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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워치/트레디바트레

[500팔로워 기념 이벤트]공과 사(현대 AU)

빗토(@bitto)님을 위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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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말 좀 해봐요. 어떤 사람이 제일 나아요?"


쿵쿵쿵, 머리를 박는 소리와 함께 우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어째서 우리 회사같은 중소 출판사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지원한거죠?"


"그거야 레나 당신이 최근에 괜찮은 동화작가 하나를 발굴해냈기 때문이죠."


땅콩버터를 크래커에 듬뿍 바르며 윈스턴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덕분에 우리는 사훈에서 벗어나 힘들게 일을 했지만.' 이라고 덧붙이는 그는 묘하게 즐거운 듯 했다.


"진지하게 누구를 뽑으라고 한다면 저는 이 사람을 뽑고 싶은데요..."


"하지만 그 사람은 사장님이 불편해 하는 사람이잖아요."


진지하게 한 사람의 이력서를 추켜드는 파리하의 손을 가볍게 앙겔라가 막아선다. "사장님"이라고 강조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도 유쾌함이 묻어 있다.


"모두들 이 사람을 뽑길 원하나보죠? 회사의 지분을 꽤 많이 가지고 있으니 성실하게 직원 채용에 임해주세요. 이사님들."


"사장 포함해서 넷 밖에 없는 회사에서 무슨 이사님이야. 거기다가 최대 지분은 옥스턴 사장님이 가장 많이 가지고 계시잖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누누히 이 사람을 뽑길 원했어요. 거절하는건 사장님 당신이죠."


윈스턴의 진지한 목소리에 파리하와 레나를 제외한 모두가 낄낄거리고 웃는다. 모두가 한 사람을 뽑길 원하고 있다. 단 한 사람, 회사의 사장을 제외하고. 그리고 그 한 사람도 내심 이 사람을 뽑고 싶어하는 것을 모두가 다 알고있다.


"걔랑은 공과 사를 구분하기 힘들거 같아서 그래, 윈스턴."


결국은 레나의 입에서 반말이 나와버린다. 하지만 모든 이사진들, 아니 모든 직원들의 마음은 한결같다.


"레나. 우리는 당신을 믿어요. 당신이 할 때는 하는 사람이잖아요? 당신은 이 일도 잘 처리할거에요. 봐요, 우리랑도 잘 하고 있잖아요."


앙겔라가 레나를 위로한다. 실은 앙겔라와 윈스턴, 두 사람은 레나의 대학교 시절 친구였다. 학과도 다르고 성격도 제각각인 그들의 접점은 레나 옥스턴이었던 사람이었고 레나 옥스턴은 앙겔라의 연인인 파리하까지 모아 작은 중소기업을 세웠다. 친구관계와 연인관계로 얽혀있는 작은 회사, 하지만 그 안에서 불필요한 감정 다툼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것은 레나 옥스턴의 대인관계기술 덕분이리라.

모두들 레나를 바라보며 격려한다. 걱정 마, 레나. 하나가 들어온다고 지금의 회사 분위기가 엉망이 되진 않을거야.

그들의 말이 격려가 되었을까. 평소보다 수백배는 더 헝클어진 머리를 한 레나가 고개를 든다. 비록 머리는 헝클어졌지만 그녀의 입꼬리는 결의로 단단하게 굳어 있다. 그녀는 맥주잔을 집어들고 쭉 마신다.


"그래요. 모두가 함께 일하는 회사인데, 모두의 뜻을 따라야죠. 공은 공, 사는 사."


레나의 다부진 목소리를 들으며 모두는 새로 올 직원을 환영하며 다시 한번 더 잔을 든다. 하지만 그들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레나가 공과 사를 구분한다는 것을 얼마나 무거운, 그리고 고지식한 의미로 받아들였는지를.


**



"술 마시고 왔네?"


하나가 레나의 외투를 받아들며 킁킁 레나 옷의 냄새를 맡는다. 레나는 말 없이 하나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씩 웃는다. 그러고는 품에 폭 파고들어 그녀의 어깨에 마구 얼굴을 부빈다.

이 언니가 또 그러네. 하나는 언니의 이런 행동이 익숙하다는 듯 함께 웃어주며 그녀의 등을 토닥거린다.


"오늘도 피곤했어?"


"아니. 그건 아니야. 그냥 자기 보니까 좋아서."


레나가 고개만을 돌려 하나의 볼, 볼에서 입술로 짧게 입을 맞춘다. 조금 더 입술을 맞대려 하자 하나가 먼저 뒤로 물러난다. '술냄새! 씻고 나서나 뽀뽀해.'


"아아. 씻기 귀찮다." 레나는 늘 그랬듯 쇼파 위로 벌렁 누워버린다. 셔츠 구겨지게! 라는 하나의 잔소리에도 쿠션을 끌어안고는 몸을 뭉갠다. 결국 하나에게 허벅지를 두어대 맞은 후에야 밍기적거리며 레나는 일어난다.


"아, 자기."


"응?"


씻으러 가던 도중, 레나가 뒤를 돌아 하나를 부른다.


"자기, 채용될거같아."


"정말?" 하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레나의 외투를 옷걸이에 건다. 하지만 그녀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가 있는 것이 기분이 좋은 내색을 미처 숨기지는 못하는 듯 하다.


"그래도 알지? 거기선 내가 사장이고 자기가 직원인거."

레나는 짐짓 눈에 힘을 주고 하나에게 당부를 한다.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 하나가 레나의 등을 욕실로 떠민다. 그런 하나를 레나가 다시 붙잡아 꼭 안는다.


"당연한 소리인데, 나는 잘 못할거 같아서. 우리 자기가 너무 이쁘잖아."


레나가 폭, 한숨을 내쉰다. 으이구. 정말 못 말리는 언니야. 그런 그녀의 뒤통수를 가만가만, 하나는 쓰다듬어준다.



***



"안녕하세요, 오늘부로 함께 일하게 된 송하나입니다."


사무실의 직원들 앞에서 고개를 숙이자 환영한다는 뜻의 박수소리가 가볍게 울려퍼졌다. 작은 사무실이다. 전 직원이 사장을 포함해 넷이나 될까. 그들 모두가 나에게 환영의 박수를 치고는 있지만 눈빛은 미묘하게 나와 내 옆에 선 사장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다.

언니의 손을 잡고 회사에 몇 번 온 적도 있기 때문에 그들과는 이미 구면이긴 하다. 모두들 호기심 강한 눈으로 언니가 나에게 어떻게 대할지 궁금해하고있다. 하지만 언니는 어제 이미 말했듯 공과 사를 지키자고 말을 한 터다. 그러면 나도 그런 언니의 뜻에 따라야지.


"네. 송하나씨는 앞으로 저희 출판사에서 같이 일하게 되실 겁니다. 일은 많을지 몰라도 6시 퇴근은 사장인 저도 어길 수 없는 불문율이기 때문에 보장해 드릴 수 있습니다."


언니가 웃으며 나의 인사를 받는다. 하지만 그 웃음은 평소에 나에게 지어주는 웃음과는 다르다. 눈꼬리가 다소 덜 처지고 눈도 덜 접힌 웃음. 그래, 사장으로서의 언니의 모습이다. 언니는 이미 "사장 레나 옥스턴"으로 변해 있다.

회사에서의 규칙은 몇 가지 안된다. 그 규칙들 중 가장 상위에 위치한 규칙이 "On time". 퇴근이던 마감이든 제 때에 하는 것이 이 회사의 철칙이다. 일은 많을지 몰라도 제 시간까지 노력해서 6시 전에 집에 갑시다. 언니는 웃으며 다시 한번 회사의 최상의 규칙을 상기시킨다.


"그럼 오늘도 6시 퇴근을 위해 모두 힘냅시다. 송하나씨도 오늘부터 열심히 일해주세요."


언니의 맺음말을 끝으로 근무시간이 시작되었다. 직원들이 하나에게 다가와 개인적으로 인사를 나누고 흩어진다. 그래. 오늘이 나의 첫 출근날이다.


자리에 앉으며 언니, 아니 사장님의 얼굴을 흘끗 본다. 평소 눈이 마주치면 장난스럽게 눈썹을 찡긋거리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그녀의 각진 안경알만이 모니터 불빛에 반사된다.



***



"송하나씨, <눈사람과 아기토끼>작가와의 미팅, 시간과 장소를 오늘까지 알려주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언니가 책상 너머에서 나를 바라본다. 그제 전화하자고 생각한 기억은 나는데? 황급히 책상 위의 서류들을 들춰본다. 서류를 들춰봐도 언니가 원하는 서류는 나오지 않는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언니의 눈빛이 괜히 나를 독촉하는거 같아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혹시나 하고 달력을 살펴본다. 그제 날짜에 "작가에게 전화"라는 자신의 메모가 적혀 있지만 그 일을 완료했다는 v표는 표시되어 있지 않다. 즉, 연락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닌데, 짜증이 나 한숨을 푹 쉬며 난처한 얼굴로 언니를 바라본다. 아까 아침에 본 레나언니는 온데간데 없고 다소 짜증이 난 듯한 옥스턴 사장님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그녀의 눈빛에서는 한숨 말고 어떤 대답을 원하는 것 같다. 가슴이 떨리지만 대답을 해야 한다.


"저..."


"알겠습니다. 제가 직접 전화드리겠습니다. 송하나씨는 미팅 장소 섭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 분과 자서전 계약도 할 예정이기에 좀 중요한 미팅이 될 거 같습니다. 작가분께서는 조용한 곳을 좋아하시니 참고해주세요."


언니는 내 대답을 이미 들었다는 듯 수화기를 든다. 그리고 내가 해야 할 다른 일을 준다. 언니가 전화를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늦게 전화드려 죄송합니다 작가님. 저 레나 옥스턴이에요.'  내가 잘못한 일인데 언니가 나 대신에 사과를 한다. 미안함과 부끄러움, 나에 대한 짜증이 함께 섞여 한숨이 나온다. 이 회사에 입사한지 한 달. 점점 더 실수가 잦아진다. 특히 언니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때에는 더더욱 실수가 잦다. 앙겔라씨나 윈스턴씨가 적응기라서 그런 것이라고 아무리 얘기를 해 줘도 위로가 되지는 않는다. 대학 생활에서 뭐 하나 아쉽지 않게 철저히 잘하던 나에게 이런 일은 익숙치 않다.

모니터로 고개를 돌린다. 사장님이 요구한 조용한 카페를 찾는다. 하지만 다른 생각들이 머릿속에 끼어든다.  


늘 나에게 부드러운 언니였다. 대학교에서 만나 언니와 나 자신이 모두 사회인이 되는 지금까지도 언니는 늘 나에게 상냥했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던 사람이었으며 나를 웃게 하기 위해 부던히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회사에서 상사와 부하직원으로 만날 때에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다. 젊은 나이에 어느정도 탄탄한 중소회사를 운영할 정도라면 그녀의 전문성, 그리고 공과 사를 구분하는 능력은 익히 알고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출근도 나보다 한 시간 일찍 나가기 시작하더니 회사에서는 눈빛부터가 달라진다.

그래서일까. 꼬맹아, 토끼야, 라는 호칭 대신에 딱딱하게 송하나씨. 라고 불리면 몸이 먼저 굳는다. 다른 직원들이랑은 웃으며 장난도 잘 치다가 자신이 가까이 오면 왜인지 모르게 저 멀리로 피하는 것을 보면 '사실은 내가 이 회사로 들어오는 것이 싫었던 것 아닐까.' 하는 이상한 생각마저도 들게 한다.


바보같은 생각인건 잘 안다. 다른 직원들도 '레나가 바보라서 그래.' 라고 멋쩍게 대답해주는걸 보면 내 생각이 완전히 틀린거라는 것을 알고는 있다. 하지만 마음 속에서 우울함과 불안함이 스믈스믈 기어나오는건 어쩔 수 없다.

속으로 한숨을 삼키는데 모니터 한 켠이 반짝, 하고 빛난다. 사장님의 메세지이다. <다음주 목요일 오후 3시> 약속을 잡으라는 메세지이다.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주변에게 신경을 돌린다. 사장님이 전화기에 대고 형식적으로 밝게 웃는 소리가 전해진다. 전화의 내용으로 미루어볼때 작가와의 약속은 무사히 잡힌 것 같다.

사장님의 등 뒤에 놓인 창 밖으로 낙엽이 떨어지는게 보인다.

문득 언니와 대학시절 함께 한 그 조용한 곳이 떠오른다. 나는 전화기를 들어 익숙한 번호를 누른다.



***



내가 하나에게 잘 하고 있는거겠지. 오늘 꼬맹이가 좀 실수를 했구나. 그래도 잘 한것도 많아. 입사 초기에는 다들 그렇지. 집에 가서는 많이 달래줘야겠다. 아니, 카페로 가는 길에 짧게 얘기를 나눠도 되지 않을까? 이건 근무시간일까, 아니면 사적인 시간이라고 해도 될까. 이렇게 무게잡는건 내 취향이 아니야. 피곤한건 어쩔 수 없구나.

복잡한 생각들에 지쳐 가볍게 눈두덩이를 누르던 레나는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차창 밖에는 파리하가 서 있다. 평소 과묵하게 맡은 일만을 하던 그녀가 레나를 찾아온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레나, 잠시 할 말이 있습니다."


"아, 그러면 출장 갔다 와서 하는건 어떨까요?"

레나의 권유에 파리하는 고개를 젓는다. 차에서 나오려 하니 차 문을 가볍게 잡고는 그렇게 긴 이야기가 아니라며 레나를 막는다.


"하나씨가 오기 전에 얘기하려고 합니다. 레나씨가 하나양을 너무 의식하는거 같아서요."


"아. 제가 너무 티를 냈나요? 나름 무시한다고 애는 많이 썼는데..."


"아뇨. 티 많이 납니다. 모두가 걱정하고 있어요. 때문에 하나양도 불필요하게 긴장을 하는 것 같구요. 좀 더..."


말을 더 하려는데 요란한 걸음소리와 함께 저 멀리서 하나가 서류뭉치를 안고는 헐레벌떡 뛰어온다. 더 말을 잇지 못하고 파리하가 뻣뻣하게 일어나 하나양을 바라본다. 입사 후 한 달 하고도 보름, 하나는 그 새 정신없는 신입사원의 모습이 되어 여기저기 토끼눈을 뚜릿거리게 되었다.


"제가 늦은건가요? 파리하씨도 같이 가는건가요?"


"아니요, 오늘 작가님과 있을 만남에 대해서 얘기하던 중이었습니다." 파리하는 하나를 안심시키고는 뒤로 물러났다. 하나는 서둘러 조수석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맨다. 레나는 파리하와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는 차창을 올린다. 올라가는 차창 너머로 보이는 둘 사이에는 사무적인 공기만이 흐르고 있었으며, 신입사원의 신경줄은 손에 잡힐듯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둘을 태운 차가 사무실을 빠져나간다.



"어떻게, 잘 얘기했나요?" 서류에서 눈을 뗀 앙겔라가 파리하에게 묻는다. 윈스턴도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파리하의 입을 바라본다. 원래 과묵하고 잘 열리지 않던 입이 오늘따라 더 천천히 열리는거 같다. 천천히 열린 입에서 아까까지 나눴던 대화가 다시 한번 재생된다. 앙겔라는 레나의 표정이며 하나의 표정까지 차근차근 질문을 한다. 그에 대한 파리하의 애매한 답변을 듣고는 앙겔라와 윈스턴은 눈빛을 교환한다.


'역시, 잘 안된거 같죠?'


'네. 제가 갔었어야 했나봐요.'


왜 우리가 굳이 신입사원인 그녀를 계약서를 쓰는 그 곳에 보낸건데요...

둘은 한숨을 푹 내쉰다.



**



연애 초기에도 없었던 어색한 공기가 두 연인 사이에 흐르고 있다. 레나는 운전을 하며 하나에게 말을 걸어야 할까, 하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날씨 이야기를 해 볼까. 아니면 라디오를 틀어볼까. 지금 내가 얘와 이야기를 하는게 사적인 이야기일까? 아니, 다른 사람들이랑은 이런 얘기 종종 하잖아? 그럼 어떤 얘기를 하지?'


레나는 핸들을 다각다각 두드리며 고민을 한다. 고속도로로 진입하는 마지막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는 순간, 적당한 질문을 찾아낸 레나가 입꼬리를 올렸다.


"날씨가 괜찮죠?"


"네? 네."


레나가 아는 하나는 이렇게 질문에 짧은 답을 하지 않았다. 멋쩍은 듯 레나는 가볍게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태연한듯 콧노래를 흥얼거리지만 레나의 머릿속에서는 가장 '공적이면서도 사적인' 질문이 무엇인지 바쁘게 검색중이었다. 반짝, 다음 질문이 준비되었다.


"아, 하나씨. 서류 준비는 잘 해오신거죠?"


"네! 작가님이 여태 쓰신 작품에 대한 서류는 여기 있고... 또...또..."


하나가 허둥지둥 서류를 뒤적인다. 그 불길한 기운에 레나의 입꼬리가 천천히 내려간다. 이미 차는 고속도로의 한 가운데를 씽씽 달리고 있었다.


"계약서..계약서가 어디 갔지...?"

난처한 하나의 목소리에 조건반사적으로 레나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레나가 한숨을 내쉬자 하나의 손이 주춤 멈추었다. 또 그 한숨이었다. 회사에서 옥스턴 사장님이 쉬는 한숨이 집에서의 레나 언니를 대하는 자신의 태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애써 공과 사를 구분하려고 해도 이제 집에서 언니가 자신을 부르기만 해도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잘 해주면서 왜 나에게는, 나에게만은 이렇게 엄한걸까? 나는 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사람 앞에서 더 움츠러들고 더 실수를 하는걸까?


눈 앞이 흐려진다.


"...하나씨? 하나씨 지금 울어요?"


나도 모르게 울음이 섞인 숨소리를 내뱉고 있던 거였을까?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보자, 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의 보인다. 고개를 급하게 돌리느라 눈에서 손등으로 눈물방울이 떨어진다. 반대쪽의 눈물도 황급하게 손가락으로 훔쳐낸다. 하지만 이미 옥스턴 사장은 내가 울고있다는걸 알고 있는 듯 하다.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돌려 뻣뻣하게 창 밖만을 바라본다.


하아, 이번에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레나가 잘게 한숨을 내쉰다. 이게 아닌데. 레나는 짜증난다는 듯 가볍게 핸들을 친다. 아까보다 더 차가운 공기 속에서 차는 고속도로를 빠져나가 한적한 교외로 접어든다.



*



생각해보면 계약서는 나중에 준비했어도 될 일이었다. 작가와의 미팅은 훨씬 더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마치 오래 전 헤어진 친구를 만난 듯 대화는 물 흐르듯 진행되었다.

굳이 필요가 없다 했는데도 하나는 주변의 PC방에서 계약서를 인쇄해 오겠다며 택시를 잡아 타고는 나섰다. 그렇게 무리하는 모습이 또 속상해 레나는 하나의 등을 말 없이 바라봤다.


"애인이에요?"


작가, 셀리나 터너가 나에게 물었다. 고개를 돌리자 장난스럽게 웃으며 '걱정하는게 뒤통수에서 줄줄 흘렀어요.' 라고 덧붙였다.


"네. 애인이에요."

연인이에요. 라고 말은 하지만 말꼬리에서 한숨이 절로 묻어나온다. 아까의 눈물을 보면 내가 너무 몰아붙인게 아닐까, 하는 자책이 든다.


"티가 많이 났어요. 그런데 싸우셨어요? 애인분 표정이 딱딱하던데..."

이런 말을 해도 될까. 계약에서 약점이 되는건 아닐까. 레나는 살짝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왜일까, 셀리나의 호박빛 눈동자를 바라보니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제가 잘못한거 같아요. 아니... 저는 잘 하려고 한 행동이었어요. 그런데 일이 참... 어긋나가네요."

하나도 없겠다. 나는 한숨과 함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아아... 그렇구나. 일단 어깨에서 힘 좀 빼요."

어깨도 좀 털고요. 셀리나가 내 앞에서 과장스럽게 어깨에 힘을 주었다가 털어낸다. 그녀를 따라 나도 어깨를 몇번 털어내자 약간 후련한 기분이 든다.

셀리나는 탁자 위에 놓인 자신의 동화책 <눈사람과 아기토끼>를 어루만진다. 그녀의 검지손가락은 동화책의 글작가, 한나.S에 가 있었다. 


"이 사람이요, 내 아내에요. 예전에 제가 시각장애인이었을 당시에 저의 활동보조인이기도 했구요. 그때는 자원봉사자였지만... 처음에 우울증이 심한 저에게 세상을 보여준 사람이었어요. 

그러다 연인관계로 발전했고 제가 세상을 보고 나서는 이 사람은 우리의 이야기를 글로 써내고, 저는 그림으로 그려냈죠. 물론 그 과정에서 싸움이 없던건 아니에요."


이건 자서전에 써야 할 내용인데. 광고문구에 넣지 마세요. 셀리나는 깔깔거리며 웃더니 다시 한번 더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레나씨와 연인분처럼 우리는 상하관계가 아니라서 잘은 모르겠어요. 근데 제 생각에 공과 사를 구분하는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이중인격이 아닌데 어떻게 그래요. 다만 일을 할 때에는 일에 집중하려 노력하는거죠.

오히려 연인이었기에 서로의 마음을 알아채고 배려해주는게, 그리고 일에서 생기는 문제를 같이 해결해 나가는 것이 좋았던거 같아요. 레나씨는 혹시 상사라는 그 직위에 매어 다른걸 보지 못한거 아닐까요?"


잘 해보세요. 셀리나의 호박색 눈이 나를 빤히 바라본다. 내 눈은 책의 표지. 눈사람과 아기토끼가 서로를 바라보는 그림에 고정되어 있다.



**



계약서를 가지고 오자 둘은 말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늦은건가, 싶어 후다닥 달려갔는데 생각 외로 분위기는 많이 온화했다.

아내가 절 기다리고 있어서요, 빨리 쓰고 먼저 일어날게요. 하며 셀리나씨는 허둥지둥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는 사라졌다.


어서 사무실로 돌아가서 오늘 일을 끝내야지. 하는데 뒤에서 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기야, 오늘은 이만 여기서 퇴근할까? 회사 사람들에게는 알아서 끝내고 집에 가라고 했어."


아직 근무시간도 끝나지 않았는데, 언니에게서 낯선 호칭을 듣자 로봇처럼 뻣뻣하게 몸이 굳었다. 정리하는 자세 그대로 굳은 내 등을 언니가 뒤에서 끌어안았다.


"미안. 내가 너무 긴장해서 나를 숨긴거 같아. 나는 레나 옥스턴이고 너는 송하나인데, 우리는 사장과 직원이기 이전에 연인이었잖아? 근데 그걸 잊고 나에게서 그걸 떼어낼 수 있을거라 생각했나봐. 그러니까 다른 사람보다 더 뻣뻣하게 굴었어. 자기 많이 불편했지?"


언니의 말 한 마디가 위로가 되어 아까와는 다른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른다. 으이구, 우리 토끼. 언니가 너무 못되게 굴었다. 그치? 나를 자기를 보도록 몸을 돌린 언니가 날 끌어안고 등을 쓸어준다.


"미안미안... 언니가 가진 부담을 너에게 전가시켰다. 언니가 바보라서 그래."


이제 한번 더 바보같은 짓 하면 때려줄거야. 뻥 차버릴거야. 마음 속에서 여러 말이 올라왔지만 꼭 눌러담았다. 그냥, 이제라도 먼저 알아주는 언니가 고마워서. 그게 고마워서 언니의 품에 안겨 한없이 울었다.



***



사무실은 좁다. 그리고 직원들은 모두 맥주를 사랑한다. 그러다보니 회의 장소는 늘 회사 근처의 호프집이 되고 만다. 회의를 하는 날은 5시에 모두 일을 마치고 모두 근처의 호프집으로 간다.

짠, 하고 몇번째일지 모를 맥주잔을 부딪힌다. 이건 말이 회의지 그냥 친구들끼리 만나서 갖는 술자리이다.


레나는 세게 부딪히느라 자신의 잔에서 넘친 맥주에 입을 대고 쭉 빨아들였다. 이제 본격적으로 마셔볼까. 하고 맥주잔에 입을 대려는데 옆에서 손이 들어와 맥주잔을 가로챈다.


"그만, 내일 셀리나씨와 자서전 최종 미팅 있잖아. 이번에도 표지 제대로 안뽑히면 한나씨가 화가 나서 날뛸거야."


하나가 레나의 술잔을 가로챈 채 눈을 부릅뜬다.


"아, 이거 한 잔만 마시고 일어나자. 이거 지금 회의 하는거라고 자기."


"회의는 무슨, 30분만에 모두 일 열심히 합시다! 하고 회의종료 땅땅땅 한게 언니 손바닥이었어. 지금 이건 그냥 술판이지."


"아냐아냐. 아직 회의 할 안건이 남아 있을거야. 안건을 받습니다. 안건 있나요?"


하지만 모두들 하나의 눈치를 보며 레나의 눈을 피한다. 그 사이에 하나가 냉큼 손을 든다.


"내일 중요한 약속을 위해 오늘의 회의를 마칠것을 제안합니다, 옥스턴 사장님."


"아! 나는 자기가 그 호칭 쓸 때가 제일 싫더라! 모두들 내 편은 안들어주고!"


눈을 피하는 모두를 향해 레나가 빽 소리를 지른다. 하지만 레나보다 하나의 눈초리가 무서운지, 혹은 이 상황이 재미있는지 모두들 웃으며 레나의 외로운 전투를 지켜볼 뿐이다.


"그럼 언니라고 할 테니까 술 그만마셔. 언니 집에 가면 바가지 긁힐 줄 알어!"


공과 사는 구별할 줄 알아야지.

하나는 레나의 지갑을 빼앗아들고 안주 몇 개와 맥주 몇 잔을 더 주문한 후에 레나를 잡고 빠져나온다. 그야말로 사장님이 보여줘야 할 모범적인 자세를 대신해서 실천하는 신입사원의 당당한 모습이었다.

그런 둘의 모습을 바라보며 남은 세 직원은 다시 한번 더 맥주잔을 부딪힌다. 그리고는 훨씬 더 편해보이는 친구의 모습에 대해, 그리고 위계질서라고는 하나도 없는 회사의 느슨한 분위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