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쿤(@nerf171)님의 썰을 기반으로 작성했습니다. : http://sinkoonote.tistory.com/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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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을 찾자 먼저 느낀 감각은 후각이었다. 코가 얼얼해질 정도로 썩은내가 진동했다. 안대가 풀어지고 눈이 빛에 적응하자 후드를 뒤집어쓴 남성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반갑네. 나는 리퍼라고 하네. 탈론의 지휘관이다. 당신을 이렇게 다루고 싶진 않았어. 미안하네."
"너라면 모든 센티넬들을 진정시킬 수 있겠군. 센티넬들을 다 아래에 두며 살아도 될 정도야. 너의 언니도 마찬가지야. 그렇게 우리 속에 갇힌 맹수마냥 살 사람은 아니지. 생각해봐. 강자가 약자의 아래에서 복종하는 사회는 기형적인거야. 어때, 나와 함께 사회를 바꿔 보지 않겠어?"
"당신이 말하는 사회에서 비 능력자는 어떤 대접을 받게 되는거지?"
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 침묵에서 대답을 들은 나는 말을 잇는다.
"그럼 다른 것을 묻지. 그 사회에서 능력이 모자른 능력자들은? C급 미만의, 아니면 아예 등급도 받지 못하는 센티넬이나 가이드들은, 비능력자와 비슷한 수준의 센티넬과 가이드들은 어떤 취급을 받게 되는거지? ...대답이 없는걸 보면 답은 알겠네. 당신은 그저 S급부터 C급까지 사회에서 어느 정도 대접을 받는 능력자들이 기관에서 통제되는 것이 싫은거잖아. 그래서 바꾸겠다는 것이고. 그 대접을 받는 사람들이 대놓고 모든 사람들을 지배하는 사회로. 오히려 지금보다 더 등급에 따라 권리가 제한되는 불평등한 사회. 그런 사회는 싫어. 모든 사람은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을 누릴 권리가 있어."
"그게 기형적인 사회라는거야. 자연의 약육강식을 봐. 부조리는 찾아볼 수 없고 명쾌하지. 기형적인 사회 구조를 개혁시키는거야."
"인간이 짐승과 다른 점은 약자들을 보듬어 안아주기 때문이야. 다시 야생으로 돌아가자는 당신의 말은 따를 수 없어."
당신의 이론에는 동의할 수 없어. 두려움에 다리가 떨렸지만 나는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분명 현재 센티넬이나 가이드의 삶은 비 능력자의 삶에 비해 엄청난 통제를 받고 있다. 자유롭게 여행을 갈 수도 없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다른 이들과 관계를 맺거나 원치 않는 폭력을 사용할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아니야. 그의 방식은 아니야. 이건 새로운 불평등과 새로운 족쇄를 만들 뿐이야. 내가 지금 차고 있는 족쇄를 다른 이에게 전가할수는 없어. 이 족쇄 자체를 부술 수 있도록 조금씩 노력해야지.
"그런거군, 알겠다."
그는 장갑을 벗곤 내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온다. 장갑을 벗은 그의 손은 곳곳에 썩어가는 상처가 나 있었으며 그 상처에서 구역질나는 냄새가 흘러나왔다. 그가 내 목으로 손을 뻗는걸 보며 나는 그가 나를 죽일거라고 생각한 채 눈을 질끈 감았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내 목에 닿은 그의 손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살며시 눈을 뜨니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렇군. 너는 정말 흥미롭군. 네 생각은 어쩔지 몰라도 나에게 있어서 넌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어. 너는 내가 보고자 하는 세상을 볼 수 있을거야."
'푹 쉬어둬. 너는 이 싸움에서 나에게 최고의 패를 쥐어줬어.' 그는 이 말을 남긴채 이 방을 나간다. 나를 도구 그 이상으로 대하는 그의 태도에 참을 수 없는 화가 난다.
"그래? 나는 네가 바라는 세상을 결코 볼 생각이 없어. 당신은 저 기관의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어. 네가 만든 세상은 지금이 가지고 있는 실낱같은, 아니 위장이라고 할 수도 있는 평화까지도 없애버리겠지. 당신의 세계는 과거 신분과 계급이 공공연하게 있던 미개한 사회로 돌아갈거야. 아니, 그것보다 더 심해. 당신은 인간이길 포기하고 짐승의 세계를 만들겠지.
난 결코 너에게 최고의 패를 건네주지 않을거야. 그 패를 불지르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의 계획을 막을거야. 그래, 나는 네가 원하는 사회를 절대 보지 않을거야. 이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짐승같은 놈."
문을 열고 나가려는 그의 몸이 흠칫, 멈춘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나의 앞으로 다가와 내가 묶여있는 의자째 나를 발로 걷어차 쓰러뜨린다. 정신을 차리려고 고개를 흔드는 사이에 그가 내 배 위로 타고 앉는다. 그리고 그 크고 썩어가는 손을 내 얼굴에 갖다댄다.
"정말? 내가 지금 나를 위해서 이 일을 하는거라고 생각하나?"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분노에 가득 찼다.
"넌 날 제대로 보고있지 않아. 그러니까 내가 바라는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지. 그런 너에게 세상을 볼 자격은 없어. 그리고... 그래, 내 계획을 위해서 약간의 손질을 할 필요는 있지."
내 얼굴을 감싼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
그 이후, 탈론으로부터의 연락은 없었다. 사상자도 없었기에 민간인들은 빠르게 공원에서 일어난 폭탄 테러를 잊어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오버워치가 능력자를 지키지 못한다는 이미지를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러 테러에 대한 소식을 잊게 만들었다. 바로 다음 날, 유명 연예인의 스캔들이 연달아 터졌으며 정치인들의 비리가 밝혀졌다. 탈론 또한, 자신들이 한 행동을 밖으로 알리고 싶지 않다는 듯 테러범들이 흔히 보내는 협박 영상도 없었다.
그렇게, 천천히 사람들은 그 사건을 잊어갔다.
레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레나에게 있어서 하나의 납치는 지구에서 중력이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와도 같았다. 왜 TV에서 보여준 세상은 이렇게 평온하지? 하나가 없어졌어. 나는 내가 어떻게 살아있는지도 알 수 없는데, 너희들은 어떻게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웃을 수 있지?
나의 세상은 그렇지 않아. 하나의 냄새도, 목소리도, 살결도 더 이상 느낄 수 없으니까. 그래서 내 세상은 너무나도 무미건조해. 나 빼고 너무 행복하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화가 났다. 하지만 화를 내면 안되는 것이니 억지로 화를 삭혔다. 그녀의 뇌파와 심박동은 시시각각 Code Red와 Code Yellow를 오갔다.
탈론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하나가 사라진지 닷새가 지난 후였다. 영상 속에서는 리퍼와 나란히 선 하나가 있었다. 그녀는 다소 창백하고 말라 보이기는 했지만 크게 다친 곳은 없는 듯했다.
레나는 영상이 틀어진 회의실의 가장 뒤에 팔짱을 끼고 팔뚝에 손톱을 박듯 세게 쥐고 서 영상에서 어떤 소리라도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옆에 서서 그녀를 감시하고 있던 있던 연구원이 하나의 외양을 묘사해주자 팔뚝을 쥐던 손등에 툭툭 불거진 핏줄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녀의 입가는 여전히 굳어 있었다.
"오랜만이네, 그쪽에 있는 눈 먼 센티넬은 아직 죽지 않았겠지? 자네들은 폭주를 한 센티넬을 죽이는 데에 선수지 않나. 걱정하지 마. 우리는 우리의 동포에게 정중한 대접을 했네. 봐. 얼굴은 살짝 야윈것 같지만 그건 환경 적응 문제인거고... 우리의 목적은 단순하네. 이 곳을 인도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안 그래도 돈이 많이 드네. Cloud 9이 여간 비싼게 아니잖는가.
우리의 센티넬들이 여기 있는 어린 가이드를 괴롭히기 전에 약 값을 마련해줬으면 좋겠네.
10월 31일, 우리가 지정한 장소로 약값을 가지고 와 주게. 그래, 가지고 오는 사람은... 그래, 이 아이의 센티넬이 좋겠군. 너희라면 그냥 얘를 포기하고 이 곳을 폭파시킬테니까.
많이 오지 마. 너 외의 단 한 명. 그렇게만 허용할게. 그럼 기다리겠어."
급하게 작전 회의가 소집되었다. 회의는 몇일이고 계속되었고 결국 탈론과의 약속일 새벽이 되어서야 끝났다. 그 때까지 레나는 폭주 방지를 위해 별도의 방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잭 모리슨 팀장이 호위로 뽑히게 되었다. 그렇게, 약속시간이 다가왔다.
"잭, 당신같은 민간인은 도움이 되지 않아."
"너야말로 뭘 모르고 있어. 리퍼, 그는 조종사야. 센티넬은 그에게 있어서 목각인형과 같지. 그런 점에서 보면 저 센티넬보다 내가 더 믿을만할걸."
그렇구나. 레나는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간가속기의 끈을 조여맸다. 그녀의 입가는 그 날 이후로 단단히 굳어 있었다.
"긴장돼? 네 애가 죽을까봐?"
들려오는 대답은 없다. 무언의 긍정일까.
"걱정하지마. 탈론에서는 하나를 죽이지는 않을거야."
"그래, 죽이지는 않겠지.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는 먹음직스러운 진정제 아니겠어?"
탈론과 협상을 하기 위한 돈이 든 수트케이스를 쥔 레나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떨리는 주먹 사이로 으득, 하는 소리가 나온다.
"쉿. 그러다가 폭주하겠어. 내가 이래서 당신을 보내는 것을 끝까지 반대했었어. 가이드가 잡힌 센티넬이라면 어떤 부탁이라도 다 줄어줄테니까. 하지만 위에서는 들은 척도 안하더군. 그래서 내가 네 옆에 있는거야."
"그런 걱정은 하지 마. 이미 하나를 놀라게 했다는 점에서 탈론에게 갈 생각은 없어. 맘 같아서는 걔들 모두를 씹어삼켜도 모자를 정도니까. 그리고 폭주하지도 않을거야. 내가 지금 하고싶은건 하나랑 같이 집에 가서 혀가 델 정도로 뜨거운 치즈피자에다가 치즈가루를 듬뿍 뿌려서 먹을거야. 그리고 함께 목욕하고 잘거야."
그러니까 어서 가자. 레나의 입이 느슨하게 풀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주먹은 단단히 말아쥔 채였다. 그걸 흘끗 바라본 모리슨이 툭 중얼거린다.
"역시, 너는 너의 가이드에게 맹목적이구나. 그 외의 다른건 중요하지 않겠지. 알겠어." 레나의 반대편에 선 잭 또한 그의 손에 든 총구를 한번 단단히 쥐어보았다.
그렇게, 각자 결의를 다진 그들은 임무지역으로 가는 수송차량에 올랐다.
*
이곳은 과거에 큰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되어버린 곳이다. 아직 센티넬과 가이드가 정부의 주도 하에 관리되지 않던 시절, 센티넬들의 테러가 있었다고 한다. 단지 재미를 위해서 사람들을 해치던 그들은 한 도시 자체를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망가뜨렸다. 그 파괴에서 살아남은 옛 문명의 잔해들은 이미 풍화될대로 풍화되어 거의 모래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일 이후로 센티넬과 가이드에 대한 엄격한 통제가 이루어졌으며 세계정부의 주도로 그들을 등록, 관리하는 체제가 만들어졌다.
삭막한 곳이네. 잭은 주변을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옆에 선 레나의 얼굴은 표정을 알 수 없었다. 아직 탈론에게서 자세한 GPS 데이터가 오지 않았다. 하지만 레나는 자신이 가야 할 곳을 알고 있는 듯한 자신있는 발걸음으로 앞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의 손에 들린 흰 지팡이만 아니라면 아마 그녀가 앞을 못 본다는 사실은 모를 터였다. 아무리 풍화되어 돌과 모래만이 남아있는 곳이었지만 레나가 걸어가기에 길은 단정하게 관리되지 않았다. 톡, 하고 돌부리에 발이 걸려 넘어지려는 레나를 붙잡은 사람은 모리슨이었다.
"괜찮아? 여기서 기다리는게 나아."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없어."
"그렇다고 어딘지 모르고 막무가내로 가는건 미친 짓이야."
"막무가내? 나는 내가 어디로 가야할지 알고 있어."
레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모리슨에게 되물었다.
"그 애의 향기가 전해져 오고 있어. 이 앞으로 몇 km만 가면 이 아이가 있어. 어서 가야해."
다시 앞으로 걸어나가는 레나의 팔을 단단하게 잡은 것은 그였다.
"이게 막무가내인거야. 산을 넘어야 할지 호수를 건너야 할지, 가는 길에 지뢰가 깔려 있을지도 몰라. 여기서 얌전히 기다려."
여태 감정 없이 마네킹처럼 굳어있던 레나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그리고는 레나가 모리슨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얹었다' 라는 표현은 그녀의 행동을 최대한 순화시킨 것이겠지. 엄연히 말하자면 레나는 자신을 막는 모리슨의 팔을 부술 기세로 붙잡았다.
"하나의 향기만 전해져 오고 있지 않아. 피비린내도 같이 나고 있다고. 그놈들이 뭣 때문에 피냄새를 흘리는진 모르겠지만, 우리 하나의 털 끝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내가 용서하지 않을거야. 하나를 건드렸던, 건드리지 않았던 나는 그 빌어먹을 연락을 기다릴 시간이 없어."
악다문 잇새에서 나오는 분노섞인 목소리에 손을 든 사람은 모리슨이었다.
"그래, 네 뜻대로 하자. 하지만 최대한 무식하지 않은 방법으로."
고성과 한숨,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잔잔한 목소리. 억지로 레나를 제 자리에 앉히고 모리슨은 휴대기기에서 지도를 업로딩했다.
"지금 네가 냄새가 나는 방향을 가리켜 봐. 냄새가 나는 방향과 거기까지의 거리, 최대한 자세하게 말해줘."
한숨을 쉰 레나는 자신의 발걸음 수와 방향으로 하나의 위치를 알려줬다. 그 정보를 바탕으로 조금씩 모리슨이 그린 원이 좁혀졌다. 이내 그 원은 반경 3km의 지점으로 모여들었다.
"....그래, 네가 가리키는 방향과 거리에 있는 지역 중에서 가장 가능성이 높은 지역은.. 바로 여기네. 이 정도의 시계라면 찾을 수 있을거야. 이동하자."
그는 먼저 일어나 레나가 넘어지지 않도록 그녀를 부축해 그 지점을 향해 걸어갔다. 레나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는 노병이었고, 베테랑이었다. 내가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그녀를 대한건 아닐까.
"고마워."
그래서 레나는 처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진심을 다해 사과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예상치 못한 사과에 모리슨은 눈썹을 올리며 레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별 말 없이 그는 레나의 손을 단단히 붙잡을 뿐이었다.
"그래. 가보자."
***
레나의 감각은 틀리지 않았고, 모리슨의 판단능력은 예리했다. 실제로 지도에 표시된 지점을 향해 걸어가자 저 멀리 새 것임이 분명한 검은 천막이 바람에 날리는 것이 보였다. '저기 있어.' 모리슨이 상황을 설명하기도 전에 레나가 흩날리는 자신의 앞머리를 누르며 말했다.
"새 천막의 펄럭이는 소리, 하나의 향기, 그리고 피냄새. 모두 다 저기서 나고 있어. 내 하나가 저기에 있어."
금방이라도 모리슨의 손에서 손을 빼낼듯한 기세로 레나가 움직였다.
"진정해. 지금 우리는 협상을 하러 가는 것이지, 싸우러 가는 것이 아니야. 감정을 드러내지 마."
모리슨의 말을 전적으로 믿게 되었는지 레나는 순순히 모래알이 씹히는 바람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저 깊은 밑바닥에 묻어버렸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는 레나의 팔을 붙잡고 모리슨은 검은 천막을 향해 걸어갔다.
"알려주기도 전에 찾아올 줄은 몰랐어. 역시, 시각장애인일수록 다른 감각이 발달한다는 건가."
썩은내와 함께 리퍼가 다가왔다. 그는 "시각장애인"이라는 단어에 유난히 힘을 주며 말했다. 웃음 섞인 그 목소리에 레나는 다시 주먹을 쥐었다.
"워, 진정해. 지금 너는 나와 싸우러 온 것이 아닐텐데. 내가 너의 토끼를 데리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
"하나를 먼저 보여줘. 돈은 그 다음이야."
"보여줘? 너는 그녀를 볼 수 없지 않나."
리퍼의 목소리에는 지나친 조롱이 섞여 있었다. 정중한 그의 목소리와는 반대로 마치 지금에라도 당장 레나와 싸우고 싶다는 듯한 말의 내용은 레나의 어깨를 조금씩 떨게 만들었다. 모리슨이 뒤에서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의 몸짓을 진정하라는 의미로 알아들은 그녀는 다시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자신의 감정을 묻기 시작했다.
"보여줘. 하나는 멀쩡한거겠지?"
"뭐 원하신다면..."
리퍼가 고갯짓을 통해 남은 한 명의 병사를 막사의 안으로 들여보냈다. 등에 총이 겨눠진 하나가 그리고 막사의 밖으로 천천히 걸어나왔다. 그녀가 걸어오면 걸어올수록 그리운 그녀의 향기와 함께 미칠 정도로 불안한 피냄새가 점점 짙어졌다.
"언니..."
너무나도 단순하게 하나는 레나의 품으로 안겨들었다. 괜찮은거야? 어디 다친 데는 없어? 손을 더듬거리며 레나는 하나의 몸 이곳저곳을 더듬었다. 그새 또 고생을 해서 살이 빠졌네. 레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지만 팔자로 휘어지는 그녀의 눈썹은 마치 그녀가 우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아냐, 다친 데는 없어."
더듬거리는 레나의 떨리는 손을 잡은 것은 하나였다. 찬 손으로 레나의 손을 잡은 하나도 가늘게 떨고 있었다. 괜찮아. 아픈데 없어. 하나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고, 애써 밝은 척을 하고 있었다. 레나는 자신이 감정에 대해서 매우 서툴다는 것을 알았지만, 지금 하나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무릎을 꿇고 앉아 하나의 다리까지 더듬어본 레나의 손이 이번에는 하나의 얼굴쪽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턱으로 가던 손은 하나의 손에 의해 저지되었다.
"다친데는 없어 언니. 괜찮다니까."
하나의 떨리는 목소리가 이번에는 한 톤이 더 높아졌다. 불안함이 가득 찬 그 목소리에 레나는 한 손으로 하나의 손을 잡아 내렸다.
"무슨 소리야. 가만히 있어."
하나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턱에서 광대로, 광대에서 왼쪽 눈가로 가던 손이 도중에 멈췄다. 붕대, 끈쩍하고 축축한 붕대였다. 축축하게 손에 묻은 액체를 코에 가져다 대었다.
비릿하고 역한 냄새.
"자, 자기 눈..."
가늘게 떨리던 레나의 어깨가 점점 격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언니 나는 괜찮아. 나는 괜찮아. 하나가 레나를 품에 안고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그녀의 가이딩도 쓸모가 없다는 듯 그녀는 그녀의 소매에서 두 정의 권총을 집어들었다.
"멀쩡하게 돌려놓겠다며!"
그렇게 약속했었잖아! 레나는 하나의 어깨 너머로 리퍼를 쏘아보았다.
"아, 나와 다소 의견의 차이를 보여서 말이지. 너도 알다시피 우리 센티넬들은 가이딩 없인 좀... 충동적이잖나. 그녀는 내가 원하는 세계를 보고싶지 않다고 하기에, 그렇게 만들어주기로 했어. 한 쪽 눈을 없앨을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지. 아... 멀쩡하게 주기로 했는데!"
껄껄, 리퍼의 낮은 웃음소리가 모래바닥을 흘러 레나의 발치에까지 다가갔다. 시간여행을 통해서 보았던 그녀의 짙은 갈색의 눈. 그 따뜻함이 느껴지는 눈. 그 한쪽의 눈이 없어졌다는 것이 레나의 사고를 차근차근 마비시켰다.
리퍼의 웃음소리가 흐르는 방향을 향해 한 쌍의 권총이 올라갔다. 앞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권총 끝은 흔들림 없이 리퍼의 가면을 가리키고 있었다.
"진정하고 총 내려, 레나 옥스턴."
그녀의 가슴에 소총의 총구가 닿았다. 단단한 그 느낌에 레나는 현실을 인식하지 못한 듯 작게 입을 벌렸다.
"모리슨? 잭 모리슨? 대체 무슨 짓이야? 저 놈은 하나를 다치게 했어. 내가 죽여 마땅하다고 근데, 근데...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짓은..."
배반이야. 레나의 입에서 미처 나오지 못한 말. 그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는 모리슨이 배반을?
"그래. 그런거지. 레나."
허공을 향한 레나의 총을 하나씩 빼앗아 탈론의 다른 요원에게 건넨 모리슨은 천천히 뒷걸음질을 쳐 리퍼의 곁으로 갔다.
"내가 말했었지. 나는 가이드였어. 인핸서가 된 내가 가장 먼저 한 짓은... 내 파트너를 죽지 못하는 망령으로 만든 것이었어... 치료할 수 있을지도 장담은 못하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건 기관에서 그의 고통을 하나도 신경쓰지 않았다는 것이었지. 내 파트너가 분노와 공포 그리고 절망으로 떨고 있을 때, 그가 통제되지 않는 그의 새로운 불사 능력으로 고통스러워 하고 있을 때 나는 그의 곁에 있을 수 없었어. 내가 간 곳은 다른 센티넬의 곁이었고 연구실이었어. 그래, 나와 그는 그 순간에 느꼈어. 우리는, 등급이 아무리 높더라도 절대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하는거야.
그리고 비능력자들은 우리에게 일말의 동정심을 느끼지 못했지. 그도 당연하지. 나도, 너도, 우리 모두는 인간이 아니니까."
그의 말을 리퍼가 받아 이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생각했어. 아무리 우리가 온건하게 대화로 해결하려고 해도 바뀌는 것은 없어. 그렇기에 우리는 투쟁해야 한다는 것이야. 우리를 지배하던 그들에게 우리가 겪은 고통을 그대로 전해줘야 하는거지."
"그건...."
함정이다. 나를 잡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를 잡기 위해 그들은 이런 수를 쓴 것이다. 너희들이 하려는 것은 복수야. 레나는 이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말을 막은 것은 리퍼였다.
"가이드는 센티넬과의 교량 역할을 하지. 가이드와 센티넬의 관계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서로의 몸에는 서로에 대한 정보가 쌓여. 조종사...조종을 하기 위해서는 조종을 하려는 대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지. 나는 너의 능력에 대해 너보다 더 잘 이해를 할 수 있어."
갑자기 나온 센티넬과 가이드 간의 관계에 대한 설명에 레나의 머리는 하얘졌다.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리퍼는 낮게 웃으며 속삭였다.
"복수여도 상관은 없어. 근데 레나 옥스턴. 단지 너희 둘을 납치하기 위해 이런 번거로운 수를 썼겠어? 틀렸어. 내가 원하는 것은 더 근본적인 변화야. 애초부터, 과거에. 센티넬과 가이드가 목줄을 차기 전, 그 때로 가서 모든 것을 바꿀거야. 그래, 너희 둘의 능력으로 말이지. 그러니 레나 옥스턴. 나쁜 의도는 없어. 그저 나는 세상의 변화를 위해 너희를 희생시키는 거야."
나의 능력(Time Controller)과 하나의 능력(Enhancer)? 시간이동을 증폭시키겠다고? 레나의 머릿속에서 그의 계획에 대한 퍼즐이 천천히 맞춰지는 그 짧은 시간에 레나의 몸은 옆으로 밀쳐졌다. 방향감이 없어지는 그 순간, 커다란 총성이 막사 안을 휘감았다. 그래, 모리슨이 나를 도우려고? 멍청한 생각은 코를 통해 들어오는 후각정보를 통해 날아갔다.
달큰한 하나의 숨. 그녀의 맥박이 뛰는 박자와 함께 피냄새가 더더욱 짙어진다. 하,하나야...
바닥을 더듬는 레나의 손에 하나의 젖은 손이 만져졌다. 손을 꼭 쥐자 피 특유의 끈적거림이 느껴졌다.
왼쪽 복부였다. 거기에서 울컥거리며 피가 터져나왔다.
"하,하나야."
"응, 언니. 나, 나는 괜찮으니까. 진정해."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가 새빨갛게 다시 물들었다. 내가 10년을 기다려 온 그녀를, 한 순간에 빼앗겼다. 찾지 못한 그 사이에 그녀가 보던 세상의 반이 날아갔다. 그리고 지금, 그녀가 내 곁을 떠나고 있다.
지키지 못했다. 지키겠다고, 돌봐주겠다고 호언장담한것과 다르게 돌봄 받은 것도, 지켜진 것도 내쪽이다.
그래, 지키고 싶다. 그녀가 위험에 처한 그 순간으로 돌아가 다시 지키고 싶다.
그래. 다시 돌아가고 싶다.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릴 수만 있다면. 그녀가 죽음의 위기에 처한 그때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레나의 호박빛 홍채가 검은 갈색으로, 검은 갈색이 먹과 같은 새까만 색으로 물드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녀의 눈이 까맣게 물든 그 순간, 시간이 일순간 멈춘 듯 공기의 흐름마저도 멈춰버렸다.
그리고 새까만 어둠이 레나를 중심으로 서서히 퍼져나갔다. 언니? 하나가 레나의 얼굴을 만지며 하는 소리마저도 듣지 못한 듯 레나의 얼굴은 차가운 석고 조각상과도 같았다.
그렇게, 어둠은 리퍼를 집어삼키고 또 모리슨을 집어삼켰다.
- 부디, 이 속박에 굴레에서 빠져나갈 그 시간으로.
- 부디, 그가 고통을 당하지 않을 그 시간으로.
- 부디. 제발. 내가 그녀(언니)를 지킬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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