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버워치/트레디바트레

첫 걸음 - 2

신쿤(@nerf171)님의 썰을 기반으로 작성했습니다. : http://sinkoonote.tistory.com/21

------------------------------

방으로 들어오자 보기 싫은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의 얼굴을 보자 어제의 일까지 생각나 기분이 더 더러워졌다.


"당신 바보야? 아니면 귀머거리야? 왜 사람이 말을 하면 안들어? 난 당신이랑 말도 섞고싶지 않고 얼굴도 보고싶지 않아."


"나는 레나 옥스턴이야. 반가워."


내 말을 어디로 들었는지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다. 방을 치웠던 것일까? 나가기 전보다 방이 미묘하게 더 깨끗해진 느낌이 든다.


그것조차도 날 더 비참하게 만든다. 차라리 밖으로 다시 나가려고 휠체어를 돌린다.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어서 저 여자에게서 벗어나고 싶다.


미닫이 문을 열려 하는데 문이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 여자가 문을 잡고 있다.


"비켜줘요."


"나랑 얘기 좀 해. 5분, 아니 3분이면 돼."


그녀와 눈을 마주친다. 내 얼굴이 단단히 굳어있을 것이 분명한데, 그녀는 나를 보고 씩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한번 더 소리를 지르고 싶지만 또 어제와 같은 추태를 보일 거 같아 결국 휠체어를 돌린다. 그녀가 나보다 앞서 나가 쇼파 위에 앉는다.


"송하나라고 했지? 나는 레나 옥스턴. 스물 여섯이야."


"3분이라고 했어요."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방 청소를 하는데 이게 나오지 뭐야? 이거 너지?"


그녀가 건넨 사진에는 경기에서 우승을 하고 트로피를 들고 있는 내가 찍혀 있다. 한창 전성기 시절의 내 모습.


보고 싶지 않은 나의 과거. 그녀의 손에서 사진을 빼앗아 찢으려 했다. 하지만 순식간에 사진은 그녀의 손에 들려 있었다.


뭐 하려는 거냐고 따져물으려니 그녀가 이번에는 다른걸 건넨다. 포장된 선물상자. 열고 싶지 않지만 그녀는 '시간이 없어, 자기!'라며 능청스럽게 말한다.


포장을 뜯자 나온건 휴대용 게임기였다.



***



"당신 지금 장난해?"


그녀가 상자 안의 게임기를 보자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나에게 소리를 지른다.


"당신 정체가 뭐야? 이제 본부에서 나 나가게 하래? 그래서 이런걸 나에게 주는거야?"


게임기를 벽으로 집어던진다. 하지만 그보다 빠르게 나는 그걸 잡아낸다.


"자기, 이거 엄청 비싼거야. 그렇게 집어던지진 말았으면 하는데."


"본부에서 날 내쫓을 명분은 없으니 나더러 나가라는 거야? 그래서 이렇게 비겁하고 더러운 술수를 당신에게 시킨거냐고?"


"당신이 아니고 레나야. 레나 옥스턴."


"지금 당신, 내 앞에 있었으면 엄청 맞았을거야. 나 지금 당신에게 침을 뱉고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


본부에다가 전해. 내일 당장 나가주겠다고 그러니까 그런 쓰레기같은 술수는 그만 두라고 해."


숨을 들이마신다. 이제부터는 그녀에게 날 선 소리를 해야할수도 있다.


"침을 뱉고싶음 지금 뱉어. 때리고 싶음 지금 이리 와서 때리고. 본부에 가고 싶어도 네 발로 가.

입만 나불나불... 가시를 세우려고 해도 적당히 세우라고."


그녀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버림받았다고 생각하지? 공주님처럼 네에네에 떠받들여지다가 바닥에 떨어지니 아파? 그렇다고 그렇게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만 있을거야?


오버워치에서는 절대 널 죽게 내버려두지 않아. 지금 이 방을 둘러봐. 날붙이가 될만한게 있는가 보라고.


네가 아무리 목을 졸라도, 손목을 그어도 그들은 널 어떻게든 살려낼걸? 그렇게 넌 바닥에서 질척질척, 욕만 먹고 있을거야.


일어나. 다시 걸어다닐 수 있을 기회가 한가닥이라도 있으면 붙잡고 일어나. 그 후에 너에게 상처를 준 자식들에게 다 한방씩 먹이라고.

지금 네가 찔러대는 가시는 아프지도 않으니까."



듣는 소리가 가슴을 쿡쿡 찌른다. 더 이상 들을 수 없어 휠체어를 돌리려 한쪽 바퀴를 강하게 돌린다. 힘조절을 잘못 해서일까, 휠체어가 넘어지며 옆으로 구른다.


비참해. 비참해서 죽고싶어. 벌거벗은 듯 수치스러워 고개를 들 수 없어. 손등으로 눈물이 한 방울 뚝 떨어진다.


울면 안되는데, 어쩔 수 없이 눈물이 나온다.


이를 악물고 우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 하는데 바닥에 그녀의 신발이 보인다.

그녀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는다. 눈 앞에 아까 그 사진을 보여준다.


"이거 봐. 넌 이렇게 아름다워. 하찮은 사람들의 입방아에 자기가 이렇게 허물어지는게 너무 가슴아파.


자기는 혼자가 아니야. 내가 도와줄게. 자기가 다시 일어나서 이 모든 사람들에게 엿을 날릴 수 있도록 내가 도와줄게.

그러니까 나한테만은 가시 내려도 돼. 약한척 해도 되고 울어도 돼."


그녀가 나의 어깨를 안아준다. 몸에서 힘이 빠진다. 가슴에서 무언가가 올라온다.



***



한참 아이는 바닥에 주저앉은채 엉엉 울었다. 그리고 난 그 아이가 울음을 그칠때까지 가만히 어깨를 안아줬다.


아이의 울음에서는 그동안의 서러움, 비참함, 아픔이 느껴졌다. 열아홉 아이의 울음이라고 하기에 너무 서글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끄윽 끅, 얼마나 울었을까. 아이는 눈물을 그치고 그제서야 고개를 들었다.


"...옷 미안해요."

예상치 못한 첫마디에 옷을 내려다보니 눈물과 콧물이 범벅된 셔츠가 나타났다. 처음으로 보이는 아이다움에 웃음이 났다.


"자, 여기있으면 추워. 옷에 먼지 다 묻었겠다."

그녀의 무릎 뒤에 팔을 끼워 안아들었다. 생각보다 아이는 훨씬 가벼웠다. 내 품에 기댄 아이의 손목에는 여러 줄에 흉터가 나 있었고, 엄청나게 야위었다.


아이를 침대에 내려놓고 서랍에서 환자복 바지 하나와 티셔츠를 꺼낸 후 휴지를 들고 왔다.


"흥 해줄까?"


"흥은 제가 할 수 있어요." 아이가 손에서 휴지를 빼앗아 들고 코를 풀었다. 처음보다 날이 무뎌진 목소리에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아, 바지는..."


"바지도 제가 입을게요. 당신도 티셔츠 입어야 하니까 등 돌려요. 됐다고 할때까진 등 돌리지 마요."

아이가 툴툴거리며 말한다. 창문의 커튼을 치고 등을 돌린채 티셔츠를 갈아입는다. 근데 잠깐...


"아, 당신 당신이 뭐야. 나는 레나야. 레나 옥스턴."


"레나..레나라고 부르란 거에요?"


"아니? 레나 언니."

네? 갑작스러운 한국어의 등장에 아이가 놀란듯 물어본다. 툴툴대는 기운이 빠진 그녀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어려보인다.


"한국에서는 나이 많은 여자를 언니라고 한다며. 앞으로 내가 자기를 쭉 돌볼거니까 언니라고 해. 레나언니.

이제는 언니라고 안하면 대답 안할거야."


하나의 대답은 없다. 그저 옷을 갈아입는지 천이 사락거리는 소리만이 들린다.


"저기요..."


나는 대답을 무시한다. 그 후로도 저기, 레나씨, 당신, 미스 옥스턴 등 다양한 호칭이 나온다.


"...언니.."


기분이 좋아져 고개를 확 돌린다. 그녀의 바지는 허벅지에 걸려 더 이상 올라가지 않고 있다.


"언니.. 바지 좀 올려주세요."


빨개진 얼굴로 아이는 나에게 중얼거린다. 그래그래, 착하네. 나는 어서 달려가 아이를 일으켜세워 바지를 올려준다. 꼬맹이의 얼굴이 점점 더 빨개진다.



옷 입는걸 도와준 것이 계기였을까. 꼬맹이가 잠 잘 준비를 모두 마치는걸 확인한 후, 돌아가려는 나의 소매를 그녀가 잡는다.


"오늘, 같이 자면 안돼요?"

 


***



여태 나 혼자 쓰기에는 넓은 침대. 하지만 언니와 함께 누우니 다소 좁은 느낌이 든다.

나란히 누워서 잘까 하다가 결국 언니는 나를 보고 모로 눕는다.


침대에 누군가와 함께 누워 본 기억이 없어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 때 언니가 나를 부른다.


"하나야."


언니가 나의 본명을 부른 적은 거의 없다. 꼬맹아, 아니면 너. 이름을 부르는걸 봐서 진지한 얘기를 하려고 하나 보다.

언니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어둠 속에서도 언니의 눈이 빛난다.


"내일부터 재활훈련 하자. 다시 걸을 수 있을거야.

의사들에게 물어봤는데 늦은 만큼 힘들긴 하겠지만 많이 노력하면 예전처럼 걸을 수 있을거래.


난 하나가 예전의 그 멋진 모습을 찾길 바라. 그러니까 재활훈련 하자. 언니가 옆에서 도와줄게."


언니는 다정하게 나의 머리를 쓸어준다. 대답을 하기 부끄러워서 괜히 이불을 들어 얼굴을 덮는다.


하는거지? 언니의 질문에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인다.


착하네 우리 하나. 언니 말도 잘 듣고. 언니가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천천히, 일정한 박자로 등을 토닥여주니 천천히 잠이 온다.


그렇게, 나는 오랜만에 악몽 없는 잠을 잤다.

'오버워치 > 트레디바트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첫 걸음 - 4  (0) 2016.08.14
첫 걸음 - 3  (0) 2016.08.14
첫 걸음 - 1  (0) 2016.08.14
첫 걸음 - Prologue  (0) 2016.08.13
Legacy -Epilogue  (2) 2016.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