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커미션

백오판다/작은프마님 커미션 - Finding 105 (4)

"백오야, 뭐 먹고싶어?"

체셔쿤은 작은프마의 품에 안긴 백오판다를 안아들며 물었다. 바깥의 공기는 아이에게 생기를 불어넣은듯 꽤 길게 초코보 위에 있었음에도 아이는 집에서 출발하기 전보다 기운이 있었던듯 했다.

"사과."

백오는 체셔가 안은 곳보다 더 높은 곳에 올라가고 싶은 기색을 보였다. 사과? 체셔는 백오를 어깨에 앉힌채 고개를 기울였다. 이제 갓 의식을 회복한 아이에게 고형식을 먹여도 될까. 치료사로서의 백오라면 단번에 고개를 저었을 터였다. 하지만 여기에 치료사인 백오는 없다. 단지 사과를 먹고 싶어하는 아기 백오만 있었다.

"그래. 사과를 먹자. 사과만 먹으면 좀 아쉬우니 사과도 먹고 폭신한것도 먹자."

"폭신한거?"

"응. 폭신폭신한거. 구름같아."

"나는 구름을 먹어본 적 없어."

다분히 현실적인 백오의 말이구나. 네가 백오가 아니라면 누가 백오니. 체셔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럼 오늘 구름 맛을 보겠네."

"구름을 먹어본 적이 있어?"

"그럼! 백오는 아직 안먹어봤단 말야?"
그거 큰일인걸? 체셔는 짐짓 놀란듯 눈을 크게 하곤 문을 열어주는 언약자와 눈을 마주쳤다. 자신의 뜻을 알아챈 언약자도 입가에 살짝 쓴웃음을 올리더니 과장되게 말했다.

"큰일이네 그거. 요즘 구름을 안 먹어본 사람은 없단말야."

"거짓말! 어... 엄마아빠가 구름을 먹어봤단 얘기는 으응, 안 했는걸?"

당황했는지 백오는 말 중간중간에 '어,' 나 '응,'을 섞어 말하기 시작했다. 흥분했는지 아까보다 손 끝이 따끈해진 백오를 보며 입가가 느슨해지는건 어쩔수 없었다.

계단을 내려가 있는 부엌의 조리대 한 켠에 백오에 프마까지 올려놓은 체셔는 이 이야기가 오히려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

"아, 엄마아빠가 구름을 얻으러 갔나보다. 그래서 잠시 우리와 함께 있나봐."

"정말?"

백오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이 말을 믿을 확실한 쐐기가 필요했다.

"그럼! 엄마아빠잖아!"

"맞아. 엄마아빠가 구름을 가지러 갔나봐."

어른의 말에 환상 속 일이 현실이 되는걸 보면 영락없는 세 살 바기 아이였다. "구름을 잡으러 간다."라는 거짓말은 조금이나마 아이를 진정 시켜줄 수 있을거 같았다.

"구름을 가지러 가려면 쩌어-기 북쪽에서 더 추운 곳으로 가야 하거든. 거기를 가려면 백오가 좀 오래 기다려야 해. 그럼 먼저 구름을 먹어봐서 엄마아빠를 놀래켜 줄까?"

"오래 걸려?"

"응."

"얼마나, 열 밤 정도?"

백오가 열 손가락을 좌악 피자 프마가 그 옆에 대고 자신의 열 손가락도 쫙 폈다.

"열 밤하고 열 밤 더."

그리고 체셔는 백오의 한쪽 손을 오므려 주먹을 쥐어줬다.

"초코보를 잘 타면 그것보다 다섯 밤은 일찍 올수도 있어."

"그럼 열 밤하고 다섯 밤이야! 우리 아빠는 초코보를 정말정말 잘 타거든."

"그래? 그럼 열다섯 밤이면 오겠네. 그동안에 백오는 구름도 먹어보고 신기하고 재밌는걸 잔뜩 해보는거야. 그러면 엄마아빠도 엄청엄청 놀랄걸? 이만큼이나 백오가 컸구나, 할거야."

"응! 구름 먹을래!"

"그래. 그럼 사과 맛 나는 구름을 먹어보자."

체셔는 "구름"을 만들기 위한 재료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


"이게 구름에 들어가는 재료야?"

백오의 질문에 체셔의 몸이 굳었다. 실망의 질문인거야 아니면 거짓말을 알아챈 노기 띤 질문인거야? 체셔는 눈동자만 프마에게로 굴렸다. 입가의 미소가 조금씩 어색해지자 프마가 괜찮다는듯 검지손가락을 두어번 뱅글뱅글 돌렸다. '나에게 하듯 더 뻔뻔하게 굴어!' 그 신호를 알아챈 체셔는 순식간에 연극가면을 뒤집어쓰고 연기를 시작했다.

"그럼. 백오는 이 재료들을 다 본적이 있나봐?"

"응. 이건 아프칼루 알이고 이건 밀가루. 이건 사과야!"

사과야! 라는 대답과 함께 백오는 자기 얼굴만한 사과를 답싹 집어들어 크게 한 입 와앙! 물었다. 어어어! 체셔와 프마가 달려들어 빼앗으니 반짝이는 사과 표면에 작은 잇자국 네 개가 앙증맞게 나 있었다.

"벌써 먹으면 안돼. 구름 먹어야지."

"구름도 먹고 사과도 먹을거야!"

투정에 체셔의 눈썹이 한번 찌푸려졌다. 그럼 이렇게 하자. 체셔는 부엌칼로 백오가 베어문 쪽으로 사과를 반 나눠 프마에게 건네줬다.

"아팠다 나은거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배탈나. 한 조각만."

한 조각? 프마는 사과를 얇게 썰어 입을 삐쭉이는 백오의 입에 넣어줬다.

"이제 체셔가 바쁘게 구름을 만들어야 하는데 우리 모두가 도와야해. 안 그러면 체셔가 너무 힘들어."

"오호라. 모두 돕겠다 이거지?"

체셔의 눈가에 짖궂음이 슬쩍 비쳤다.

"그래, 이 멋진 재료들을 소개하며 할 일을 줄게. 먼저 백오! 이 알은 그냥 아프칼루의 알이 아니야. 하늘에서 나는 안즈의 알이야. 안즈는 날개가 집채만하게 크거든. 그래서 안즈가 한번 날개짓을 할 때마다 구름이 펄럭이며 이동해. 안즈는 하루종일 펄럭이며 구름을 모아다가 그 큰 입으로 구름을 한번에 집어삼키지. 이 알은 안즈가 구름 더미안에 꽁꽁 숨겨둔 알이야. 낳은지 이틀만 지나도 알이 구름을 마시는 바람에 크기가 구름만큼 커져서 요리에 쓸 수가 없어. 우리는 이 알에서 구름을 빼 몽글몽글하게 만들거야."

집채만한 새! 백오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천장을 훑어봤다.

"그리고 이 밀가루! 이건 고원에서 자란 밀가루야. 이렇게 높은 곳에서 자란 밀가루만이 가벼운 구름을 날아가지 않게 꼭 붙들어준다고!"

평범한 아프칼루 알과 밀가루를 보는 눈이 경외의 눈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사과! 그건...!"

"이건 뭐야? 뭐야?"

기대하는 백오의 눈에 체셔는 슬쩍 웃음을 물었다.

"그건 그냥 사과야."

이것도 기대한거야? 체셔가 웃으며 묻자 백오도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이건 그냥 사과네! 몰랐어!"

웃음이 한 차례 지나가자 체셔는 알을 들어 백오에게 건넸다.

"그럼 백오는 이 알을 조심스럽게 깨트려야해. 흰자와 노른자를 나눠야 훌륭한 구름이 완성되거든. 만약..."

백오가 한 손 가득 알을 쥔채 체셔의 입을 주시했다.

"만약 노른자와 흰자가 섞이면 노른자가 구름인 흰자를 다 먹어버려서 구름을 만들 수 없어. 그러니 절대 노른자를 터뜨리면 안돼."

세상에! 백오는 심각한 표정으로 알을 노려봤다. 그리고 프마는... 체셔는 이번에 프마를 바라봤다.

"프마는 거품기로 흰 자에 거품을 내는거야. 몽실한 구름이 될 때까지 저어야 해."

아니 그건...!

프마가 입을 열려 하자 체셔가 표정으로 프마의 입을 막았다.

그건 머랭치기잖아! 프마는 입 모양만으로 체셔에게 따졌다. 도와준다며, 체셔는 눈썹을 올리는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젠장. 제 입을 때리고 싶었다.

손을 벌벌 떨던 백오는 눈이 가운데로 몰릴 정도로 알을 노려보다 알을 깼다. 끄트머리가 깨진 알을 깨려 손바닥에 힘을 주는 모습은 보는 사람이 다 조마조마할 정도였다.

빠작, 알껍질의 윗부분이 날아가며 그릇에 내용물을 쏟아냈다. 내용물은 꿀렁거리며 내려가다 이내 멎었다. 백오는 알을 휙휙 위아래로 흔들었다. 잠깐, 프마는 포크를 들어 반대편 끝을 살짝 깨 구멍을 만들었다. 덕분에 알의 나머지 내용물도 수월히 나올수 있었다.

그렇게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그 사이에 노른자가 깨져버린 비운의 알이 있었고 달걀껍질이 그릇에 들어가는 사고도 있었다. 하지만 백오의 양 다리 사이에 소복히 달걀 껍질이 쌓이고 백오의 손이 달걀 흰자의 액으로 범벅이 될때 쯤에는 백오도 능숙히 달걀을 깰 수 있게 되었다.

"자, 이제 그만! 백오 정말 잘했어."

체셔는 물수건으로 백오의 손바닥을 닦아주며 칭찬했다. 달걀 흰자만을 분리한 그릇에 설탕을 넣은 체셔는 거품기와 함께 그 그릇을 언약자의 품에 안겼다.

"이제 프마 차례네! 꽤 양이 많지만 잘 할수 있어! 힘내!"

백오도 응원해야지? 능글맞은 체셔의 부추김에 순진한 아기 백오는 양 주먹을 쥐곤 프마에게 응원을 시작했다.

저 나쁜 자식! 널 믿나 보자. 프마는 이를 빠드득 갈며 체에 친 밀가루와 노른자를 섞는 체셔쿤을 노려봤다.


*


"아... 한계야 한계..."

프마의 머랭 치는 속도가 한계에 다다르자 백오의 눈썹이 아래로 처졌다.
달걀 흰자는 처음의 투명한 빛깔에서 흰 빛으로 변하기 시작했지만 머랭이라 하기엔 아직 너무 묽었다.

"힘들어?"

"응. 손에서 불이 나."

손을 털던 프마의 표정을 살피던 백오의 표정이 하도 심각했는지 체셔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불이 나면 안되니까 바람을 불어 식혀줘. 시원한 바람을 불게 하는게 백오 특기잖아."

앗차. 기분이 좋아지는 바람에 실언을 했다. 체셔는 금새 입을 닫았다. 다행히도 말 뜻을 이해 못한 백오는 프마의 손에 후후 바람을 불었다. 그 천진하면서도 친절한 행동이 기분이 좋았는지 프마도 경계를 풀고 슬쩍 의미 없는 말을 하기로 했다.

"맞아. 백오라면 지팡이 끝에서 휘리릭, 바람이 나오게 했잖아."

"지팡이?"

"응."

"나는 할머니가 아니니까 아직 지팡이는 안 써."

"그게 아니라... 음..."

뭐라고 설명한다... 할 말을 잃고 거품기만 손에 쥔 프마 위로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체셔쿤이 프마의 손에서 그릇과 거품기를 가져가 익숙하게 휘저었다.

"백오는 똑똑하니까 조금만 노력하면 마법을 쓴다는 말이었어. 착하고 친절하니까 힘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마법을 많이많이 쓸 수 있을거야."

백오의 하늘색 눈을 바라보며 체셔쿤은 천천히 말했다.

"그래서 모두를 도와주는 사람이 되고 모두에게 힘이 되는 사람이 될걸? 자... 완성됐다. 이게 구름이야."

체셔가 요령이 좋은건지, 아니면 프마가 거의 완성을 했던 것인지, 몽글몽글한 흰 거품이 그릇 안에 가득했다. 체셔와 프마는 몽글몽글한 거품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백오를 흐뭇하게 바라봤다가 백오의 검지손가락이 슬슬 올라가자 프마는 재빠르게 백오의 손을 잡았고 체셔는 머랭이 든 그릇을 재빠르게 치웠다.

"이건 먹을 만큼만 만들어야 하거든... 몇 명 분을 만들지?"

셋? 넷? 체셔쿤은 고민을 하다가 큰 프라이팬에 적당한 양의 팬 케이크 반죽을 떨어뜨렸다. 반죽은 금새 기분 좋은 냄새를 내며 익어갔다. 동그란 모양으로 부푸며 익는 반죽을 백오는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좋은 냄새가 나네요, 오늘은 뭔가요?"

윗층에서 느르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래로 내려오는 묵직한 발소리를 듣자, 조리대에 앉아 있던 백오가 폴짝 뛰어내려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곤 발자국 소리의 주인을 봤는지 곧장 체셔쿤에게로 뛰어와 다리에 매달렸다.

"어? 백오가 일어났네요! 백오 괜찮아?"

천천히 느르흐가 주방으로 들어섰다. 주방이 꽉 차게 느껴지는 거구는 백오가 겁을 낼 만했다.

"팬케이크에요. 먹고싶으면 식사 준비하는걸 도와줄래요?"

그래요, 느르흐는 프마와 식사준비를 도왔다.

"어디에 갔다 온건가요?"

체셔쿤은 익은 팬케이크를 접시에 올리며 물었다.

"일단 먹으며 이야기하죠."

느르흐는 의자에 앉아 숨을 돌렸다.


***


접시마다 한 장씩. 도톰한 팬케이크가 올라갔다. 크기는 보통 팬케이크보다 훨씬 더 작았지만, 높이만큼은 서너배 더 높았다. 일반적인 팬케이크 반죽으로 저 정도 높이의 팬케이크를 구웠다면 물 없이는 넘기기 힘들 정도로 퍽퍽했을 것이다. 하지만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기대섞인 눈빛으로 체셔쿤이 건네주는 팬케이크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식탁의 한 가운데에 놓여진 버터를 크게 한 조각 썰어 올려놓는다. 체셔쿤은 진한 커피를 넣은 시럽, 느르흐는 메이플 소스와 라즈베리 설탕절임, 그리고 작은프마는 체셔쿤이 만든 초콜릿 소스. 마지막으로 의자에 앉아도 식탁에 손이 닿지 않아 대여섯개의 방석을 겹쳐 앉은 백오판다는 폭신폭신한 생크림을 올렸다.

"진짜 구름이네!"

"구름이요? 뭐가요?"

생크림이 소복하니 올라간 도톰하고 둥근 팬케이크는 정말로 구름처럼 보였다. 하지만 사정을 모르는, 그리고 지나치게 현실적인 느르흐는 그 외침에 딴지를 걸 신호를 울렸다. 그리고 식탁 건너편에 앉은 체셔쿤은 급히 브레이크를 밟기 위해 느르흐의 정강이를 있는 힘껏 걷어찼으며 작은프마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표정으로 느르흐를 째려봤다.

"...어, 구, 구름이네요! 맛있어요!"

팬케이크의 단맛이 너무 진한 탓일까, 아니면 불빛 때문에 잘못 본 것일까. 느르흐의 눈꼬리에 반짝이는 무언가가 맺히는 것 같았다.

"그치? 이건 구름이야. 맛있어. 언니가 잘라줄까?"

시선만은 느르흐에게 고정한 채 작은프마가 포크와 나이프를 백오판다의 접시에 들이댔다.

"아니! 아냐! 백오가! 백오가 할거야!"

확실히 백오판다는 흥분해 있었다. 부모님의 부재로 인한 슬픔도 구름을 먹어본다는 흥분에 잠시 묻힌듯 했다. 어린애에게는 지나치게 큰 포크와 나이프를 바투 쥔 백오판다는 서툰 손길로 팬케이크를 큼지막하게 썰어 자신의 입에 우겨넣었다. 작게 자르는 것은 아직 무리인걸까? 양 손과 입 주변에 하얀 생크림이 잔뜩 묻었다.

"&$어!"

아마 맛있다는 말이겠지, 터질듯 불룩한 입이 우물거리며 말했다. 반짝이는 눈은 구름에 대한 환상과 달콤한 맛으로 인해 잔뜩 흥분한것처럼 보였다.

"에구, 손이며 입이며 다 묻었네."
프마가 백오의 입가에 묻은 생크림을 닦아주려 냅킨을 가져다대자 백오는 방해하지 말라는 듯 얼굴을 모로 흔들었다. 입을 닦아주려 한 시도였는데 긴 머리가 좌우로 흔들리며 머리까지 크림 범벅이 될지도 몰라 프마는 냅킨을 든 손을 뒤로 뺐다. 이미 백오의 손이 닿은 식탁보는 크림으로 얼룩이 생겨버린 상황이었다.

"괜찮아. 다 먹고 청소하면 되니까. 근데 저 머리는 어떻게 해야겠다. 잘못하면 머리카락도 먹겠는데?"

체셔쿤이 괜찮다며 프마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백오의 머리를 뒤로 묶어주려고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은 멈췄다.

"....프마가 도와줘..."

"응? 왜 그래?"

프마는 백오의 머리타래를 쥔 체셔를 바라봤다. 두 손가락으로 백오의 머리타래를 잡은 체셔는 난처한 눈빛으로 프마를 보며 말했다.

"백오가 너무 작아서 어떻게 묶어야 할지 모르겠어."

그렇겠구나. 프마는 체셔의 손에서 백오의 머리를 넘겨받아 가볍게 한 묶음으로 백오의 머리를 묶었다. 시원하지? 하고 프마가 물으니 백오는 대답도 않고 접시 위의 팬케이크와 씨름 중이었다. 그래도 잘 먹어서 다행이다. 둘은 백오를 바라보다 서로 마주보며 씩 웃었다.

"턱이 저릴 정도로 달달하네요."

"네? 과일이라도 더 드릴까요?"

"아뇨. 시럽보다 지금 두 분의 모습이 더 달아서 진한 커피를 한 잔 마셔야겠는데요? 작은 백오까지 가운데에 끼고 있으니 단란한 한 가족이네요."
왜 저랑 무아스는 그런 모습이 나오지 않을까요. 느르흐는 가볍게 투덜거리더니 커피를 한 잔 가득 따라 입 안으로 들이부어다. 순식간에 체셔와 프마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리고 백오는 느르흐가 마시는 그 무언가를 향해 크림 범벅인 손을 뻗었다.

"나도!"

"아냐, 백오는 먹는거 아냐. 백오는...뭐가 있어, 체셔?"

프마가 황급하게 체셔에게 음료를 가져오라 주문했다. 주스가 있었지? 주스 가져올게. 유난히 서두른 움직임으로 체셔는 주스를 따르러 사라졌다. 둘의 거리를 순식간에 벌려놓은 느르흐는 이 모습이 매우 만족스럽다는 듯 우아한 손놀림으로 팬케이크를 썰어 입에 넣었다.

"와, 저는 고기만 맛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체셔님의 음식은 정말 좋아요. 이 촉촉한 구름의 단면 하며 달콤하면서도 상큼한 라즈베리의 맛이..."

프마는 느르흐를 노려보며 자신도 입에 구름 한 조각을 넣었다. 폭신한 식감과 끈적이는 초콜릿의 질감. 아, 이건 느르흐라도 빼앗을 수 없는 행복이야. 프마마저도 인상을 찌푸리는 것을 멈추고 잠시간 팬케이크의 맛을 음미했다.

*

"그래서 어딜 다녀 오신건가요? 집에 와 보니 다들 없던데..."

"체셔님과 프마님이야말로 어딜 간거에요, 아침에 텅 빈 방을 보고 다들 얼마나 놀랐는줄 알아요?"

"그렇네요, 미안해요...."

먼저 나간건 자기였기에 프마는 느르흐에게 사과를 했다. 백오가 변한 마당에 자신과 체셔까지 없어졌을 때 남은 동료들이 얼마나 놀랐을지를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 저절로 들었다.

"뭐, 백오때문에 나가셨겠죠. 체셔님의 음식을 봐서 봐 드릴게요. 저희가 나간 것도 백오 때문이에요. 저는 라노시아에 갔어요."

"거긴 무엇 때문에?'

"스승님을 찾아뵙고 이것저것 물어보려고 했죠. 아, 걱정은 마세요. 그분들이 백오를 총사령부에 신고하실 분들은 아니거든요. 일단 외양부터 수상하시니..."

느르흐가 식탁 아래로 손을 내려 좌우로 몇번 흔들었다. 아마 톤베리의 작은 크기를 묘사하려는 듯했다.

"그래서 뭘 물어보고 온건가요?"

뒤늦게 식사에 참여한 체셔가 느르흐에게 물었다.

"시간이동이 가능하냐는 질문을 하고 왔죠. 일단 우리의 눈 앞에 있는 저 애는 시간이 되돌려진 백오 같으니까요."

느르흐는 접시에 놓은 포크를 들어 백오를 가리켰다. 포크를 쓰긴 하지만 거의 손으로 먹는거나 다름없이 팬케이크를 먹는 백오는 정말로 어린 아이 그 자체였다.

"그래서 물어보고 왔어요. 시간을 거꾸로 되돌릴 수 있냐고."

"그래서 가능한거에요?"

프마는 식탁에 몸을 바싹 붙이며 물었다.

"시간을 앞으로 보내는 것은 이론상으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반대로 시간을 되돌리는 것은 만만찮다고 하네요."

"이론상으로?"

음...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죠? 느르흐는 천장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커피잔을 들더니 설명을 시작했다.

"자, 시간이라는 것은 계속 흘러요. 마치 액체처럼요. 우리들은 그 안에 들어간 작은 알갱이 같은거죠. 이 커피를 예로 들면 우리는 시간이라는 물 안에 있는 커피의 입자라고 할 수 있을거에요. 시간이 흐른다는건 이런 느낌인거죠."

느르흐는 접시를 들고 오더니 그 위로 커피를 부었다.

"너무 규모가 작아서 설명이 잘 안되네요. 여튼, 이 끊임없는 물줄기에서 어떻게 특정한 지점을 찾을 수 있겠어요? 만약 찾을 수 있다면 가능하겠죠. 그 지점으로 이동하면 되는거니까요."

"그래서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단 거였군요. 근데 우리의 눈 앞에 있는건 그 이론이 실제로 적용된거고요?"

"네. 그리고 또 하나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어요."

느르흐는 잔을 들어 목을 축이곤 다시 입을 열었다.

"옛 니므에서 이 시간이동 이론에 관심을 가진 학자가 있었다고 해요. 그는 자신의 연구를 계속해서 진행시켰고, 하나의 소환진을 만들었죠. 소환술을 사용하자 유리창 너머를 들여다보듯 과거의 특정 지점이 보였다고 해요. 그건 자신의 연구실이었고, 어린 자기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고 해요. 여기서 그는 매우 혼란스러워졌죠."

"왜요?"

"기억 때문이야."

체셔의 질문에 프마가 답했다. 역시 프마님이네요, 느르흐는 고개를 끄덕이곤 설명을 이어갔다.

"만약 체셔님이라면 눈 앞에서 자신과 같은 존재가 나타난다면 잊을 수 있겠어요?"

"그럴리가요..."

"네. 그에게는 미래의 자신을 만난 기억이 없었던거죠. 마법을 통해 과거를 엿본게 아니라 과거와 상호작용을 할 수 있었다면, 과거를 지난 자신에겐 미래와 만난 그 순간이 있을거 아닌가요?"

"그렇네요. 그럼 그가 본건 뭐였나요?"

"다른 차원의 자신인거죠."

"다른 차원?"

이번에는 프마가 물었다.

"네. 상수와 변수의 개념으로 보면 될거에요."

"상수와 변수 같은거구나. 안심할 일이 아니었어. 변수가 뭔지 알 수 없다면..."

"그렇죠. 그래서 에크네페님에게 상수에 대한 자료수집을 부탁드렸어요."

프마의 말에 느르흐는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긴 대화는 하지 않았지만 대화보다 더 많은 의미를 주고받은 듯했다. 체셔쿤은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지만, 둘의 표정을 통해 상황이 낙관적이지 않단 것은 알았다. 프마는 알아듣지 못한 체셔쿤을 눈치채곤 애써 웃으며 설명을 도왔다.

"그러니까 상수랑 변수는 아까의 팬케이크 얘기랑 같은거야. 너굴이가 만든 팬케이크란건 변함이 없지만 나중에 먹는 사람이 뿌리는 시럽이나 소스를 통해 새로운 팬케이크가 되었잖아. 팬케이크를 존재 그 자체라고 보고,  소스를 존재가 겪는 경험이라고 본다면..."

"그럼 우리들도 더 큰, 그러니까 절대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팬케이크처럼 하나의 반죽에서 여러 개가 나올 수 있다는거야?"

"절대자라는건 좀 웃기는 이야기지만... 그래, 우주의 개념에서는 그렇다는거지."

"세상에, 말도 안돼. 가능한 이야기인거야?"

"이론가들은 이미 한번씩은 해 본 이야기들인걸. 다만 그걸 실제로 실험했고 성공한 사람이 님므에 있었다는건 몰랐지만 말야."

"그렇다면..."

체셔쿤은 말을 멈추고 백오를 바라봤다.

"같은 이야기로 뱅뱅 돌리진 말자. 가능성이 하나 더 생긴건 해결방안을 더 고려할 수 있다는거니까. 적어도 과거로의 여행은 가능하다는거잖아."

요 몇일간의 사건이 그녀를 단단하게 만든듯 프마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느르흐씨, 그 학자에 대한 자료는 이게 전부인가요?"

"으음, 그럴줄 알고 자료를 더 가지고 왔어요. 이게 그 학자가 사용한 연구서에요. 소환술식은 적혀 있지만 우리가 이해해야겠죠. 그리고 백오에 대한 자료도 조사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우리의 백오와 지금 저 백오 사이의 상수와 변수가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에크네페님에게 조사를 부탁했어요. 우선은 연구서부터 보시겠어요?"

느르흐는 품에서 안경을 꺼내 쓰곤 옆에 둔 서류가방에서 낡은 책을 꺼냈다.

"그건 나중에 하고 지금 당장은 할 일이 있어요."

느르흐의 성과에 프마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궁금한 표정을 지은 느르흐에게 프마는 손가락을 들어 한곳을 가리켰다.

그새 야금야금 팬케이크를 갉아먹은 백오는 온몸이 크림 투성이가 되어있었다.

"체셔, 목욕물이랑 백오 옷좀 부탁해. 씻겨줘야 할거같아."


***


"그새 백오 옷도 마련하셨나봐요?"

느르흐는 욕실 문을 닫고 나오는 체셔쿤을 보며 물었다. 체셔는 프마와 백오를 위한 깨끗한 옷을 전해주고 나오는 참이었다.

"아무리 제가 손이 빨라도 그건 무리에요. 저건 프마 옷이에요."

"백오 몸에 맞을까요?"

"제 옷보다는 맞겠죠? 길이가 긴 튜닉이니 원피스처럼 입을수 있지 않겠어요?"

무릎 아래 정도 올거에요. 체셔는 손으로 백오가 프마의 옷을 입을 경우 어디까지 올지 어림짐작해보며 씩 웃었다.

욕실 밖으로 까르륵, 백오의 웃음이 높게 터져 나왔다. 체셔쿤은 식탁을 치우곤 설거지를 시작했고 느르흐는 손수 주전자에서 차를 따라 홀짝거렸다.

-눈 꼭 감고 있어야 눈이 안아플거야. 눈 꼭 감았어?
-응!
-정말 꼭 감았지? 그럼 샴푸할게?
-응!

"그 짧은 시간에 프마씨는 바뀌었네요. 어딜 갔다오신 건가요?"

느르흐는 욕실 문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르가유라의 방에서 백오라는 존재의 불확실성에 대해 들으면서 위태롭게 흔들리던 그녀는 사라졌다.
어떡하지, 라며 발을 동동거리기보단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발을 옮기는 모습은 그녀의 앙숙인 아르가유라가 본다면 제법인걸, 하고 말할 정도였다.

"글쎄요. 프마가 말해도 된다고 하질 않아서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프마님은 시간여행에 대한 지식이 많으신가봐요. 평행우주 이론부터 시간이동부터 이해가 빠르셔서요."

"누구든 과거의 일은 바꾸고 싶잖아요."

"그렇죠."

느르흐는 체셔쿤의 옆얼굴을 보곤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전투중엔 입을 쉴 새 없이 놀리며 노래를 부르는 그녀는 집에 와선 정반대로 말수가 적은 편이었다. 특히 자신의 언약자와 관련된 일에 대해서라면 더욱 그랬다.
어딜 갔다오셨는지, 뭘 알고있으신지 말해주고 싶지 않다는거군. 느르흐는 등받이에 몸을 파묻곤 한번 더 체셔에게 질문할까 입을 열었다. 그 순간에 문이 열리지 않았다면 그는 한번 더 체셔쿤의 조개같음에 혀를 내둘렀을 것이다.

"나 왔어요. 부지런히 돌아다녔으니 커다란 컵에 밀크티 한 잔. 각설탕 두 개. 달콤한 간식 잔뜩."

에크네페는 자켓을 벗어 툭툭 털면서 원하는 메뉴를 말했다. 말하는 폼이 평소에도 연성부대를 자기만 아는 단골식당을 대하는 듯했다.

"보통 자켓은 집에 들어오기 전에 털고 들어와요. 어때요, 정보는 많이 구하셨나요?"

느르흐가 창문을 열며 그녀에게 잔소리를 늘어놨다. 체셔쿤은 느르흐가 누구에게 자료수집을 부탁했는지 알게 되었다. 저분이라면 믿을만하지, 그녀는 우유를 냄비에 부으며 씩 웃었다.

"뭐, 백오랑 내가 같은 동네 출신은 아니었지만 말예요. 그래도 꽤 얻어왔지."

그녀는 가죽으로 된 서류철에서 수첩과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근데 느르흐씨, 다음부턴 정보수집을 부탁할거면 더 구체적으로 말해달라고. 무턱대고 '백오에 대한 정보를 잔뜩 구해주세요.'라고 말하면 어디까지 구해야할지 모르겠단 말야."

"여기 보상이요."

느르흐는 코트의 주머니에서 초콜릿을 꺼내 내려놓았다. 대부분의 모험가라면 해독제같은 비상약품이 있을 곳이었다.

"초콜릿으로 넘어가는건 어린 나이에 졸업했다고요."

"아, 그럼 여기 추가 보상이요."

가슴에 있는 주머니를 열고 종이로 포장된 무언가를 꺼냈다. 보통의 학자라면 그 자리에 맥시 에테르같이 위급한 상황에 마실 포션이 있을 자리였다.

"당신 대체 뭘... 이걸 에크네페님이..."

"세상에! 알라미간 딜라이트! 이걸 어디서 구하는지 정말 모르겠단 말야. 고생한 보람이 있네요!"

귀를 쫑긋거리며 에크네페가 반갑게 외치며 노트의 뒷부분을 북 찢어 종이뭉치와 함께 느르흐에게 넘겼다. 무슨 딜라이트? 체셔쿤은 눈썹을 찌푸리곤 에크네페의 손끝에서 종이 포장이 벗겨지는걸 바라봤다. 금괴같은거야? 하고 본 종이포장 안에는 색색의 쫀득한 젤리가 포장되어 있었다. 체셔, 어서! 자신을 재촉하는 에크네페의 눈빛에 물러난 그는 우유에 차를 우리면서도 에크네페의 정보료에 대해 심각하게 고찰했다.

"백오의 부모님은 농부이자 상인이셨군요. 백오가 그렇게 틈만 나면 도끼를 들고 숲으로 뛰어든 이유가 이거였군요."

제 글씨도 악필이지만 에크네페씨에 비하면 명필이었네요. 돋보기를 쓴 느르흐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어머님은 울다하 출신 상인 집안의 딸. 아버님은 선대부터 그리다니아에서 농사를 지으셨구나. 어, 아버님께서도 미코테셨네?"

그러게요, 용기사들 글씨는 다 이렇게 날아다니나요? 체셔쿤이 종이에 얼굴을 바싹 들이대며 중얼거렸다.

"아... 정말, 행복(delight)한걸 먹으면서 들으면 안되는 소리인데."

순간 문이 쾅, 하고 열리며 튜닉을 원피스마냥 펄럭이며 백오가 체셔의 품으로 와락 뛰어들어왔다. 머리 끝에선 아직도 물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백오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체셔의 품에서 키득키득 웃었다.

"물이 흥건하네. 뭐가 그렇게 재밌어?"

체셔쿤은 읽던 서류를 멀리 치우곤 손수건으로 백오의 머리를 닦았다. 뛰느라 발개진 백오는 입을 막고 크득거리다 체셔쿤만 들으라는듯 속닥거리며 말했다.

"프마언니 발바닥에 고양이 모양 점이 있었어! 냐옹이인데 꾹 누르니까 프마언니가 꽥 소리를 질렀어!"

"뭐? 그거 고양이 아냐. 커얼이라고. 그리고 그건 나만 알던건데! 꼬맹이 네가 내 언약자에 대해 뭘 알아!"

"아니거든! 고양이거든!"

보기 드물게 체셔쿤이 흥분해 백오와 말싸움을 했다. 덕분에 모두가 프마의 발바닥에 봉인된 마물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젠 여기 앉은 모두가 알게 됐네. 프마씨의 발바닥에 베히모스 모양 점이 있단건 그닥 알고싶지 않았는데... 전혀 기쁘지(delight) 않아..."

에크네페가 남은 알라미간 딜라이트를 다시 싸며 울적하게 중얼거렸다.

"체셔님, 지금 싸우는 것보단 용서를 비는게 현명해 보이는데요."

청춘이네요. 느르흐는 해탈한 표정으로 눈을 천장으로 돌렸다.

"그래, 맞아. 이 이야기는 그 누구에게도 들려주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인데 말야..."

백오가 열고 들어온 문, 저 편에서 프마가 슬리퍼를 바닥에 신경질적으로 탁탁이며 체셔쿤을 노려보고 있었다.


**


달고 폭신한 구름을 먹었다. 커다란 언니가 작은 언니에게 손바닥을 싹싹 빌며 용서를 구하는것도 봤다. 사촌언니처럼 폭신한 꼬리털을 가진 언니가 안아서 토닥여준다. 무엇보다 열밤이면 엄마아빠가 날 만나러 온다고 한다. 거인처럼 커다란 괴물 할아버지는 무섭지만 지금 자신이 품에 안고있는 꼬리털은 향긋하고 부드러워.

백오는 꾸벅꾸벅 졸면서 생각했다. 언니오빠들이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를 한다. 그 웅웅대는 소리가 마치 부모님이 내일 일을 논의하는 소리와 같아 저절로 잠이 왔다.

"본명은 백오 바크. 판다는 집에서 부르는 애칭이었나봐. 희한하게 달의 추종자 부족이면서도 가족들이 마을에서 함께 살았다네요."

복잡한 가계도를 더더욱 복잡한 글씨로 그린 종이를 보며 모두는 에크네페의 설명을 들었다.

"환술사길드에 입학한건 세살 반 무렵. 갑자기 환술적 재능에 눈을 뜨게 되었나봐."

"갑자기? 그게 갑자기 나오던가, 그 이전에 미리 자연과 소통을 하거나 자연의 에테르를 감지하는 재능이 나오지 않아? 아니, 애초부터 어린애를 그런 길드에 보내던가?"

프마가 의아한듯 따져물었다.

"맞아요. 하지만 백오의 경우 매우 특이했죠. 갑자기 환술의 기초인 바람과 대지를 다루는 마법을 사용하게 됐거든요. 때문에 센나 남매님들의 회의 결과 환술사 길드에서 교육을 하며 가르쳐주게 되었나봐. 그리고 이 사진이 그 당시 백오의 초상화. 길드원들의 몀부에는 이름과 고향 뿐 아니라 이런 세세한 외모까지도 기록해놓거든요. 백오의 경우에는 길드에 처음 들어왔을 때 한번, 그리고 10대가 되어서 한 번, 최근에 마지막으로 한 번 총 세 장의 초상화를 보관하고 있었어요. 아마 어린 나이에 길드에 들어오다 보니 성장하며 외모가 바뀌었기 때문이겠죠."

환술사 길드의 길드장에게서 겨우 얻을 수 있었어. 내가 그리다니아 출신이 아니었다면 얻질 못했을거라고요. 에크네페는 자랑스럽게 가슴을 펴곤 수첩 사이에서 두 번 접힌 종이를 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 때가 어느 때에요?"

프마가 종이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초상화 구석에는 신장과 체구, 외모에 드러나는 특이사항들을 세세히 기록해 이 종이 한장 자체가 백오를 증명하는 신분증이나 다름없었다.

"백오의 생일과 이 초상화가 작성된 시기를 비교해보면 아마 세살 반에서 네살 사이의 초상이겠죠? 여기, 세부사항을 읽어볼게요. 먼저 체구에 비해 큰 귀. 가끔씩 움직이기도 함. 귓바퀴 뒤쪽에는 작은 빨간색 점이 있음."

모두는 에크네페의 꼬리를 끌어안고 자는 백오의 귀를 바라봤다. 확실히 양쪽 귀를 합친다면 얼굴을 가릴 정도이니 큰 귀이긴 했다. 잠시만... 프마가 백오의 등을 토닥이며 백오의 귀를 앞으로 구부렸다. 모두가 얼굴을 바싹 모으고 백오의 귀에 눈을 가까이했다. 작은, 소금 알갱이만한 빨간 점이 보였다. 이이잉! 귀찮은지 백오가 반대로 돌아누웠다. 그 사이에 접혀있던 반대쪽 귀가 푱, 소리를 내듯 하늘로 펴졌고 낑낑대며 편한 자세를 만드는 백오의 실갱이와 함께 미묘하게 움찔거렸다.

"턱 아래에 작은 흉터가 있음."

"..."

흉터는 없었다. 모두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특히 백오가 이곳 사람이 아닐수도 있단 생각을 못한 에크네페는 기록이 다른 것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했다.

"저런 것까지 기록하는거 보면 환술사길드에는 살짝 소름끼치는 사람이 있나보네요..."

소름이 끼치는지 체셔쿤은 자신의 팔 대신 프마의 팔에 손을 얹었다. 찰싹, 화가 덜 풀린 프마는 체셔쿤의 손등을 모질게 때렸다. 제발 그만. 느르흐는 양 손을 들어 둘을 말리곤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럼 상수는 귀의 점이라는 걸까요. 변수는 턱에 흉터가 생긴 사건이고..."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야. 세 살 반에서 네 살 사이에 다친 것일수도 있잖아."

그러게요. 뭘 확신할 수 없네요. 느르흐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미안해요, 에크네페씨. 자세한건 이제 천천히 설명할게요."
프마가 물잔을 입에 가져다대며 말했다.


***


복잡하고 또 복잡한 이야기네. 에크네페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곤 자기가 할 수 있는 한의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평행우주니 다른 차원이니 시간여행이니 모두 자신이 생각도 못한 이야기였다. 백오는 백오지 뭐가 더 필요하다는거야! 정 안되겠음 이 꼬맹이 백오를 우리가 무럭무럭 키우면 안돼? 에크네페의 사고는 급기야 극단적이고 말도 안되는 이야기까지 흘러갔다. 이 백오가 우리가 아는 백오가 맞는지를 확인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는 너무 고달픈 사고실험이었다.

"여튼, 그래서 내일은 나랑 체셔쿤이 정보수집을 위해 어딘갈 가야겠어. 그래서 말인데, 내일 백오를 봐 줄 사람은 없어?"

작은프마는 어딜 가는지는 밝히지 않고는 이야기를 꺼냈다. 느르흐는 그런 프마를 한참 바라봤다. 결국 그녀가 행선지를 밝히지 않자, 느르흐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일단은 제가 집에 있을게요. 연구서를 해독해야 하기도 하고, 오늘 움직인것만으로도 좀 피곤하거든요."

'백오가 겁을 먹지 않을까요?' 체셔는 백오가 자신의 다리를 껴안을때부터 백오가 느르흐를 무서워한단걸 느꼈다. 하지만 차마 저 말을 하기에는 느르흐의 눈빛 속에 기대가 담겨있다는 것을 무시하기 힘들었다.

"렌이에게도 부탁해서 같이 있어 달라고 할게요. 에크네페씨도 별 일 없으면 부탁드려요."

그래서 그는 백오가 좋아하는 에크네페에게 부탁을 하는 것으로 불안감을 위로했다.

"자, 회의는 여기까지 하고. 이제 자러 가보죠?"

에크네페가 잠이 든 백오를 안아 프마의 품에 안겼다. 어 제가 아니에요? 체셔쿤은 궁금증을 띄우고 에크네페를 봤다. 하지만 대답은 아래서 들려왔다.

"넌 밖에서 자. 벌이야."

번쩍. 정강이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고통에 저절로 눈물이 났다.

힘내요. 느르흐씨고 에크네페씨고 그녀의 등을 위로하듯 두드리곤 지나간다.

근데 말야, 거기 내 방인데...

자신의 방에서 쫓겨난 체셔쿤은 프마의 방으로 가려다 결국 담요를 주워들고 거실 쇼파로 향했다. 뭔가 열심히 하긴 했는데... 성과는 없는, 슬픈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