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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미션

백오판다/작은프마님 커미션 - Finding 105 (3)

등을 덮은 차분한 긴 생머리를 한 아이가 무릎을 감싸안고 앉아있었다. 속으로 노래라도 부르고 있는걸까, 일정한 박자에 따라 좌우로 흔들리는 몸이 꽤 유쾌해 보였다.

"백오야? 이제 다 나은거야?"

프마는 다가가 백오의 이마를 짚었다. 열은 없었다. 보들보들한 이마를 쓰다듬자 빙긋, 세 살바기 백오가 미소를 짓는다. 웃음이 너무도 투명해 프마는 자신도 모르게 그 웃음을 따라했다.

"프마언니, 뭘 보고 있는거야?"

등 뒤의 익숙한 목소리에 프마는 고개를 돌렸다. 백오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대체 뭘 보고 그렇게 웃는거야?"

"백오...?"
어른인 백오가 프마의 어깨에 손을 얹고 방금까지 그녀가 본 것을 본다. 자기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사람이 나타나면 놀랄 법도 한데, 아이는 놀란 기색 없이 웃음을 유지하고 있다. 마치, 유리인형처럼. 살아있는 아이가 맞지? 의심스러운 마음에 아이의 머리칼에 손을 뻗는다. 작은 파열음과 함께 아기백오의 얼굴에 금이 간다. 쩌적, 쩍. 하고 갈라지는 틈을 다시 메우려 프마는 아기백오의 양 뺨에 손바닥을 그러쥐었다. 하지만 그 힘에 오히려 아이의 얼굴은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부서진다.

"그게 뭐야?"
처참하게 부서진 인형의 모습에도 백오는 찌푸리거나 하지 않고 고개만 기울일 뿐이었다.

"백오야, 이건... 아기백오는..."

"이게 나야? 이건 그냥 부스러기인걸?"

"부스러기? 그럼 너는 어디있는데?"

글쎄? 백오가 웃는다. 프마의 어깨에 놓여진 익숙한 무게가 사라진다.

"백오야!"

사라져가는 백오를 붙잡고자 프마는 벌떡 일어나 백오를 껴안는다. 하지만 안은 것은 허공뿐. 어디에도 지지하지 못하고 프마는 넘어졌다.

"그건 이제 언니가 찾아야지."

허공에서 들려오는 말을 끝으로 바람이 분다. 소리만이 남은 백오도, 가루로 변해버린 백오도, 모두 프마의 품을 벗어나 사라진다. 안돼, 이거라도 없으면... 프마는 남은 먼지를 그러안으려 뛰어들었다. 얼굴과 몸을 부옇게 더럽힐뿐인 먼지도 프마의 몸짓에 풀럭이며 날아가버린다.
백오야! 어디있어! 대답해! 소리치지만 대답은 없다.


***


"프마야, 프마?"

큰 손이 등을 토닥여 프마는 눈을 떴다. 어느새 잠들었던 자신을 체셔가 옮겨준걸까. 침대 귀퉁이에 앉은 언약자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꿈을 그렇게 험하게 꿔."

체셔쿤은 물잔에 물을 따라 프마에게 건넸다. 그 물잔을 본척도 않고 프마는 "백오는?" 하고 물었다. 체셔의 양 팔이 비어있었다. 꿈이 현실로 이어진듯해 미칠듯 불안했다.

"일단 물부터 마셔. 너까지 아프면 나는 감당 못해."

"백오는!"

어휴, 안되겠네. 체셔는 검지손가락을 입술에 댄 채 반대 손으로 자신의 니트 가디건의 단추를 풀었다. 그러고보니 가디건이 불룩했다.

"네가 자는 사이에 의식을 회복했어. 아직 졸린지 칭얼대다가 기어코 여기로 들어가 자더라고."

체셔가 살짝 연 가디건의 안쪽에서 작은 아기가 자고 있었다. 만져도 되는걸까. 떨리는 손가락이 아기의 볼을 찔렀다. 보들보들한 볼. 하지만 꿈처럼 금이 가진 않았다. 다만....

"히잉...힝..."

"그렇게 찌르면 어떡해!"

체셔는 허둥지둥 아기의 등을 토닥였다. 일 분 후, 아기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고 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기때 백오는 엄청 예민했나봐. 살짝만 움직여도 짜증을 내. 나 이러고 화장실도 갔다왔잖아."
이래서 백오가 키가 작았을거야. 투덜대던 체셔는 프마의 표정에 입을 다물었다.

"아르랑 꾸꾸씨는?"

"글쎄, 아직도 방에 있는거 같던데."

"갔다올게."

여전히 굳은 얼굴인 채 프마는 침대의 가장자리로 무릎걸음을 걸었다.

"프마."

체셔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고개를 돌려 체셔를 보자 체셔는 한 팔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괜찮아. 요녀석이 나에게 하는걸 보니 얘는 내가 아는 백오가 맞아. 설마 우리가 아는 백오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백오를 찾을 수 있어. 걱정하지 마."

쓱쓱 머리를 쓰다듬는 그녀의 손길에 프마는 톡톡 그녀의 팔을 두드리는 것으로 대답했다. 가볼게. 애써 체셔에게 웃음을 지어주곤 프마는 방문을 나섰다. 언약자에게까지 자신의 불안을 전가시키고 싶진 않았기에 방문을 닫고 나서야 프마는 자신의 원래 얼굴로 돌아왔다.


**


"들어갈게."

애초부터 방의 주인이 자신을 환영할 것도 아니었기에 프마는 한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는 방에 노크도 없이 들어갔다. 마녀의 방이기에 분명 들어간다면 생각치도 못한 풍경이 펼쳐지리라 예상은 했지만 눈 앞에 펼쳐진 것은 그녀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거라 프마는 순간 자신이 이 곳에 왜 와 있는지조차 잊고 있었다.

"그렇게 굳어져 있어봤자 문 앞을 지키는 가고일만도 못하니 그러고 있을거면 나가주겠어?"

그런 그녀를 일깨운건 주인의 냉담한 반응 덕분이었다.

프마의 발 밑은 평범한 나무바닥도, 고급스러운 대리석도 아니었다. 잠시만 누워있더라도 풀물이 담뿍 들 듯한 풀밭이 펼쳐져 있었고, 허리가 굽은 나무들로 둘러싼 곳은 방이라기보단 요정이 살듯한 비밀스러운 숲의 공간 같았다. 저 멀리에는 덩굴들이 지지대도 없이 자라 올라 천연의 가림막을 만들고 있었는데, 그 뒤에는 푹신해보이는 침대가 보였다. 방 한가운데, 갈색의 마른 풀 위에 커다란 그루터기가 있었고, 그 주변을 그보다 작은 둘레의 그루터기들이 둥글게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그루터기(심지어 사람이 앉기 딱 좋게 등받이 모양으로 깎여진)에 태연하게 앉은 아르가유라는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프마를 바라봤다.
아마 이것은 아르가유라가 자랑하는 "환술"일 터. 에오르제아 사람들이 흔히 아는 '에테르를 다루는 환술마법'이 아니라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환상을 만드는 환술(幻術)이 아르가유라의 비밀스러운 재주였다.

"겉만 번드르하게 하는 애가 여태 뭘 해놨나 궁금해서 왔어."

프마는 애써 불안을 감추고 아르가유라가 있는 그루터기로 다가갔다. 그루터기 위에는 술법이나 가설과 검증이 적힌 수많은 양피지 조각들과 책들이 널려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나침반처럼 생긴 무언가가 있었다.

"에테르 계측기야. 물론 내가 개조했지만."

아르가유라는 자리를 권하는 대신 찻주전자에서 차 한잔을 따라 비어있는 자리에 놓았다. 독특한 향이 나는 차는 은은한 꽃 향기가 올라왔다.

"기존의 에테르 계측기가 그저 에테르의 양이나 농도를 측정하는 것이었다면 이건 '특정한' 에테르만을 측정하도록 해 보았어요. 물론 검증도 끝나서 마침 부르러 가려던 참이었어요."

프마의 건너편에 앉은 느르흐가 차를 홀짝이며 말했다.

"검증은 어떻게 한거야?"

대답 대신 느르흐는 자신의 손과 치유서를 가리켜보았다. 손 끝은 바늘로 찔린 상처가 가득했다.

"물론 혈액으로만 한게 아니에요. 제 요정은 제 에테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요정을 소환해 실험에 사용하기도 했어요. 제 피를 계측기에 먼저 읽힌 후에 계측기, 아니지 이제 탐지기로 불러야 할까요? 여튼 탐지기로 제 에테르를 쫒도록 했더니 요정과 제 치유서 둘 모두를 찾았어요. 물론 거꾸로 한 실험에서도 결과는 같았고요."

느르흐는 칭찬이나 감탄을 기대하며 설명을 끝냈다. 하지만 프마의 표정은 심각했다.

"꾸꾸씨의 에테르로 만든 요정...도 검증되었다는 거죠?"

"네."

"혹시, 저 방에 있는 백오가 그런거라면요?"

"네?"

프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느르흐가 되물었다.

"그러니까. 저 백오가 꾸꾸씨의 요정처럼 백오의 에테르로 만들어진 허상, 아니 인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프마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목소리를 들으려 고개까지 아래로 기울인 느르흐는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이해하느라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대체 그녀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걸까? 왜 저렇게 불안해하는거지?

"그거 참 재밌네."

말을 꺼낸 것으로 프마는 자신의 불안을 테이블 위로 내놓은 것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반응이 "재미있다."라고? 프마는 아르를 힘껏 노려봤다.

"그렇게 가자미눈이 되어도 하는 수는 없어. 봐, 나와 느르흐가 만든 기계는 여기까지야. 특정 에테르를 잡아내는거. 근데 인형이라..."

찻잔을 입가로 가져간 아르는 잠시 생각에 잠긴듯 아무 말이 없었다. 조바심에 두어번 한숨을 쉬었을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아르가 입을 열었다.

"만들 이유가 없잖아? 백오의 인형을 만든 사람, 혹은 무언가가 있다면. 굳이 저렇게까지 정교하게 만들어서 우리에게 얻으려는게 뭘까?"

"흥미로운 가설이긴 해요. 근데 프마씨의 이론대로라면 야만신이 자신이 죽인 사람의 에테르를 이용해 그 사람도 아닌, 그 사람의 유아기의 모습을 만든다는거잖아요. 왜일까요? 야만신이 사람 간의 유대를 파악한걸까요? 그렇담 우리가 만약 초행인 파티였다면 허깨비로 만든 저 백오는 쓸모없는거 아녜요?"

"......"

입을 다문 프마를 보며 아르는 안타깝다는듯 혀를 찼다.

"아직도 둔하구나. 그래. 너에겐 더 쉬운 단계의 질문을 던져야겠네. 저 방에 누워있는 백오가 요정과 같다면, 손짓이나 술식 한번에 사라지는 것이라면. 뭐가 달라지는거지?"

"......"

아르가유라는 턱 끝으로 테이블 위의 계측기를 가리켰다.

"가져가. 검증하건 말건. 알아내서 뭘 하는지는 네 마음이야."

아르가유라는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가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꽃덤불이 자라나는 책장에서 책을 뽑더니 구석에 놓여진 들풀 방석에 앉아 독서를 시작했다. 반딧불이 무리가 모여 그녀의 머리 위에서 독서등이 되어주었다.
풀벌레 울음소리와 책장 넘기는 소리.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한 프마는 뒤로 물러나 방 문을 열었다.

*

"저, 프마님."

방 문을 닫고 지극히 평범한 집으로 돌아오니 뒤에서 느르흐가 불렀다.

"혹시 제가 뭐 잘못 전한거나 연구에 빠트리고 못 담은 변수가 있나요?"

프마는 뒤를 돌아봤다. 까마득하게 높은 곳에서 그녀를 내려다보는 느르흐의 눈은 자신의 가설검증에 허점을 없는지 찾아내려는 학자의 눈이었다.

전투 후 한숨도 쉬지 않고 연구를 해준 그다. '아니에요, 도움이 되었어요.' 하지만 이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두어번 입을 열었지만 나온건 한숨 뿐이었다.
그 모습이 대답이 되었다는듯 느르흐는 쓴웃음을 지었다.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저도 프마님만큼 백오가 보고싶으니까요. 그러니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부르세요. 그럼 저도 쉬러 가볼게요."

느르흐는 복도 저 편으로 걸어갔다. 프마는 살짝 처진 느르흐의 뒷모습에 미안함을 느꼈지만 뭘 해야할지 몰라 고개를 떨어뜨렸다.


**


"아르씨와 느르흐씨가 뭐래?"

체셔는 방으로 들어오는 프마에게 물었다. 프마는 대답 대신 양 손을 들어보였다. 한 손엔 계측기가 있었고 다른 한 손엔 백오의 마지막 흔적인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어떻게 알아볼거야?"

"백오의 에테르가 가장 많이 남은건 이 지팡이야. 이 지팡이의 에테르를 이 계측기가 감지하고 이것과 동일한 에테르가 있는 곳을 가리키겠지."

"그럼 여기 있는 이 아기가 백오인지 알려주거나 혹은..."

"진짜 백오가 어딨는지 알려주겠지."

프마는 체셔의 말을 대신 끝맺곤 긴장된 얼굴로 지팡이를 내려놓고 계측기를 작동시켰다. 계측기에서 미세한 빛이 나오더니 허공에 빛으로 된 바늘을 띄웠다. 바늘 한쪽 끝은 백오의 지팡이를 가리켰다. 10초 쯤 지났을까. 감지해야 할 에테르를 알았다는 듯 뱅글, 하고 계측기의 바늘이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두세바퀴를 천천히 돌던 바늘은...

"휴우... 다행이다."

체셔를, 정확히는 체셔의 불룩해진 옷을 가리키고 있는 바늘을 보며 체셔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반응을 기대하며 프마를 바라봤다. 하지만 프마의 얼굴은 여전히 굳은 채였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 혹시 이게 백오가 아닌거야?"

"백오...이긴 하겠지."

"그렇다면 아니기도 하다는거야?"

"모르겠어."

모르겠어. 이상하고 무서운 꿈에서 깬 프마가 아르가유라에게, 느르흐에게, 그리고 지금 체셔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이 한마디 뿐이었다.

모르겠어. 꿈은 비현실적이고 비논리적인데 내가 왜 이런 거에 흔들리는지, 정말 모르겠어. 이 감정을 논리적으로 잘 설명하지 못하겠어서 더 불안해.  논리와 이치를 추구하는 마도사인 느르흐나 아르는 증명한 이 사실에 똑같은 것을 추구하는 내가 왜이리 불안해 하는지 모르겠어.

혼란스러운 불안은 불꽃이 되어 프마의 가슴을 태웠다. 두어번 한숨으로 불을 잠재우려다 실패한 프마는 결국 굵은 눈물을 쏟아냈다.

"모르면 다시 알아보면 되지. 괜찮아."

체셔는 아기를 안고 프마에게 다가왔다. 프마와 눈높이를 맞추려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는 한 손으로 프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흐려진 시야로 체셔의 두 눈이 보였다. 궁금함이 아니라 순수한 걱정의 눈빛이었다. 자신에 대한 걱정, 그녀가 갖고 있는 불안 그대로를 믿어주는 그 눈빛에 프마는 무너졌다.

"이게 백오가 아니면 어떡해... 백오를 흉내낸 인형이면... 그 야만신이 백오를 잡아먹고 내놓은 허깨비면..."

정확한 명칭도 없이 인형이나 허깨비, 프마는 되도않는 이야기를 늘어놓음으로써 자신의 불안을 풀어놓았다. 그래. 말도 안되는 불안을 들어주며 체셔는 잠자코 프마의 등을 쓸어주었다.

*

한참 후, 눈물을 그친 프마는 민망함에 볼에 남은 눈물을 쓱 닦았다. 그때까지 바닥에 앉아 프마의 등을 쓸어준 체셔는 부러 못본 척 헛기침을 두어번 했다.

"그럼 프마는 이걸 어떻게 알아봤으면 좋겠어?"

"모르겠어... 좀 더 이 이야기를 믿어줄 전문가를 만나고 싶어. 이런 비슷한걸 직접 느껴봤고... 뭔가 이 일을 더 잘 아는..."

프마의 뇌리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사람을 만나도 되는걸까. 만약 느르흐의 말 대로라면 이 아기는 위험한건데...

"저기, 체셔."

"응?"

"알 만한 사람이 있긴 한데..."


***


서부 다날란, 회색 초코보가 달리고 있다. 희미한 새벽빛에 발 밑을 조심할 필요가 없는지 초코보는 거침없이 사막을 가로지른다. 피곤하지도 않은지 그녀는 눈 앞의 작은 바위를 겅중 뛰어넘는다.

"쉬이, 쿠. 조금만 조심히 달려줘."

넉넉한 후드 망토를 깊이 눌러쓴 체셔는 쿠의 목덜미를 가볍게 두드린다. 쿠는 알았다는듯 목에서 가벼운 울음소리를 내며 조금 더 고른 길로 발을 옮겼다.

"금방 도착해. 연락은 했어?"

"응. 새벽별 만에서 보기로 했어."

체셔 대신 고삐를 쥔 프마는 입술을 깨물며 앞을 주시했다. 체셔는 덩치가 큰 쿠를 프마가 조종하는 것은 힘들 것이기에 프마에게 아기를 안고 있길 요청했지만 프마는 끝끝내 자신이 고삐를 잡겠다 주장했다. 발자국 계곡의 거친 지형에 도착하자 쿠의 발이 잠시 느려졌다. 프마는 그것을 참지 못하고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 고삐를 신경질적으로 내리쳤다. 그 요청에 쿠가 다시 한번 속력을 높였다.

"프마! 백오가 너무 흔들리겠어!"

"미안..."

프마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대답한다. 체셔는 아기를 고쳐안으며 말없이 프마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들의 눈 앞에 저녁별 만이 모습을 드러냈다.
탁 트인 항구, 그곳에 한 여인이 벤치에 앉아있었다. 프마는 초코보에서 뛰어내려 그 여인의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프마의 한참 뒤에, 한손으로는 쿠의 고삐를 쥐고 다른 한손으론 아기를 안아든 체셔가 섰다.

"이런 시간에 연락해서 미안해요, 야슈톨라."

"프마가 연락한거라면 무슨 일이 있는거겠죠. 안 그래도 시간신 토벌 후에 연락이 없어 걱정했어요."

야슈톨라는 앉으라는듯 자신의 옆자리를 두드렸다. 프마는 고개를 좌우로 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곤 입을 열었다.

"야슈톨라... 당신이라면 알겠죠, 백오를."

"그럼요. 백오판다씨는 프마 당신과 함께 우리 새벽에 많은 도움을 준걸요."

"그럼 대답해주세요. 저기, 저 사람의 품에 안긴 아기가... 백오판다인가요?"

야슈톨라는 대답을 하지 않고 한 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프마, 제가 알고있는 백오판다씨는 저렇게 어리지 않은데요?"

"야슈톨라씨라면, 당신의 눈이라면 알 수 있잖아요. 저 아이의 에테르는 백오판다와 같나요?"

야슈톨라는 대답 대신 프마의 얼굴을 바라봤다. 은색으로 바래버린 눈은 프마를 바라보며 무언갈 찾는듯 했다.

"뭐가 그렇게 불안하고 초조한거죠?"

"대답해줘요..."

"프마..."

"저는 백오를 무슨 일이 있어도 원래대로 돌려주기로 약속했어요. 근데 저게 백오가 아니라면 어떡하죠?"

아까처럼 우느라 무너지면 안돼. 감정을 억누르느라 프마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그녀의 어깨를 바라보던 야슈톨라는 입을 열었다.

"저게 백오가 아닌 야만신의 잔재라고 제가 말하면, 당신은 저 아이를 죽일건가요?"

프마는 고개를 떨구곤 무릎을 바라봤다. 몇번을 숨을 고르고서야 대답을 할 수 있었다.

"...백오를 찾을 수 있다면요."

"거짓말, 그렇다면 저렇게 멀리에 저 아이를 두고 저에게 확인해달라 말한건가요? 그리고 저 말고도 위리앙제가 더 지식이 해박할텐데 왜 굳이 눈이 잘 안 보이는 절 부른거죠? 혹시 제가 저 아일 없앨까봐 그런건 아니구요?"

떨리던 어깨가 일순간 멈췄다. 천천히 프마는 고개를 들어 야슈톨라를 바라봤다.

"학자라면 의심이 생기는건 당연해요. 우리들은 의심이 들 때엔 검증을 하려 노력하죠. 그리고 우린, 위급상황에선 논리에 따라 최대한 안전한 길을 선택하려고 하죠."

야슈톨라가 프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런데요 프마. 의심이 들고, 또 그 의심에 따라 위급상황이 되어 빨리 결정을 내려야만 할 때에 우리의 시야는 종종 좁아져요. 그럴땐 말이죠, 가슴에 따라 행동해봐요. 어색하고 힘들겠지만요."

서늘한 밤바람이 프마의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자, 프마. 아기가 일어날거 같은데요."

프마는 체셔가 있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야슈톨라의 말대로 아기가 일어났는지 체셔의 품에서 아기가 꼼지락거렸다.

야슈톨라가 가볍게 프마의 등을 두드렸다. 그녀의 응원에 기운을 얻었는지 프마는 벤치에서 내려와 아기에게 걸어갔다. 아기는 양 주먹으로 눈을 비비며 온 몸으로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프마는 양 손을 여러번 비비고는 자신의 이마에 대었다가 아기의 이마에 대었다. 열이 내려가 있었다.
프마의 손길에 아기의 눈이 반짝 떴다. 터키색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봤다. 자기가 구해주겠다 맹세한 백오의 눈이었다.

"백오 일어났어? 배고프진 않아?"

잠에서 덜 깼는지 백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물 좀 마실까?"

프마가 쿠의 안장에서 수통을 꺼내 백오의 입에 대 주었다. 백오는 꼴깍이는 소리를 내며 물을 마셨다. 물을 다 마신 백오가 프마가 있는 방향으로 양 손을 뻗었다.

"안아줘."

프마는 잠시 멈추더니 이내 백오를 안아들었다. 백오가 프마의 볼에 볼을 부비곤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콩콩콩. 가슴을 통해 백오의 맥박이 전해졌다. 어깨에 백오가 옷깃을 잡은 앙증맞은 주먹이 느껴졌다.

"30분이면 집에 가거든? 체셔언니가 맛있는 팬케이크를 해 줄거야. 같이 만들어서 먹을까?"

"응."

"그래. 언니가 안아줄테니까 우리 저 초코보 타고 집에 어서 가자. 체셔, 날 좀 안아서 초코보에 태워줄래?"

체셔가 빙긋 웃고는 프마를 안장 위로 올려 앉혔다. 그리곤 자신은 프마의 뒤에 앉아 고삐를 잡았다.

"아, 야슈톨라씨 부탁이 있어요."

출발하려는 중, 프마가 야슈톨라를 불렀다.

"시간신에 대한 전승이나 전설에 대한 자료, 소환자에 대한 자료, 소환 술식 등을 대신 구해줄 수 있나요? 저는 한동안 애를 봐야 해서 바쁠거 같아요. 애를 한 번도 본 적이 없거든요."

"그럼요. 자세히 조사해서 보내줄게요. 이삼일은 걸릴거에요."

"알겠어요. 그럼 먼저 가볼게요."

체셔쿤이 신호를 하자 쿠가 천천히 남쪽으로 발을 옮겼다. 그때 다시 아, 하고 프마가 입을 열었다.

"야슈톨라... 미안해요. 제가 실례가 많았죠?"

후훗, 야슈톨라가 가볍게 웃었다.

"오늘 일은 후배 학자의 불안함을 달래준 상담으로 쳐요. 나중에 근사한 디저트라도 부탁해요."

프마는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쿠가 성큼성큼 부대의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프마는 품 안의 백오를 꽉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