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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워치/트레디바트레

Legacy - 5

느릿하게 눈을 뜬다. 창 밖은 아직 어둡다. 소리를 들어보니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언니가 없는 침대가 써늘해 몸을 일으킨다. 이불이 내 몸에서 미끄러져 내리자 내 몸이 적나라하게 보인다.


"성대하게도 하셨네요, 옥스턴씨."


쉰 목소리가 어제의 일을 말해주는거 같아 부끄럽다. 온 몸에 언니의 입술자국과 잇자국이 남아 있다. 몇 군데는 멍이 들 거 같다. 돌아가면 한동안 긴팔을 입어야 할 거 같아서 짜증도 나고 부끄럽기도 하다.


"자기 일어났어?"


몸의 이곳저곳을 살피고 있는데 언니가 나를 부른다. 언니의 목소리도 쉬어있다. 고개를 들어 언니를 보니 속옷 차림의 언니가 문에 기대 서 있다. 언니의 몸도 내 몸과 다를 바가 없다.


"언니도… 긴팔 입어야겠네요."


응? 하고 언니가 몸을 내려다보더니 깔깔거리며 웃는다.


"뭐 어때, 약혼한 사이인데 이상할 것도 없지. 나 돌아갈땐 핫팬츠에 나시티 입고 갈까?

약혼은 연하랑 하는거라고 모두에게 자랑하는거야."


저 언니가 또 붕붕 날고 있구나. 날파리같이 허공을 나는 언니를 가라앉히기 위해 베개를 집어던진다. 하지만 역시 언니는 가볍게 손으로 베개를 잡아낸다.


"그렇게 다 노출할거면 아예 나도 벗기지 그래?"


"자기는 너무 예쁘니까 사람들이 훔쳐볼거라서 안돼."

언니가 말도 되지 않는 소리를 하며 옷장을 연다. 옷장에서 긴 가운을 꺼낸 언니가 나에게 옷을 건넨다.


"점심 먹게 입어."


"점심?"


"응. 벌써 오후 2시야. 어떻게 하루종일 자냐. 몇번은 와서 숨 쉬나 확인해보고 몇번은 깨울까도 했어. 근데 하도 달게 자니 그냥 내버려뒀지."


우리 자기 몸매도 좋아. 몸에 빨갛게 자국이 나니 더 섹시한데? 입으로는 쉴새없이 헛소리를 내뱉으면서도 언니는 내 팔에 가운 소매를 끼워주고 끈까지 묶어준다.


"언니 기분이 엄청 좋은가봐?"

언니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자 나도 같이 기분이 좋아져 묻는다.

"그럼. 어제가 지나갔고,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고. 또…"

언니가 손 끝으로 내 손에 끼워진 반지를 훑는다.

"송하나양이 정식적으로 내 약혼녀가 되었으니까. 이제 누구에게 뺏길 걱정 안하고 느긋하게 먹어도 되잖아."


약혼반지를 괜히 받았어. 이 언니의 미친소리의 수위가 엄청나게 높아졌다. 말로는 점심을 먹으라면서 언니는 내 쇄골이며 어깨를 손으로 쓴다.

금새 눈가가 붉어진 언니를 보니 두근대기도 하지만 덜컥 겁이 난다.

"...언니, 하고싶어?"


말 없이 언니가 키스를 하며 나를 뒤로 쓰러뜨린다. 자, 잠깐!


"점심! 점심 먹어야지!"


"쉿. 한번만.. 점심 다시 차려줄게."


***



"짐승도 아니고 이게 뭐야. 돌아가서는 다신 나에게 손 댈 생각하지 마."


시뻘개진 얼굴로 하나가 나에게 포크를 들이댄다. 그럼 돌아가지 말고 여기서 계속 하면 되지. 라고 맞받아치려다 나는 입을 다문다. 그럼 분명히 여기서도 손 끝 하나 대지 못하게 할거다.



**



아침에 눈을 뜨고 나서 확인한건 날짜였다. 분명히 하루가 지나간 것이 맞지? 여러번 휴대전화를 껐다 켜며 확실히 하루가 지나간걸 확인했다.


다 됐어. 이제 피한거야. 데자뷰? 예지몽도 좋을 때가 있네. 덕분에 더 좋은 결과를 냈잖아? 엎드린채 자고 있는 하나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그녀의 손에 끼워진 반지. 어머니의 유품. 아버지는 어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하셨다.

자동차 사고에 의한 두분의 죽음. 차체를 알아볼 수 없는 사고로 두 분은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시신은 알아볼 수 없을만큼 훼손되었지만 어머니는 마치 잠을 주무시는 것처럼, 흠집 하나 없는 모습으로 나에게 돌아왔다.


그런 어머니께서 죽기 직전까지 끼고 계셨던 반지. 아버지께서 평생 지켜주겠다고 약속하시며 어머니에게 끼워준 약혼 반지.


아버지는 어머니와 한 그 약속을 지키셨다. 비록 목숨을 지키지는 못하셨지만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키기 위해 본인을 희생하셨다. 


나도 너를 지켜줄게. 하나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손으로 만지며 중얼거린다.

끝까지 널 지켜줄게, 꼬맹아.



**



포크를 든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보며 옛 생각을 했다.

듣고 있어, 언니? 또 딴생각하지! 하나가 볼을 부풀리며 나에게 소리를 지른다.


"알았어. 앞으로는 자국 안 남길게. 그걸로 봐줘."


하나가 한마디를 더 하려다가 입을 다문다.

그렇게 웃으며 말하는데 제가 어떻게 이겨요. 변태언니.


그런 그녀가 귀여워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를 깨듯, 밖에서 폭음이 들린다.

물잔이 쓰러질까 꼭 잡는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 둘의 휴대전화가 울린다.



***



<런던, 영국. 옴닉의 폭주. 런던에 있는 요원들은 사태 진압 요함.>


짧은 문자 메세지를 우리는 말 없이 바라본다.

어서 나가야지. 하고 거실로 가 가방을 뒤진다. 호출기와 헤드셋. 호출기로 메카를 부르려 하자 언니가 내 손을 막는다.


"하지마."


"응?"


"하지 말자고. 그냥 핸드폰이 꺼져 있었다고 하자. 내가 꺼놓았다고 할게. 우리가 약혼을 해서, 흥분해서. 그래서 내가 꺼놓았다고 할게."


"무슨 소리야 언니, 언니 지금 이상해."


"제발, 자기야. 언니 말좀 들어!"


언니가 거칠게 내 팔을 잡고 흔든다. 손에서 호출기가 떨어진다. 


<메카 호출 완료.> 라는 문구가 잠시 뜨는가 싶더니 지지직거리며 꺼진다. 호출기를 들어올려 몇번 흔들어 보지만 잠잠하다.


충격을 받은듯한 언니를 뒤로하고 가방에서 언니와 나의 전투복을 꺼낸다.

그제 꿨다는 꿈 때문이겠지. 내가 죽었다는데 얼마나 무섭겠어.

하지만 언제까지고 피할 수는 없다. 내가 언니를 지켜주면 되잖아.


"입고 나와. 이미 메카는 호출됐어. 우리가 이 문자를 받은걸 다 알거야.

괜찮아. 언니가 지켜줄거고, 나도 언니를 지켜줄거잖아. 우리는 약혼한 사이니까."



***



어릴 적, 데스티네이션이라는 고전 공포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한 사람들이 죽음의 손에 의해 어떻게든 죽는다는 내용이었다.


주인공들은 죽음을 부정하고, 회피했다. 그리고는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잔인하게 죽어가는 주인공들을 보며 갑갑하고 무력할거 같아, 라고 막연히 생각을 했다.



지금 내가 그렇다.

갑갑하다. 무력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꿈과는 다르다. 나는 꿈에서 일어날 일들을 모두 회피해 지금 이곳까지 도망쳐왔다.

하지만 꿈과 같게 이루어지고 있다. 아침에 하나가 꿈 속에서와 같은 손가락을 베었고 지금, 하나가 사용할 수 있는 메카는 꿈 속에처럼 단 한대뿐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거울 속 나에게 묻는다. 좌절에 절여진 내 얼굴이 화가 나 다시 한번 묻는다.

대답해줘, 레나 옥스턴.



-언니가 지켜줄거고...-



그 말 한마디가 왜 지금 생각나는 걸까.

물끄러미, 손에 들린 휴대전화를 본다.



***



전투복으로 갈아입은 언니가 화장실에서 나온다. 낯빛은 아까와 같이 파랗지만 눈에 힘이 들어가 있다.

아무 생각 없는 눈빛은 아니니 걱정은 조금 덜었다.


언니에게 다가가 언니를 꼭 안아준다.


"우리 언니. 꿈 때문에 이렇게 불안해하고.. 괜찮아."


"하나야."


"응?"


"하나야, 내가 너 정말 사랑하는거 알지?"


그게 무슨 소리야, 진지한 언니의 목소리에 웃음이 나오려는걸 참는다. 대신 그만큼 언니를 더 꽉 안아준다.

겁쟁이 언니. 사람들은 오버워치의 영웅, 트레이서가 이런 겁쟁이라는걸 알까.


"그럼, 언니가 날 사랑한다는거 늘 알지. 그리고 언니가 겁쟁이라는것도 알고."


언니가 품에서 나와 나를 바라본다. 한참, 시간이 멈춘 듯 날 바라보던 언니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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