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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워치/트레디바트레

첫 걸음 - 3

신쿤(@nerf171)님의 썰을 기반으로 작성했습니다. : http://sinkoonote.tistory.com/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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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비비며 시계를 본다. 오전 7시. 옆에 누운 꼬맹이는 아직도 자고 있다. 어제 하도 울었기 때문일까, 눈이 부은 것 같기도 하다.

꼬맹이가 깨어날까 조심스럽게 아이의 얼굴을 잡아 베개에 눕힌다. 어디에 파고들어 자는 것이 버릇이었을까, 내 팔을 베고 허리에 손을 얹은 아이가 깨지 않게 옆에 눕히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꼬맹이는 안기는게 없어 허전한지 낑낑대며 두 팔로 무언갈 찾는다, 이크크. 깰 것 같아서 다급하게 베개를 하나 안겨준다. 더듬더듬 손으로 베개를 눌러보더니 다시 잠을 잔다.

'생각보다 아이같구나.' 어제 나에게 앙칼지게 소리치던 모습과 다른 모습에 웃음이 난다.

아이가 깰까 조심조심 씻은 후, 잠시 숙소에 들려 내가 한동안 입을 옷가지와 필요한 서류 등을 챙겨온다.
내가 짐을 가지러 갔다 온 사이에도 그녀는 아직 꿈나라를 여행 중이다.

옷장을 열어 내가 입을 옷을 정리한다. 그러며 아이의 옷들을 슬쩍 본다.
'옷들' 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구성. 반팔 티셔츠 몇장, 긴팔 셔츠 몇장, 긴 바지 몇개가 전부다.

사이즈도 지나치게 큰 것을 보면 1년 사이에 꼬맹이가 엄청나게 마른 것을 짐작하게 된다.
꼬맹이의 옷 옆에 내 옷을 걸고, 랩톱과 서류뭉치를 테이블 위에 둔다.

곧 있으면 조식이 올 시간. 그 사이에 짬을 내 서류를 넘겨본다. 재활 환자를 간병하기 위한 여러 지침이 있는 가이드라인이 적혀 있다.
가장 첫 페이지를 열어 다리 마사지를 하는 사진을 유심히 본다.

조식을 배달하는 직원이 문을 두드리려 하기에 내가 먼저 가서 받는다. 식사를 서류뭉치 옆에 두고 꿈나라에 가 있는 토끼를 깨우기로 한다.

내가 이것저것을 하는 사이에 아이는 이불과 베개를 자신의 몸에 칭칭 감고있다. 아예 이불을 걷어낼까 하다가 다리를 덮은 이불을 위로 올린다.

다른 부위보다 앙상한 다리. 과장하자면 팔뚝보다 얇을 거 같다. 어제 아이의 팔을 봤을때 근육이 어느 정도 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다리에는 거의 근육이 없다.

발목부터 종아리까지, 부드럽게 다리를 주무른다. 발바닥을 두 손으로 잡아 다리쪽으로 올린다.


*


10분에서 20분 쯤 주물렀을까. 끙끙, 아이가 잠이 슬슬 깨는지 목구멍 안에서 소리를 낸다.

"토끼야, 아침밥 먹어야지. 일어나."

"응? 응... 응? 으응..."

눈을 떠 멍하게 허공을 보다 쭈우욱, 양 팔을 위로 올려 기지개를 한다.
눈을 아래로 내려 내 얼굴을 본다. 아직 상황파악이 안된듯 멍한 눈. 현실과 꿈의 경계에 걸쳐있는듯한 모습이 재미있다.
다시 한번 천장, 창문 밖, 그리고 내 얼굴을 보더니 그녀의 눈이 점점 커진다.

"다...당...당시."

"언니."

"당신..."

"언니라고."
차분히 호칭을 정정해주자 아이의 얼굴이 점점 빨개진다.

"...언니가 여기 왜 있어요?"

"왜 있긴. 말했잖아. 토끼 재활치료가 당분간 내 임무라고. 그리고 어제 자기가 나와 함께 자자고 먼저 소매를 잡아끈걸?"

능청스럽게 대답하며 토끼의 발목을 뱅글뱅글 돌리고 위로 올린다. 힘 없는 근육들이 나의 손짓에 이완되고 수축된다. 어서 너희들도 힘을 가져서 저 입처럼 톡톡 쏘아붙여보지 그래?

아이가 몸을 뒤로 빼지만 내 손에 잡힌 발목은 그자리에 고정되어 있다. 얼굴이 빨개져 조용히 나의 손짓에 몸을 맡긴다.


*


아침 식사는 카레, 어제 방에 들어오기 전에 연락을 해서 아이와 나의 식사를 침대 테이블에 올린다.

환자식이라 약간 밍밍한 경향이 있는 음식, 하지만 음식을 가리는 습관은 없기에 숟가락을 놀려 순식간에 접시를 비운다. 먼저 물을 마시며 아이의 식판을 본다.

나보다 한참 느린 식사속도, 입맛이 없는걸까. 숟가락을 솜씨좋게 놀려서 조금씩 떠 먹는다. 아니, 솜씨가 지나치게 좋다. 자세히 보니 식판의 한 구석에 당근이 쌓이고 있다.
반도 채 못먹었을까, 아이가 숟가락을 놓는다.

"자기는 당근 싫어하는거야? 의외네."
"...향이 진해서요."
"흐응, 토끼같이 생겨서 당근을 싫어한다니 뭔가 웃기기도 하고… 그것만 먹고도 되겠어?"
"별로 먹고싶은 마음도 없었어요."

음. 그정도만 먹으면 붙으려는 살도 도망가겠는데. 더 먹이고 싶지만 잘못해 탈이라도 날까 싶어 그만둔다.

토끼같다는 말에 심통이 났을까. 아이는 입을 내밀며 다시 숟가락을 집어들어 당근을 있는대로 난도질을 하고 있다.

"당근에게 화풀이를 하지 말고. 식판 내놓고 올게."
화 안냈거든요? 아이가 등 뒤로 나에게 소리를 지른다. 귀여운 아이네. 이 녀석과 있으니 계속 웃음이 난다.


**


씻고 와, 물리치료실 가게.
언니가 나를 안아들어 휠체어에 앉힌 채 화장실로 간다.

화장실에는 간병인용 세면대와 그보다 훨씬 낮은 환자용 세면대가 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언니가 내 뒤에서 이를 닦는다.

이를 닦고 세수를 하며 언니를 흘끔, 엿본다. 뭐가 기분이 좋은지 치약거품을 입에 묻힌 채 언니는 나에게 씩 웃어준다.

아…

"저, 언니. 잠깐 나가주면 안되요?"
언니가 칫솔을 입에 문 채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 그냥 좀 나가줘요!"
나에게 호의를 보인 사람에게 짜증을 내는게 미안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바락, 소리를 지르고 언니의 등을 밀어 밖으로 내보낸다.

언니가 오기 전에 빨리 해야 한다. 변기 옆 손잡이를 잡고 몸을 일으킨다. 마음이 급해서인가, 앗 하는 순간에 손을 놓친다.

"자기! 무슨 일이야!"
놀란 언니가 벌컥 문을 밀고 들어온다.


***


우당탕 하는 소리가 들려 황급히 문을 밀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미끄러운 화장실 바닥에서 넘어졌다가 꼬맹이가 더 크게 다칠 수도 있다.

꼬맹이의 한쪽 팔이 변기 안에 빠져있다. 상체의 반은 변기 안에, 그리고 남은 반은 변기 옆의 손잡이에 매달려 있다.

"나, 나는 괜찮으니까 나가줘요. 언니."

쓸데없는 도움은 오히려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녀를 도와야 하는가, 아니면 돕지 말아야 하는가.
도와야 한다면 어떻게 도와줘야 최대한 자존심을 지켜줄 수 있을까. 나는 짧은 시간 안에 엄청나게 고민했다.
"야, 이정도 일이면 말을 하지. 샤워를 하고 싶다고 색다르게 어필하네 우리 자기."

나는 아무렇지도 안은 듯 아이를 안아들고 바지와 속옷을 내려준다.
어, 언니! 아이가 당황한듯 소리를 치지만 최대한 빠르게 옷을 벗겨주고 변기에 앉혀서 등을 돌린다. 아, 소리…

또 필요하면 말해! 나는 아이를 화장실에 두고 나와 문을 닫는다.

잘 한 행동일까. 아니면 실수일까. 겨우 꼬맹이가 나에게 마음을 열었는데, 다시 닫으면 어떻게 하지. 초조하다.

한참이나 지났을까. 입 속의 치약이 말라 비틀어질 지경이 되었을때 화장실 안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응, 자기 무슨 일 있어?"

"나 바지 좀…"
부끄러움이 잔뜩 묻은 아이의 목소리. 하지만 그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너무 고맙다.

"응, 갈게!"

아까처럼 꼬맹이에게 눈을 두지 않고 옷을 추스려준다. 그 새 물기가 아이의 환자복 전체로 퍼져나가 있다.
"자기 춥겠다. 물리치료실 가기 전에 옷 갈아입고 가자.기"

"샤워 하는거 도와줄래요?"

아이가 내 옷에 얼굴을 댄 채 웅얼거린다. 변깃물이 깨끗하다고 해도 찝찝하고.. 머리까지 튀었는데.. 부담스러우면 괜찮아요. 다른 활동 보조인에게 부탁하면 되니까.
아이가 빨개진 얼굴로 말한다. 나를 믿어주는구나.


***


욕조에 뜨거운 물이 가득 담겨있다. 몇일 전 처음 만난 사람 앞에서 옷을 벗는게 부끄럽다.
활동보조인들은 내 옷을 거침없이 벗긴다.

그들은 내 몸을 보면서 아무 생각이 없는 듯 했다. 세차를 하는 것? 고깃덩어리를 손질하는 그런 눈빛으로 빨리 나를 벗기고 씻겨야 한다는 생각만을 하는 듯 했다.

내가 먼저 단추를 풀어야 하나, 아니면 언니가 벗겨주는건가. 단추를 노려보며 한참 그런 생각을 할 때, 언니가 나를 가볍게 들어올려, 옷 채로 욕조에 넣는다.
"언니 옷은...요?"

"굳이 벗을 필요 없잖아. 나는 머리만 감겨주고 등 돌리고 있을게.
자기가 물속에서 옷 벗고 몸 씻으면 되잖아. 뭔 일 생기면 그때 몸 돌릴거니까. 걱정은 말고.
여기 큰 타월 옆에 둘테니까 대충 씻으면 이거 가져다 몸에 둘러. 옷을 입는건 그 다음에 하자."


얇은 손끝이 내 두피를 문지른다. 꼼꼼히 헹궈준 후에는 린스도 잊지 않는다.
꼬맹이 머릿결은 좋네. 색도 예쁘고. 언니는 흥얼거리며 칭찬을 한 후 몸을 돌렸다.

다행이도 무사히 바지를 벗고 씻을 수 있었다. 타월을 감싸고 언니를 부르자 개운하지? 라며 나에게 장난을 친다.

옷이 젖을텐데… 언니는 개의치 않고 젖은 타올채로 나를 침대에 올려놓는다. 여러 장의 수건, 깨끗한 환자복을 올려놓은 언니는 '샤워하고 올게. 웃옷만이라도 입고 있어. 바지는 안되겠음 내가 입혀줄게.' 라고 말하며 씻으러 들어간다.

처음 받는 인간적인 대우. 환자가 아니라 인간으로 대접받는 기분에 가슴이 따뜻해진다.
문득 내 다리에 눈이 간다. 마른 나뭇가지 같은 다리.
손을 뻗어 발 끝을 꼬집는다. 아프다.

-아프다는건 신경이 살아있다는 뜻이에요. 하나양이 노력한다면 걸을 수 있어요.-

-예전의 그 멋진 모습을 찾길 바라. 언니가 옆에서 도와줄게.-

언니는 날 귀찮아하지 않는 것 같다.
언니가 원하는건 뭘까? 전투에 나가는 메카 조종사? 아니면 예전의 나?
옷의 단추를 잠그며 화장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를 가만히 듣는다.
 
걸어보고 싶다. 그래서 물어보고 싶어. 언니는 내가 어떤 모습이 되길 바라나요?
오랜만에 뭔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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