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는 겨울의 산은 아름다웠다. 산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길에 검은 망토를 두른 여성이 걷고 있었다. 내리는 눈의 굵기가 점점 더 굵어지는 것을 봐서 이 날씨에 산을 오르는 것은 매우 위험해 보였다. 하지만 여성은 발목까지 빠지는 눈에도 걸음을 멈추지 않고 산을 오르려 하고 있었다. 족자에 의하면 산 중턱에 하나의 집이 있었던 것으로 그녀는 기억했다. 그리고 그 집으로 가는 길은 다행히도 하나였다. 드문드문 끊긴 돌담으로 이어진 이 길은 눈발이 조금 더 굵어진다면 시야가 확보되지 않으리라. 그렇기에 그녀는 해가 지기 전에 가능한 집으로 가려는 듯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머리 위로 소복히 쌓인 눈을 털 새도 없이 걷던 그녀의 걸음이 멈추었다. 저 멀리서 거뭇한 인영이 비추었다. 하얀 시야에서 그 사람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기에 품에 있는 지팡이를 빼 앞을 겨누었다. 하지만 지팡이의 끝은 두려움 때문인지 가늘게 떨렸다. 식견이 조금이라도 있는 마법사라면 그녀의 행동을 보고 걸음을 멈추고 자신이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다. 하지만 저 멀리의 사람은 멈추기는 커녕 걸음을 더 빠르게 했다. 주문을 쓰는 것이 옳은 일이겠지. 그녀는 머릿속으로 수많은 주문들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 주문 중 입 밖으로 나오는 주문은 단 하나도 없었다.
"교수님! 저에요!"
거친 날씨와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은 사람의 인지를 왜곡한다. 큰 키라고 생각했던 것이 알고보니 손을 위로 높게 뻗고 인사를 하고 있던 것이었구나.
익숙한 목소리에 앙겔라의 어깨에서 긴장이 빠진다. 보고 싶은 사람이 눈 앞에 있으니 아무리 근엄한 교수의 모습을 유지하려고 하는 앙겔라의 입술도 앞으로 툭 튀어나오게 된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 다행이야, 앙겔라는 튀어나온 입을 다시 안으로 집어넣고는 환히 웃는다. 그러고는 신발 안으로 눈이 들어오는 것도 개의치 않고 자신의 학생을 향해 빠르게 걸어간다.
"하나!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요?"
"교수님이 마법으로 표범을 보내셨잖아요. 그렇게 큰 표범은 박사님만이 부를 수 있죠. 그래서 당연히 그 표범을 따라 왔죠."
볼이 빨개진 하나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솟았다. 교수님, 나 많이 기다렸어요? 아까의 상상 속 괴인은 자신의 눈 앞에서 재잘거리는 병아리 학생이 되어 있었다.
아, 그렇구나. 앙겔라는 하나의 재잘거리는 목소리에 빙그레 웃기만 한다.
"이 쪽으로 와요, 우리 부모님이 짖굳은 분들이셔서 큰길로 따라갔다간 산의 정상으로 가지 절대 저희 집으로는 못 가요. 아버지께서 우리 집의 가족인 경우, 족자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집으로 이동하는 순간이동 도술을 없애는걸 깜박 잊으셨대요. 그래서 이런 일이 일어난거에요. 제가 집으로 안내할게요."
그 새 집에서 옷을 갈아입은 것일까, 한국 마법사들의 의상인듯한 흰 색의 긴 옷과 짙은 곤색의 조끼를 걸치고 그 위에 요즘 산듯한 두툼한 패딩을 입은 그녀의 모습은 정말 이 곳의 사람인듯 익숙했다. 매일 호그와트의 검은 교복 망토만 입은 모습을 보다 새로운 모습을 보자 앙겔라는 하나의 모습이 새롭게 느껴졌다. 자신의 집이어서일까, 하나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교수의 손을 잡고 띄엄띄엄 끊어지던 돌담을 하나, 둘 세며 앞으로 걸어나간다. 열둘, 이라는 소리와 함께 돌담 앞에 선 하나는 패딩 코트의 주머니 안에서 쥘부채를 꺼내더니 돌담을 톡톡 두드렸다. 돌담은 마치 안개처럼 홀연히사라지더니 그 곳에서 새로운 길이 펼쳐졌다. 그리고 그 길로 들어서더니 또 다시 "자, 축, 인, 묘..."라는 알 수 없는 주문과 같은 소리를 중얼거리더니 이번에는 "신"이라는 말과 함께 아홉번째 돌담을 두드려 새로운 길을 열었다.
"자, 여기로 쭉 가면 우리집이에요. 어서 가요."
어때요, 우리집 신기하죠? 하나가 앙겔라를 돌아보며 씩 웃는다. 이제 하나의 집으로 가는구나. 이제 길을 찾았다는 안도감에 앙겔라의 입에서 하얀 한숨이 폭 나온다. 그리고는 다시 입가가 굳는 것이 저 앞에 있을 하나의 아버지를 만날 것을 걱정하는 듯 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걸까, 하나는 아무 말 없이 앙겔라의 손을 꼭 쥐어주었다. 평소라면 그런 하나에게 선생님과 학생의 거리를 운운하며 훈계를 했을 앙겔라도 이번에는 그 손이 주는 온기가 필요하다는 듯 손을 마주 쥔다.
"박사님, 아버지를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하실건가요?"
"하나양이 이번에 본 쪽지시험 얘기를 먼저 꺼내야죠."
"어, 맞다! 이번에 시험 어떻게 봤어요?"
"늘 그렇듯 잘 봤죠. 걱정 마세요."
하나는 쉬지 않고 재잘거린다. 이번에 본 OWL 시험, 내년에 있을 수업, 교수님은 방학때 어디 계시나요?, 평소보다도 훨씬 더 수다스러운 하나의 모습에도 앙겔라는 채 긴장을 풀지 못한 듯 얼굴을 굳힌 채 짧게짧게 대답을 한다. 교수님이 통 얼굴을 풀지 않자 결국 하나도 지쳤는지 조용히 앙겔라와 어깨를 나란히 할 뿐이었다. 그 대신 앙겔라와 함께 한 손의 손등을 엄지로 간질이며 그녀를 계속해서 안심시키려 노력했다.
푸른 불빛이 대문 앞의 화로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족자에 표현된 집은 진짜 집보다 훨씬 더 소박하게 표현된 편이었다. 그녀의 앞에 있는 하나의 집은 어마어마하게 큰 한국의 전통 가옥이었다. 단단한 돌로 지붕을 올린 집이 멀리서부터 그녀를 압박했다. 그리고 집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의 거리가 되자, 천둥과도 같은 큰 소리가 지축을 울렸다. 그 소리에 놀란듯 앙겔라는 본능적으로 다시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저 앞에서 거인이라 착각할 정도로 키가 큰 남성이 웃으며 앙겔라에게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키는 2m정도 될까, 나이는 40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뺨부터 턱까지 시커먼 수염이 덮고 있어 입을 다문다면 입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하지만 목젖이 보일 정도로 남성은 입을 크게 벌리며 웃고 있는 덕분에 입을 찾는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나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의 전통 복장을 한 남성은 덥썩 앙겔라의 손을 잡았다.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호그와트의 래번클로 기숙사 사감, 앙겔라 치글러라고 합니다."
마법 덕분에 둘은 수월하게 인사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큰 소리에 놀라 몸을 굳히던 아까까지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어느새 근엄한 교수의 얼굴이 된 앙겔라는 남성에게 고개를 숙였다. 동양의 예법에 맞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려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는 손을 내민 남성은 한번 더 큰 소리로 웃었다. 하지만 아까와는 다르게 눈썹도 움직이지 않고 앙겔라는 남성의 손을 마주잡으며 빙그레 입가에 웃음까지 띄웠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남성은 놀란 듯 부리부리한 눈을 더 크게 떴다.
"역시 교수님이시군요,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하나의 애비 되는 송상현입니다.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네, 다시 인사드리죠. 호그와트의 앙겔라 치글러입니다. 하나가 속한 기숙사의 사감이기 때문에 교장선생님께서 저를 대신 보내셨습니다. 직접 오지 못하셔서 죄송하다는 말씀 전하겠습니다."
그렇게 둘은 다시 얼굴을 펴고 인사를 나누었다. 하나는 잘 지내나요? 네, 총명한 아이이기 때문에 제가 가르칠 것이 많지는 않습니다. 총명하고 또 활달한 학생이에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둘이 있던 곳은 마당에서 사랑방으로 바뀌었다. 밤이 늦어서일까, 사랑방은 푸른 초롱불이 들어와 어두운 방을 밝히고 있었다. 발 빠르게 움직였는지 사랑방 한 가운데의 주안상에 하나가 술병과 안주 등을 준비해놓고 있었다.
"아, 술은..."
술은 잘 마시는 체질은 아니기에 술잔에 부어지는 뽀얗고 시큼한 향을 풍기는 술에 앙겔라는 한사코 거절을 했다. 하지만 아까의 그 웃음소리가 앙겔라의 거절을 묻어버리고 말았다.
"추운 겨울입니다. 몸을 녹이는데엔 술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방 안은 냉기가 돌아 싸늘했다. 하는 수 없이 술잔을 든 앙겔라는 상현과 함께 술잔을 들고 마셨다. 금새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렇게 몇 번의 술잔이 오가자 금새 술병은 동이 났다. 술을 더 가지고 오라고 눈으로 상현이 하나에게 지시를 내리자 하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도 그만 마셔요! 교수님이 여기 오신게 술 마시러 오신건 아니잖아요."
"이래서 딸 자식을 키워봤자 다 소용이 없다고 하나 봅니다. 조금 키웠더니 게임이란 게임은 애비를 이겨버리고. 벌써 지 선생님이라고 감싸는것 보세요. 이러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을 감싸지 않겠습니까!"
짐짓 화가 났다는 듯, 상현은 소리나게 술잔을 상에 내려놓았다. 그 충격에 앙겔라의 술잔에서 술이 넘쳐 앙겔라의 옷을 더럽혔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상현이 건네는 수건을 받아 옷을 닦으며 앙겔라는 그제서야 상의 그릇들에 이가 조금씩 빠져 있는 것을 눈치챘다. 아마 저렇게 술잔을 쾅쾅 내리친다면 어떤 그릇이라도 무사하지 못하리라.
"그런데 말입니다 선생님, 동양의 도술과는 다르게, 서양의 도술은 도구를 쓴다면서요."
지팡이(wand)라고 하던가요? 상현이 한쪽 눈썹을 기울이며 물었다. 빽빽한 그의 송충이눈썹이 찌푸려지는 것에 불안감을 느낀 앙겔라가 품을 더듬었다. 지팡이가 없었다.
"이걸 찾으십니까?"
상현의 손 위에서 지팡이는 마치 젓가락처럼 아담해 보였다. 아까 수건을 건넬 때 슬쩍한 것일까, 앙겔라는 입술만을 올리며 대답했다.
"네. 서양에서는 지팡이를 자기의 분신처럼 아낍니다. 돌려주시죠."
내민 그녀의 손을 무시한채 상현은 이리저리 지팡이를 돌려보았다.
"지팡이에는 요물의 신체부위가 들어간다고 들었습니다. 용의 심장 근육이나 일각수(一角獸)의 꼬리털 같은거 말입니다. 교수님의 것은 어떤 것입니까? 이것에도 죽은 요물의 신체부위가 들어간 것인가요."
엇차, 상현은 하나를 향해 장난스럽게 지팡이를 휘둘렀다. 하지만 자신의 것이 아니어서일까. 하나의 머리카락만 쭈뼛 잠시 설 뿐 별 일은 없었다. '아빠, 선생님께 그게 무슨 무례에요?' 하나의 말을 무시한 채 상현은 앙겔라의 눈을 빤히 바라봤다. 아까 공손하던 태도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 다소간의 적의가 깃든 눈이었다. 하나가 다시 입을 열어 아버지를 진정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하나가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꼼꼼히 바라보던 앙겔라는 손을 들어 하나를 제지했다.
"아뇨, 괜찮아요 하나. 네. 마법의 힘을 증폭시키기 위해 희귀한 마술재료가 들어가기도 합니다. 저의 경우 유난히 붉은 주목나무를 주 재료로 하고 유니콘, 그러니까 일각수 중 뿔이 달린 백마의 꼬리털을 그 재료로 삼았죠. 하지만 지팡이를 만들기 위해 모두를 다 죽이지는 않습니다. 특히 순수함의 결정체인 유니콘을 죽이는 것은 퍽이나 불길한 것이어서 말이죠. 유니콘이 흘린 꼬리털을 넣은 것입니다."
앙겔라는 '백마'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다. 상현의 눈이 불쾌한 빛을 내고는 손에 못 댈것을 대었다는 듯 술상 위로 지팡이를 내려놓았다. 천천히, 앙겔라는 지팡이를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상현을 향해 지팡이를 겨누었다. 방에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어허, 교수. 장난이 심하십니다." / "교수님!"
하나와 상현의 목소리가 그 정적을 깼다. 하지만 앙겔라는 지팡이의 끝을 하나를 향해 돌리더니 상현의 옆으로 가 서라고 손짓을 했다. 하나는 무기를 든 사람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교수님, 왜 그러시는 거에요? 장난도 이정도면 지나치신데요?"
"아뇨, 장난이 심하신건 그쪽이죠. 이제 정체를 드러내주시고 저를 하나와 하나의 아버님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주시는건 어떨까요, 두분 모두?"
***
하나와 보충수업을 할 때의 일이다. '페트로누스 마법을 쓸 줄 알면 OWL 마법 방어술 시험에서 O는 보장되어 있다면서요? 그럼 필기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어요?" 라며 하나가 나에게 페트로누스 마법을 가르쳐달라 떼를 부린 적이 있었다. 용서받지 못할 저주도 아니고 하나의 재능이라면 무리도 아니겠다, 더불어서 그 당시 하나의 어둠의 마법 방어술 필기시험의 점수가 낮았기에 나도 장난삼아 그녀에게 그 마법을 가르쳐줬었다. 그리고 그 때 우리는 서로의 페트로누스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하나는 여우, 나는 설표라는 것을.
그런 그녀가 나의 페트로누스를 표범이라고 부르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는 말이 많은 성격은 아니었다. 나를 좋아한다고 티를 내긴 했지만 옆에서 조잘조잘 떠드는 것보다는 조용히 내가 하는 모든 것을 지켜보는 것이 그녀였다. 그리고 그녀와 체스게임을 하던 도중에 그녀는 웃으며 한 마디를 던졌었다.
-박사님은 그렇게 머리도 좋으신 분이 체스는 못 두시네요. 저는 아버지와 게임을 해서 한 번도 이긴적이 없었기에 게임을 못하는 어른은 처음이에요.-
그래. 내 눈앞에 있는 이 두 사람, 사람이라고도 확신을 못하겠지만, 이 하나와 하나의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 눈속에서 길을 잃고 쓰러지는 것보다 귀신일지라도 저 둘에게 일단은 속아 넘어간 후에 둘을 통해 하나에게 가는 것이 더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나의 짐작은 그대로 들어맞아 지금 나는 두 사람에게 지팡이를 들이대고 있었다.
"우리가 송 어르신과 하나가 아니란 것은 어떻게 아신거요?"
"하나는 내 기숙사의 학생이에요. 하나를 가르치려면 하나가 온 곳의 환경은 알고 있어야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보니 재미있어서 더 파고들게 되었구요. 이 빠진 그릇, 큰 목소리, 사람을 놀리는 것과 술을 좋아하는 거구의 요물, 백마의 꼬리털이 지팡이에 들어갔다고 말하자마자 지팡이를 내려놓는 것에서 확신했어요. 당신은 도깨비죠?"
허허허, 그래요. 하고 남성이 웃으며 말한다. 나는 그의 수긍을 듣고 이번에는 하나로 분장한 그것에게 눈을 돌린다.
"당신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언제부터 알게 되었는지 일일히 설명할 생각은 없어요. 다만 지팡이 자체에도 마법적인 힘이 있긴 하거든요. 어느 정도 마법적인 생물이라면 지팡이를 쓸 때 약한 마법이 발휘가 되어요. 아까 도깨비씨가 당신에게 지팡이를 휘둘렀을 때 당신이 다친 데가 없는지 본게 아니라 당신의 어디가 변했는지 봤어요. 그림자, 그림자가 변했더라고요."
나는 호롱불에 비친 그녀의 그림자를 가리킨다. 사람의 모습 대신에 꼬리가 아홉 개 달린 여우의 그림자가 있다.
"아차차, 순식간에 분위기가 험악해져서 그것까지는 신경 쓰질 못했어요. 그래요, 저는 구미호에요"
그녀도 싱글싱글 웃으며 자신의 정체를 시인한다.
"그럼 하나의 아버님에게 데려다주셔야겠어요."
이렇게까지 얘기한다면 그들이 수긍하고 일어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젓기만 했다.
"에이, 선생님은 우리를 잘 모르는구먼.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건 장난인데 장난이 여기에서 끝날거라 생각하나?"
"그럼 싸우는걸 원하나요?"
"원한다면 그렇게 하셔야겠지. 하지만 싸움이 끝나고 나서,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르는데. 혼자서 이 산을 뒤집어 엎을 생각인가? 그리고 선생은 이 곳이 그냥 산일거 같수?"
여기도 도술로 만들어진 공간이야. 바깥의 산과는 다르지. 도깨비는 빙긋 웃는다.
그렇게 웃는 그의 몸집은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하나로 위장한 구미호 또한 뒤에서 굼실거리는 아홉개의 꼬리를 숨기지 않는 것이 나와 싸울 생각인 듯 했다. 나도 이에 질 수 없기에 지팡이를 더 단단히 잡고 그들에게 대항할 주문을 생각한다.
내가 여기서 무사히 나가리라는 보장은 할 수 없다. 구미호도 도깨비도 한국에서는 달갑게 취급받지는 않는 괴물들이다. 그렇기에 가장 좋은 판단은 이들을 물리치고 하나의 구조를 기다리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내가 이들을 죽이고 싶은 것일까. 그들이 나를 해치려고 했다면 나를 그냥 그 눈속에 내버려둬도 되지 않았을까, 여기 오기 전에 이미 나를 해하려면 해할 수 있었을텐데...
"알았어요. 어떻게 해야 하나 아버님께 절 보내주실거죠?"
결국 나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지팡이까지 내리고 제자리에 앉은 날 보며 둘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그도 그럴것이 아까까지만 해도 피가 흘러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는걸.
"싸우지 않을 생각인가?"
"만약 당신들이 그렇게 흉악한 '괴물'들이라면 이렇게 저를 접대해주지도 않았겠죠. 또 애초부터 하나 아버님이 그냥 두셨겠나요, 그분에게 폐가 되는 행동은 하고싶지 않아요."
또 다시 도깨비의 벼락같은 웃음소리가 귀청을 울린다. 도깨비에게 예의를 갖출 필요는 없기에 이번에는 귀를 막았다. 한참을 웃던 그는 입을 열었다.
"아, 이렇게 생각하는 도사는 또 처음인데. 생각해보면 자네는 송 어르신과 매우 비슷하구만. 그렇군. 그럼 나랑 적당히 놀아준다면 기꺼이 보내주겠네."
그가 뒤로 몸을 돌리더니 나무로 된 탁자를 꺼낸다. 탁자 위에 여러줄의 선이 죽죽 그어져 있었다.
"장기, 할줄 아나? 동양의 체스라고 생각하면 될거야. 생각해보면 체스랑 움직이는것도 비슷하네. 한 판이라도 날 이기면 송 어르신에게 모셔다 드리지."
"전 체스도 잘 두지 못하는데요. 하나와 체스를 둬서 이긴 적이 없어요. 그냥 몇 게임을 같이 두는 것은 어떤가요?"
하지만 고집이 센 도깨비답게 그는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괜찮아. 그 아가씨가 일곱살이 된 이후로 그녀와 게임을 해서 이긴 적이 없어.' 라며 그는 장기판을 닦고 말을 늘어놓으며 말을 놓는 법을 안내했다.
"일단 말을 알려드릴게요. 이건 차, 루크와 같은 움직임을 가져요..."
구미호씨가 나의 옆에 앉아서 장기판의 말을 하나하나 들며 나에게 장기의 규칙을 설명한다.
"그럼 다 설명했네요. 나머지 규칙은 게임을 하며 김서방이 알려줄거에요. 저는 술을 좀 더 가져올게요. 부디 이기시길 바랄게요."
순식간에 규칙들을 설명하더니 구미호씨는 후다닥 방을 나선다. '먼저 두게.' 김서방이 나에게 웃으며 말한다. 조심히 손을 뻗어 맨 앞에 있는 말을 앞으로 한 칸 옮긴다. 이게 맞는 것일까. 틀리지는 않은 듯 김서방은 다시 껄껄 웃으며 '잘하는구만 선생님.' 하고는 딱 소리가 나게 장기말을 옮긴다.
옆에서 나에게 술을 한 잔 건넨다. 아까의 그 뿌연 탁주이다. 쭉 한잔을 마시며 앞의 장기판을 주시한다.
잘 해야 한다. 이겨야한다. 그래야 하나를 만날 수 있어.
**
"어이, 선생님 괜찮수? 벌써 몇 판 째인지 아나? 정 안되겠음 내일 아침까지 여기 있다가 아가씨가 오는걸 기다리던가. 아가씨가 오기는 할 거야."
더워서 셔츠의 단추를 몇 개 풀자 건너편에 앉은 김서방이 나를 향해 씩 웃는다. 그 후로 세 판을 내리 졌다. 말을 많이 먹힌 것도 아닌데 순식간에 장군을 불러오는 그에게 몇 번을 쩔쩔매며 멍군을 부르다 보면 어느새 경기는 그의 손 안에 들어갔다. 그는 여유롭게 허리를 펴고 앉아 장기판을 들여다봤고, 나는 입이 타 옆에 있는 술을 입 안에 들이부었다. 그러다보니 방 안에 찬 기운이 돌았던 것은 과거의 일이 되었고, 이제는 더워서 손부채질까지 할 지경이 되었다.
"그러니까 무리하지 말고 즐기라구 선생. 선생도 못하는게 있겠지."
그의 말을 무시하고 나는 계속해서 장기판을 바라본다. 눈 앞에서 아지랑이가 올라오는 듯 해서 몇 번이고 안경을 벗어 닦아보지만 장기판은 여전히 울렁거린다. 이미 판세는 기울어 몇번이고 장군이 불러졌었고 나는 간신히 멍군을 부를 수 있었다. 말이 많이 잡아먹힌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장군이 불려져 한참을 들여다보면 내 왕이 먹힐 위기에 놓여 있어 간신히 멍군을 부를 수 있었다.
하나양과 체스를 둘 때도 비슷한 일들을 종종 겪었었다. 그 때에도 하나양은 저편에 앉아서 나를 보며 씩 웃곤 했었지.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피할지 생각하지 말고,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뒤집을지 생각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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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양이 체스판 너머로 손을 뻗어 옆으로 흘러내린 내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도망가려 하지 마요. 도망가면 도망갈수록 마음이 조급해져서 눈 앞이 보이지 않는 법이죠."
"그런데 일단 저 나이트가 제 킹을 잡으려고 쫒아오는걸요, 그러니 도망가야하지 않나요?"
"그것보다 이 비숍을 움직이면 제 킹을 압박할 수 있게 되는걸요?"
하나양이 가리킨 곳을 보니 정말 내 비숍이 하나양의 킹을 잡을 수 있는 자리가 보였다. 놀란 내 눈을 보며 하나양은 픽 웃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걸어온다. 책상 위로 구부정하게 기울인 내 몸을 반듯하게 펴 주고는 어깨를 마사지하며 그녀는 나에게 얘기한다.
"좀 숨을 고르고, 멀리서 내려다봐요. 전장의 한복판에 서 있지 말고 전장을 지휘하는 지휘관이 되어 보세요. 자, 그러면 수가 보일거에요."
---
"...장군."
"어? 어어?"
큰 목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장기판의 전황이 변해 있었다. 어떤 정신으로 장기를 두었던 것일까. 내 자신을 살펴보자 마치 하나가 나의 자세를 바로잡아준듯 몸이 바른 자세로 잡혀 있었다. 전황 또한 변해 있었다. 그래, 나는 어느새 하나처럼 전쟁을 지휘하는 지휘관이 되어 있었다.
"장군이요."
한참동안 김서방은 아무 말 없이 장기판만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낮은 탄식을 내뱉고는 곧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졌구만! 정말 선생은 재미있는 사람이야. 신기허네!"
손뼉까지 치며 '재미있는 게임이었어!'라고 그는 연신 웃는다. 그가 손뼉을 한 번 칠 때마다 내 머리가 윙윙 울렸다. 눈 앞의 그가 점점 흐물거렸다.
"그럼 이제 알려주세요, 어디로 가야 하나양과 그녀의 아버님을 만날 수 있죠?"
"근데 선생, 지금 선생 몸이 기울어지고 있는데? 취했구만?"
그가 큰 입을 드러내며 웃는다.
"그래도 약속은...약속... 아닌가요?"
무거운 혀를 간신히 움직여 이야기하자 '취한 선생이 학부모 집에 찾아가도 재미있겠는걸? 알겠네.' 하고 그가 이야기한다.
약속이에요, 그를 노려보며 이야기하자 알겠다고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걸 마지막으로 내 눈앞이 어두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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