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신쿤(@nerf171)님의 썰을 기반으로 작성했습니다. : http://sinkoonote.tistory.com/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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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잠시 앙겔라가 불러 가 봤더니 조금 더 적극적으로 하나에게 다가가도 될 거 같다는 얘기를 했었다.
그래서일까, 꼬맹이는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 괜히 좀이 쑤셨다. 팔찌의 음성 안내를 재생하니 평소보다 조금 더 심장이 쿵쾅거리기는 해도 가이딩을 받을 만큼의 수치는 아니었다.
정작 내가 필요할 때는 조용히 있는 이 몸이 오늘따라 원망스러울 때, 본부에서 임무 지시가 내려왔다. 좋은 핑계거리였다.
쉬는시간에 꼬맹이를 잠시 불러내 악수만 하고 가자, 아니 그냥 간단한 안부를 주고받는건 이상하지 않을거야. 예전처럼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좋을거 같아.
그때의 그 벅찬 기분이 다시 떠오르자 괜히 몸이 따끈따끈해졌다.
꼬맹이의 교실 가까이에 갔을까. 명문가 특유의 기분 나쁜 말투가 들려왔다.
"애초부터 제대로 훈련을 받아오지 못한 가이드들은... 원시적이지. 포옹이나 키스, 섹스만으로 진정을 시킨단 말이야. 감정의 교류라던가 민감한 것을 다룰 줄 모르지. 짐승들처럼.
...... 그런걸 보면 레나 옥스턴이라는 센티넬도 이상하지 않아? 성벽이 이상하다던가. 생각해봐, 20여년간 어떤 가이딩도 받지 않았으면... 이런거 아냐?"
짜증나는 말을 하네, 지금 저 목소리는 렉스라는 A급 가이드의 목소리지? 나중에 저 녀석의 파트너를 손 봐줘야겠네.
그보다, 그런 말을 듣고 하나가 겁을 먹는건 아닐까. 괜히 뱃속에 무언가 꿈틀대는 느낌이 들었다.
"너야말로 가이딩 하면 그런것만 생각하는걸 보면 너희 집안은 만만찮은 매음굴인가보지? 너의 파트너인 저 센티넬도 그런거 아냐?"
역시 그녀는 내 기대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었다. 도발에 도발로 맞받아치는 그 말투가 너무 통쾌했다.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무언가 묵직한 것이 바람을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걸 건드리는 건 누구라도 가만두지 않을거야. 가슴이 쿵쿵 뛰었다.
***
전투는 일방적이었다. 빅터는 큰 체구임에도 불구하고 움직임이 재빨랐다. 하지만 옥스턴씨의 움직임은 그것보다 한층 더 빨랐다.
마치 어디서 주먹이 날아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주먹이 날아오기 직전에 가속을 사용해서 사라졌다가 빅터의 뒤에 나타났다.
"봐, 이렇게 명문가문 명문가문 나불거리는 것들이 실제로는 허공만 툭툭 친다니까."
"실력도 없으면서 말이야."
"명문 가문이면 베풀고, 솔선수범하고 그래야지. 나쁜것만 배워서."
노골적인 놀림이었다. 레나는 빅터를 치지 않았다. 다만 그의 뒤에 나타나서 계속 그의 신경을 자극할만한 말들만을 반복했다.
팔찌를 바라봐도 옥스턴씨가 움직이는 것 이상으로 심박이 올라가지는 않았다. 그저 그녀는 잔잔한 마음으로 상대를 조롱하고 있었다.
조롱을 할 때에는 짜증이나 화가 나는 순간이다. 이런 순간에도 저렇게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러면 저 사람은 지금 왜 싸우는 것일까. 가이딩을 해 주는 가이드가 다칠까봐?
아무리 잘 살펴보려고 해도 저 사람의 감정을 모르겠다. 혹시 내가 저 사람의 손을 잡아도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는건... 혹시... 저 사람에게는 감정이 없기 때문 아닐까?
싸움을 보며 내 마음은 점점 복잡해져갔다.
한참을 복잡한 마음으로 둘의 전투를 바라보는데 뒤에서 누군가 우악스럽게 나의 뒤통수를 책상에 눌렀다. 어찌나 세게 눌렀는지 책상에 머리를 박아 쿵 하는 소리가 교실을 울렸다.
렉스였다. 자신의 파트너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굴욕을 당하는 것이 힘들었겠지. 그런 그가 목표물로 잡은 것은 그녀의 가이드인 나 자신일 터였다.
센티넬과 가이드가 함께 다닐 일이 있을 경우를 대비해 가이드는 어느 정도의 체술 훈련을 받기도 한다. 나도 최근에서야 기초적인 체술을 익히고 있긴 하지만 그에 비해선 턱 없는 수준이다.
머리에 멍이 들겠는데 라는 생각과 적어도 얼굴은 지켜야지, 라는 생각을 하며 팔을 들어올리려는데 더 이상의 공격이 오지 않았다.
의아함에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리자 옥스턴씨가 내 옆에 있었다. 그녀는 손으로 렉스의 목을 틀어쥔 채 허공에 들어올리고 있었다.
빅터는 사물함에 팔을 대고 있었다. 아니, 자세히 들여다 보자 그의 팔에 박혀 있는 것은 잭 나이프인걸 봐서 레나가 내가 공격당한 소리를 듣자마자 둘을 순식간에 제압한 것 같았다.
"이래서 나는 정말, 명문이라는 것들이 싫어. 사람 죽이는데 명문이 어딨어, 응?"
그녀는 입꼬리를 올린 채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갑작스런 심박동의 증가에 옥스턴씨와 나의 팔찌가 동시에 진동했다. 그만해요,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지만 그녀의 손 끝은 차디찼다.
"센티넬 하나 관리 못하고 남이나 헐뜯는 명문 가이드나, 가이드 하나 편히 못 두고 질질 열쇠고리처럼 달고 다니는 센티넬이나 다 똑같은거 아ㄴ.."
렉스의 얼굴은 붉다 못해 보라색으로 변하고 있었고 레나의 얼굴은 점점 표정이 없어져가는 것 같았다.
내가 그녀의 손을 잡았음에도 그녀는 진정하지 못했고, 나는 그녀의 감정을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가슴에 안듯 그녀의 팔을 꼭 안았다.
팔을 안음과 동시에 맨 손으로 전깃줄을 잡은 듯 깜짝 놀라 팔을 뿌리칠 뻔 했다. 하지만 그러한 본능을 억누르듯 더 세게 팔을 껴안았다.
짜증, 분노, 걱정, 내 것이 아닌 감정들이 가슴으로 전해져왔다. 이것이 가이딩이구나.
덕분일까, 그녀의 말이 점점 잦아들고, 손에서 힘이 풀어졌는지 바닥에 렉스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컥컥거리는 그의 숨소리는 나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보다 지금, 이렇게 그녀가 내 손짓에 진정을 한다는 것이, 그리고 낯선 감정이 전달되는 신기한 느낌이 더 강렬했다.
"...송하나씨?"
그녀의 입에서 격식을 차린 호칭이 나왔다. 하지만 그 호칭을 부를 때의 언니의 감정은 달랐다.
"레나 옥스턴씨, 지금 당신은 제가 다칠까봐 걱정했었고, 이들 때문에 짜증이 나고 화도 났었어요. 지금 레나 당신은 부끄러워 하고 있네요."
<가이드의 임무>
가이드는 센티넬의 감정을 파악해서 그들의 감정을 표현해준다. 이로서 이들은 자신의 미미한 감정을 더 잘 느끼게 된다.
*
징계는 삼일동안 근신하는 것, 나 뿐 아니라 렉스와 빅터에게도 동일한 징계가 적용되었다.
옥스턴씨에게는 가이드가 신체적인 위협을 당했기 때문에 어떠한 징계도 내려지지 않았다. 다만 교무실에서 나오자 레나의 모습은 오간데 없었다. 임무에 간다는 간단한 쪽지 하나만이 남아 있었다.
방금 그 사람의 마음을 알게 된 것 같았는데, 처음으로 마음이 통한 것 같았는데, 부끄러워 하는게 나랑 별 반 다르지 않았어.
그런 사람이 전투에 나간다고 생각하니 괜히 가슴이 아팠다. 어디 한 곳이 다치질 않았음 바랄 뿐이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아채고 나니, 그리고 내가 엉터리 가이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니 다음은 순식간이었다.
치글러 박사님에게 전화해 언니가 올 경우, 큰 상처가 아니라면 치료를 거부해 달라고 말했다.
우리 사이에 뭔가 해결해야 할 큰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안내자(Guide)로서 이를 해결해야만 한다.
**
"옥스턴씨. 실제로 날 만나니 별로에요?"
"아뇨... 그건 아닌데..."
옥스턴씨는 현관에서 들어오지 못한 채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몸에는 이곳저곳 생채기가 나 있다. 마음이 좀 아프긴 하지만 쇠뿔을 단 김에 빼듯 나는 현관에서 비키질 않았다.
내가 서 있는 곳은 현관부터 연결된 시각장애인용 점자 블록 위이다. 이 사람이라면 날 피해서 갈 수 있겠지만, 오늘 같은 날에 나를 피할 기분은 들지 않을 것이다.
"솔직하게 말해줘요. 내가 별로면 위에 보고해서 다른 가이드를 찾아야죠, 저는 레나씨에게 폐를 끼치는 가이드가 되고 싶지 않아요."
"절대 그런거 아니에요!"
옥스턴씨가 덥썩 내 손을 잡는다. 그 손을 통해서 그녀의 당혹스러운 감정들이 스며든다. 이때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나는 반대손으로 내 손을 잡은 레나씨의 손을 꽉 쥔다.
그녀가 손을 빼려고 하지만 힘이 강하지는 않다.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은 채 이야기한다.
"레나씨, 당신은 지금 매우 당혹스러워하고 있어요. 지금, 내 입에서 감정이 표현되니 매우 부끄러워 하고 있구요. 그게 아니라면 지금 왜 당신은 나를 피하고 있나요? 나는 당신의 가이드인데요?"
"하나씨가 저를 무서워할까봐요. 저는 무서운 센티넬이니까 천천히 다가가려고 했어요."
내가 그녀의 이마에 살짝 꿀밤을 놓는다. 그리고 앙겔라씨의 조언대로 그녀에게 말한다.
"이봐요, 옥스턴씨. 그게 배려라는 거에요. 근데 이번건 쓸데없는 배려였네요. 저는 당신의 가이드고, 그걸 위한 책임을 지려고 왔어요.
무서워할까 겁이 났으면 차근차근 얘기를 해야지 왜 도망을 가요? 이런 센티넬이면 하나도 겁 안나요."
그녀의 입이 살짝 벌어진다. 심장 박동이 빠르게 올라가는지 우리의 팔찌에서 동시에 삑, 하는 경고음이 들린다.
정말? 그녀는 지금 기뻐하고 있고, 부끄러워하고 있고, 놀라고 있다. 내가 그 말을 전달하자 한번 더 팔찌에서 경고음이 들린다.
일단, 몸부터 치료합시다. 그리고 우리 함께 친해질 시간을 가져요.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거실로 향했다.
"아, 레나씨. 아까 그 자기라는 호칭은 뭐에요?"
"그거, 급해서... 그리고 제가 하나씨를 그렇게 불렀어요."
"우리 이제 만난지 한달도 안 되었는데 언제 그렇게 불렀어요?"
옥스턴씨가 이상한 소리를 한다. 한참을 바라보는데 그렇게 불렀는데... 라고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 안절부절 못하는 강아지 같아서 퍽 귀엽다.
그래, 이왕 파트너 관계인데 이왕이면 부드러운 호칭이 좋지 않을까.
"그래요, 엄청 낯뜨겁고 소름 돋는 호칭이긴 한데, 그 호칭이 익숙하면 그렇게 불러 주세요. 저는 어떻게 불러 드릴까요? 어떤 호칭이 편하세요?"
뒤에서 옥스턴씨가 우뚝 멈춰선다. 긴장을 했는지 입술만 달싹이고 있기에 괜찮다고 대답을 재촉했다.
"...언니, 라고 불러주세요."
영국인에게서 한국 호칭을 듣자 더 놀란건 내쪽이었다. 어떻게 알아요? 라고 물어봐도 아까와 똑같이 '자기가 나를 그렇게 불렀어.' 라고 답한다.
은근히 말도 빨리 놓는게, 내가 먼저 다가간 것이 퍽 마음이 놓였나보다.
쇼파에 앉혀 놓으니 긴장이 풀렸는지 스르르 옆으로 엎어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구급상자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구급상자를 가지러 가니 내 손을 붙잡는다.
"자기, 어디 가. 가지 말고 여기 있어."
원래 이렇게 부르고 싶었던건지, 아니면 적응이 빠른건지. 언니는 오래전부터 나와 알고 지냈던 사이처럼 나를 불렀다.
"구급상자 가지러 가요. 손등의 상처가 생채기 수준이 아니에요."
"자기가 안아주면 나을거 같은데..."
닭살돋는 소리를 하는 언니를 뒤에 두고 나는 다용도실로 향한다. 원래 저 사람의 성격은 저렇게 쾌활한 것 아니었을까. 입가가 느슨해지는건 어쩔 수 없다.
***
하나야. 꼬맹아. 자기야...
발치에 있는 쿠션을 집어들어 얼굴에 부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간질거리면서 웃음이 나온다. 팔찌와 함께 찬 시계의 눈금을 확인한다. 그리고 손을 더듬어 달력도 확인한다.
분명이 나는 지금 현재에 있다. 이건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이다.
그녀가 현재 시간에 나를 언니라고 불러주고 있다. 그리고 나도 그녀에게 어떠한 격식도 없이 하나야, 자기야, 라고 부른다.
토끼가 먼저 나에게 다가와줬다. 정말 미래의 그 날처럼, 현재에서 그녀가 내 것이 되어가고 있다.
"하나야, 좋아해..."
나는 그녀의 등에 대고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해놓고 나니 또 가슴이 간질거려 쿠션을 팡팡 쳤다.
그녀가 올까 쿠션을 머리에 대고 누웠다. 조금 더 태연하게, 태연하게 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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