 고통과 분노로 승화시켰던 것이구나. 그걸 무시한 것은 나였다. 그를 온전히 감싸안아주지 못한 것도 나였다. 그에게서 영원한 안식을 뺴앗을 것 또한 나였다. 뒷걸음치던 잭의 발에 단단한 무언가가 차였다. 리퍼의 두 정의 권총 중 한 정이었다.
그는 총을 집어들고 자신의 과오를 향해 다가갔다. 자신이 만든 분노는 어린 소녀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자, 어서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가도록 해. 그렇지 않다면 네가 지키려는 그 가이드의 과거 자체를 없애버릴거야."
'자 이제 그만하자, 가브리엘.' 잭은 자신의 염원을 담아 그의 센티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강력한 진정 효과가 그의 몸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진정효과에 의해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 손에서 총이 떨어졌다. 잭, 너의 뜻대로 할 수는 없어. 리퍼는 양 손을 들어 어린 소녀의 목을 졸랐다. 한 손으로 감싸도 될 정도의 얇은 목을 조른 리퍼를 향해 잭은 그의 총구를 리퍼의 정수리를 향했다. '제발, 그만해 가브.'
그리고 레나의 뒤에 이 모든 것을 보는 그녀, 하나가 있었다.
***
몇번이고 정신을 잃을 뻔 했다. 불타는 상처에 진짜 불을 대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절대,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으리라. 혀를 깨물까 옷자락을 찢어 재갈대신 입에 물고 작열통을 참았다. 그러고서도 십여분을 의식을 잃은 듯 하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엔 옆구리에 난 화상이 화끈화끈거렸지만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하지만 언니를 찾아야 했다. 언니가 리퍼, 그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폭주 상태의 언니가 있을만한 곳, 가장 파괴가 많이 일어나고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주변의 간판이 한글로 써져 있는 것이 한국으로 온 것 같았다. 미래의 한국일까, 현재의 한국일까. 중요한건 이 모든 풍경이 이상하리만큼 낯이 익다는 것이었다. <경찰서> 라고 쓰여진 건물 앞을 지나다 총에 맞은 시신에게서 리볼버 권총을 집어들었다. 언니를 그에게서 지키기 위해서는 뭐든 필요할 것이다.
"제발 그만해 가브. 이게 마지막 경고야."
"레나! 내 말 듣고 있지? 어쩔거야! 너의 가이드를 죽이게 놔둘 생각이냐?"
고성이 오가고 있었다. 그곳을 향해 발을 질질 끌며 다가가자 리퍼가 어린 소녀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소녀의 긴 머리칼이 낯이 익었다. 소녀는 컥컥거리며 자신의 목을 조르는 리퍼의 한 팔을 할퀴고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조금 더 위에, 총을 겨누며 소리를 치는 잭이 있었다. 잭이 총의 격발을 잡아당겼다. 먼 거리에 있었지만 마음 속에서 철컥, 하고 총알이 장전되는 소리를 들었다. 리퍼의 가이드인 잭이라면 누구를 위해 행동할 것일까.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하나 또한 약실을 돌려 실탄을 장전했다.
그리고 누군가 짜 맞추지도 않았는데, 동시에 두 발의 총알이 발사되었다.
미처 다 낫지 못한 어깨가 다시 한번 더 으스러지는게 느껴졌다. 총을 발사한 반동으로 몸이 뒤로 나동그라졌다. 총이 혹시 소녀를 향한 것은 아니지? 어깨가 아픈 것도 모르고 하나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소녀는 바닥에 쓰러진 채 컥컥거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앙, 하고 우는 소리 사이사이에 엄마와 아빠를 부르짖는 소녀의 말이 들렸다. 자신의 총알은 정확하게 잭을 향했다. 그리고 잭의 총알은... 자신의 센티넬인 리퍼의 정수리를 향했다.
"그래. 네가 하는 행동은 잘못되었어. 이 모든건 나의 탓이야. 그러니까 내가 용기를 내 바꾸려는 노력을 해야겠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잭이 리퍼의 시신을 향해 말했다.
"용기를 내지 못했던 것, 너의 분노를 감당하지 못한 것, 모두 나의 과오야. 이젠 그것을 속죄할 때가 되었어."
그렇게, 리퍼를 바라보며 눈을 감지 못한 채 잭의 푸른 눈은 인형의 눈처럼 초점을 잃었다.
*
우는 소녀를 일으켜 세워 품에 끌어안았다. '괜찮아. 아무 일 없을거야.'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나온 위로의 말에 나는 자신의 입을 가렸다. 이 말은 예전에도 들은 기억이 있었는데... 언제였었지...
소녀를 바라봤다. 나와 비슷한 갈색 머리, 공포에 질려 숨을 헐떡거리는 모습.
"아아... 나를 구하러 와 준거구나."
아이를 안은 채 고개를 돌려 언니를 본다. 여전히 홍채는 본능에 이끌려 검게 물들어 있지만 왜인지 그 눈 안에 깊은 슬픔과 불안이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였다.
"미안... 구하러 와 줬었구나. 나만 까맣게 잊고 있었어. 미안해."
언니에게 손을 가져다 댔다. 아주 잠시동안, 언니가 나를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스쳐갔다. 하지만 괜찮아. 언니인걸. 언니의 볼에 손가락이 닿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내 손가락에서 손바닥을 언니의 얼굴에 댔다. 그리고 한쪽 얼굴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이 볼에 분명히 흐를 것 같은 눈물을, 보이진 않는 그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다.
고개를 돌려 소녀, 과거의 나를 바라봤다. 내가 이런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그리고 과거의 내가 본 지금의 나는 그 정도로 든든해 보였던 것일까. 내가 무슨 말을 했었지? 기억 속에 있던, 그 다정한 사람을 떠올린다.
"놀래켜서 미안, 괜찮아. 아무 일 없을거야."
나는 나에게 손을 뻗었다. 나는 조금 불안해 하더니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작은 손을 내 손바닥 위에 얹어주었다. 고마워, 겁내지 않아줘서 고마워.
"자, 괜찮아. 무서운 사람은 아니야. 단지 조금 특별하고 연약할 뿐이란다. 지금 이 사람도 겁에 질려 있어. 여기, 네가 쓰다듬어주면 덜 무서워할거야."
내 손을 이끌어 언니의 반대쪽 볼에 닿게 해 주었다. 그래, 차가운 괴물일 줄 알았어. 하지만 이 언니는 단지 겁에 질린, 슬퍼하는 사람일 뿐이야.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은, 혼돈의 중심에서도 나를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만을 가지고 11년을 여행해 온 언니. 그 혼란스러움과 고통스러움 속에서도 어린 나의 털 끝 하나라도 다치게 하지 않으려는 언니. 왜 이렇게 바보같아요, 조금쯤은 자기 생각을 해도 괜찮을텐데. 어쩜 이렇게 바보같이 나만 생각해줄 수 있어요.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고 언니의 눈가를, 언니의 입가를 쓰다듬는다.
"슬퍼하는거 같아요."
내가 그 작은 고사리손으로 언니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를 향해 말한 것일까, 아니면 언니를 향해 말한 것일까.
"응, 이 사람은 절박하게 지키고 싶은게 있어서 슬퍼하는거야. 자신이 아픈 것은 신경도 안 쓰고... 그래서 나는 대신 이 사람을 지켜주려고. 고마워, 쓰다듬어줘서. 이 사람이 고마워하고 있어."
나는 어린 나를 쓰다듬었다. 잘 있어, 하나야. 비록 지금은 슬프고 무섭겠지만, 곧 좋은 일이 생길거야.
그리고 나는 언니의 얼굴을 가슴 속에 끌어안았다. 언니와 접촉을 하자 언니의 마음 속에 있던 슬픔과 공포가 전해졌다.
그래, 무서웠구나. 슬퍼했구나. 이제 괜찮아. 나는 언니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자, 이제 언니가 가장 아파했던, 그 곳으로 가자. 이번에는 내 차례야. 내가 언니를 구해줄게."
언니의 어깨가 가볍게 떨렸다. 시간을 이동하는 그 느낌, 다시 신체의 말단에서부터 감각이 서서히 사라졌다. 저편에서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보고 있었다. 잘 있어. 나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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