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신쿤(@nerf171)님의 썰을 기반으로 작성했습니다. : http://sinkoonote.tistory.com/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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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정부는 테러집단들의 테러를 막기 위해 국방에 많은 힘을 실어주었다. 그 결과일까, 정치를 하고 싶다면 우선 군대에 가는 것이 일반적인 절차가 되어버렸다. 그런 세계적인 추세에서 센티넬, 혹은 가이드들은 정제계에 강한 영향을 끼쳐왔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센티넬과 가이드(이하 능력자)는 막대한 부와 명예를 누리고 자기들끼리 결혼을 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세습시키는 사회의 상위 계급이었다. 하지만 빛이 있다면 어둠 또한 있는 법, 우리가 알고 있는 능력자들의 사회는 전체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다.
능력자들의 수는 총 인구의 30% 정도이다. 이들은 능력의 강도나 희귀함에 따라 S-A-B-C라는 등급이 부여된다. 그리고 실제 전투에서 쓸 수 있는 C등급까지의 센티넬과 그들에게 실제적으로 가이딩을 할 수 있는 동일한 등급까지의 가이드 비율은 그 30%의 인구 중 10%, 즉 전체 인구의 3%뿐이다. 능력자 열명 중 한명, 그들만이 우리가 보고 있는 능력자들이다.
그 외의 아홉명의 삶은 어떨까. 세계정부가 능력자들을 관리,통제하는 지금 그들의 삶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공개적인 문서는 없다. 하지만 나는 이 사회에 들어오게 되면서 그들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센티넬 이 한명만으로도 전투의 판도는 달라진다. 하지만 역으로 이 한명을 전투에 운용할 수 없다면 전투의 향방은 불투명해진다. 가이드 또한 마찬가지이다. 전투현장이라는 어떻게 상황이 흘러갈지 예측조차 할 수 없는 곳에서 센티넬의 옆에 붙어있어야하는 가이드는 다치거나 죽기 쉽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연구소에서는 기발한 생각을 했다. 능력자들의 능력은 어디서 나오는건가? 이 능력을 알약과 같이,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고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면 어떨까.
그들의 이 기발한 생각을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실험재료는 차고 넘쳤다. D등급 이하의 능력자들, 연구원들은 그들의 생각을 실현시키기 위해 가차없이 그들을 "사용"했다. 그렇게 된 시간이 수십년, 처음에는 비밀리에 이 실험을 진행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이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런것은 지금 언니의 부모에 대한 실험과정,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폐기되었는지에 대한 자료 속에서 잘 드러났다.
하지만 아직도 자신들의 사사로운 목적을 위해 능력자들을 쓰는 것은 부끄러웠을까.
<필립 크라이머> - 사망
연구 분야 : 인공지능을 통한 전투 예측 시스템 구축
사망 원인 : 사고사(2061.10.31)
<레나 옥스턴>
등급 : S(2061.10.31)
D(출생일~2061.10.31)
능력 : 시간이동 - 자신의 신체 시간을 가속하여 빠른 속도로 움직임
- 자신의 신체 한정으로 5초 전의 시간으로 역행
- 불완전한 능력, 시간가속기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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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사항 : 연구원(필립 크레이머)의 실험(안구적출)에 의해 Code Black 발생(2061.10.31), 자동 진화(鎭火)하여 폐기는 하지 않음.
진화(鎭火)의 원인은
이라 추정
시각장애인(부모-등급외-의 유전은 아님)
언니에 대해 남아있는 자료 중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이것이 전부였다. 조금 중요해보이는 자료들에는 모조리 먹칠이 되어있었으며 먹칠이 되어있지 않은 자료들은 오히려 언니에게 들어서 더 자세한 내막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십년 전의 10월 31일, 그 날의 신문기사를 찾아보니 별 기사는 없었다. 그 날도 여느 날과 같은 할로윈 축제였다. 굳이 연관이 있는 것은 필립 크라이머라는 연구원이 사고로 사망했다는 짤막한 부고기사가 전부였다.
이럴거라 예상을 했었지만 실제로 언니에 대한 대다수의 기록이 은폐되어 있다는 사실에 직면하자 당황스러움이 밀려왔다. 특히 언니의 부모에 대한 기록, 심지어 그들의 이름마저도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등급외" 이 세글자만이 그들의 삶을 요약하는 전부였다. 그 일이 없었다면 언니 또한 "등급외"의 삶을 살았겠지.
10월 31일... 달력을 본다. 2주 뒤면 언니가 인간으로서 태어난지 딱 10년이 된다. 언니는 이 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자기 나 왔어!"
우당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다. 그 사고 이후로 나는 휴학계를 내고 집에서 요양 중이다. 회복까지 걸리는 시간은 3개월가량이 걸린다고 한다. 언니는 그 시간동안 나와 함께 있겠다고 고집을 부렸지만기관의 명령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언니의 고집 덕분일까, 예전보다 확연하게 줄은 몇 개의 임무와 연구소에서의 호출 덕분에 언니는 하루에 열몇시간 이상 내 옆에만 붙어있을 수 있게 되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금방 올게.'라고 아침에 말하고 나간 언니는 오후의 노을이 져갈 무렵에 돌아올 수 있었다.
기관에서 언니 몰래 받은 문서 파일을 느긋하게 닫고 아직도 현관문에서 부스럭대고 있는 언니를 맞이하러 방을 나선다. 사고 후 몇일, 내가 언니의 방에서 생활하기 시작한 지 얼마 안되었을 무렵에는 현관문 앞에서 방 안으로 순식간에 이동해와서 나를 여러번 놀래켰다. 특히 옷을 갈아입으려는 때에 언니가 들어온다면 언니가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도 매우 부끄러워서 몇번 심하게 화를 냈었다. 특히 언니는 내가 어떤 일을 하던 도와주려고 간섭을 했었다. 하루는 목욕을 하고 있는 화장실 안으로 순식간에 들어와 "눈 뜨고도 눈 감는 것이 특기"라며 내가 씻는 것을 도와주려 했다가 정통으로 샴푸통을 맞기도 했다. 그 후로 "집 안에서는 시간가속기 금지" 라는 규칙이 생겨났다. 덕분에 언니는 집에 오자마자 현관에서 선글라스와 시간가속기를 벗느라 언니 기준에서 꽤 오랫동안 부스럭거린다.
"세상에, 이 꼴이 뭐야!"
몸의 왼쪽방향에서 집중 공격을 받았던걸까, 전투수트의 왼쪽이 너덜너덜해져 있었고, 그 너머로 심한 부상들이 보인다. 화상 때문인지 왼쪽 팔에 심한 물집이 잡혀 있었고, 어깨에는 무엇인가 뭉뚝한 것에 찔렸는지 너덜너덜해진 상처가, 왼쪽 뺨에는 예리한 날붙이에 베인 것인지 꽤 깊은 상처가 나 있다.
요즘 들어 반군의 테러가 거세지고 있어서인지 언니는 이렇게 유난히 심하게 다쳐서 온다. 보통의 센티넬이라면 그 특유의 자가치유능력으로 집에 오는 길에 모든 상처가 다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언니는 남들과는 달라서일까, 언니는 보통의 센티넬보다 훨씬 더 느리게 상처가 낫는다. 이렇게 크게 다쳤으면 데리고 오라고 말 좀 하지. 나는 언니에게 다가가 살짝 언니의 오른쪽 팔뚝을 잡는다. 이쪽은 넘어지면서 부러진 것일까, 아픈 내색을 하지 않는 언니의 입에서 낑, 하는 신음소리가 난다.
"어휴, 이렇게 아프면 연락을 하던가, 아니면 의무실에서 치료를 받고 오던가. 잠깐 여기 있어봐. 내가 구급상자 가지고 올게."
"아냐, 나 그거 필요없는데..."
언니의 목소리 끝은 피로와 고통으로 갈라졌다. 찬찬히 들여다보니 몸을 떠는것도 같다. 저 바보 언니가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언니의 목소리를 등 뒤로 무시하고는 거실로 구급상자를 가지러 간다. 하도 다쳐서 오기에 구급상자가 늘 거실에 놓여있게 되었다. 에휴, 하고 상자를 집어드는데 뒤에서 언니의 발소리가 들려온다. 뒤를 돌아보자 언니가 절뚝거리며 나에게 다가온다. 저리 피할까 생각했지만 저러다 쇼파에 무릎이라도 부딪히면 어쩌나 싶어 오히려 내가 먼저 다가가 언니를 끌어안아주었다.
"왜 고집을 부려 여기까지 와, 여기 앉아있어. 대충 드레싱이라도 해줄게. 상처가 깊어 이걸로 되려나 몰라."
언니를 쇼파로 옮기려 하자 이대로 잠깐만 있자 자기. 하고 언니가 말한다. 신기하게도 그 새에 언니의 목소리가 훨씬 나아졌다. 피곤한 기색은 느껴지지만 아까처럼 몸이 떨릴 정도로 아프지는 않은거 같다.
"역시 이게 훨씬 나아. 나 구급상자는 필요 없어. 자기만 있으면 돼."
언니가 나를 품 안에 더 깊게 껴안는다. 옷에 검뎅이 묻긴 하지만 언니가 나를 껴안는게 하도 절박하게 느껴져 슬쩍 이마로 내려온 언니의 머리칼을 올려준다. 그게 기분이 좋은지 언니가 목 안에서 그르릉거리는 소리를 낸다. 머리칼을 올리자 드러난 멍이 눈 앞에서 시간을 빨리감기하듯 사라진다.
"어, 언니! 이거...!"
"응, 자기를 안고 있으면 내 회복능력이 엄청 빨라져. 이 정도의 속도는 보통 센티넬보다 훨씬 빠른거야."
언니가 여전히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채 웅얼거린다. 슬슬 어깨가 아파와 언니를 한 팔로 지탱한 엉거주춤한 자세를 한 채 침실로 간다. 정말 오늘은 평소보다 더 힘들었던 걸까, 내 어깨가 다칠까봐 무거운건 들지도 못하게 하던 언니가 나에게 체중을 지탱한 자세 그대로 질질 끌려오듯 방으로 간다. 언니, 옷 좀 갈아입을까? 라고 물어보니 알 수 없는 웅얼거림만이 들려온다. 으응거리는 목소리를 들어보면 벗기 귀찮다는거 같아 하는 수 없이 이불만을 들춰 언니를 눕혀준다. 반대편으로 가느라 내 손짓이 닿지 않는 그 짧은 시간이 언니의 몸에는 무리였을까, 다시 끙끙대는 소리와 함께 언니의 몸이 잘게 떨리는게 보인다. 짧은 거리더라도 속도를 재촉해 나도 이불 안으로 들어와 언니를 다시 안아준다. 언니가 내 몸 위로 올라와 배 위로 고개를 돌려 눕는다. 보통이면 변태같은 짓을 한다고 언니를 밀쳐냈을텐데 상처입은 짐승이 겨우 쉼터를 찾아 몸을 누이는 것 같아 머리를 가만가만 쓸어준다. 볼의 베인 상처에서도 팔의 큰 상처들에서도 천천히 시간이 되돌아가듯 분홍빛 얇은 피부가 서서히 올라온다.
보통 가이드가 행하는 가이딩은 센티넬의 폭주를 막도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지금 하는 것은 센티넬의 육체를 치유시키는 것, 또는 언니가 가지고 있는 치유능력을 증폭시키는 것이다. 그럼 내가 하는 것이 무엇일까.
"언니."
언니는 입을 살짝 벌리고 고르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다. 아마 잠에 빠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이 현상은 내가 잘 이해하지 못하는 현상이고, 이것이 언니에게 정말로 무해한지 확신할 수 없기에 살풋 잠에 빠진 듯한 언니를 가볍게 흔든다. 응? 하고 언니가 가늘게 눈을 뜬다.
"이거 괜찮은거에요? 보통 가이드들이 이런걸 하는게 정상인가?"
"아니. 자기는 특별하잖아.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냄새도 좋고..."
"농담 하지 말고, 제대로 말해줘요. 지금 내가 뭘 한거에요?"
"자기는 가이드 중에서도 인핸서(Enhancer)인거야."
"인핸서? 내가 인핸서야?"
"응. 그것도 꽤 강한..."
이 말을 끝으로 다시 언니는 눈을 감고 몸에서 힘을 뺸다.
인핸서(Enhancer) 말 그대로 센티넬의 능력을 강화시켜주는 능력이다. 흔치는 않지만 없는 것은 아니다. 인핸서에게 가이딩을 받은 센티넬은 센티넬 특유의 능력이 증가한다. 지금의 경우, 언니가 가지고 있는 센티넬의 회복능력이 훨씬 더 증강된 것이리라. 언니의 시간 조절 능력까지도 강화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 실험을 해 봐야 알겠지. 그럼 이 능력을 연구소에 알려야 하지 않을까? 언니의 눈에 다시 힘이 풀어지는거 같아 언니를 다시 부른다.
"왜, 나 지금 엄청 졸려 자기야."
"언니는 이걸 어떻게 알았어요?"
"응? 처음엔 자기 학교에서 알았어, 시간 가속은 세 번 이상 사용하면 그 다음에 내 몸이 피곤해서 더 이상 사용하는 것이 무리거든. 근데 몇번이고 계속 쓸 수 있더라고. 그때는 내가 강해졌다고 생각했었는데, 임무에 나가서 써 보니 그대로더라. 그래도 그때까지는 긴가민가 했어. 일단 내가 흥분한 상태이기도 했고...
그리고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그 자기 옷 갈아입혀줄때... 내가 한 번 실수했었잖아..."
언니가 느릿느릿 이야기를 꺼내다 말을 얼버무린다. 옷 갈아입혀줄 때라면 그 때 말하는거지? 내 얼굴도 덩달아 달아오른다.
***
언니, 하고 하나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머리를 문지르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저 하나가 씻는걸 도와주기 위해 욕실에 들어간건데 그렇게 하나가 소리를 지를 줄은, 그리고 그렇게 빠르게 샴푸통을 던질 줄은 몰랐다. 어차피 보이지도 않는데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결국 방 밖으로 쫒겨나 침실 앞에서 주저앉아 있었던 때였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 확, 하고 더운 공기와 함께 샴푸 냄새가 코를 찡하게 울렸다. 그리고 저 너머에서 하나가 헐떡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응, 언니 옷을 입으려는데 잘 안돼서... 이거 내려줄 수 있어? 아파서 잘 안내려가..."
"그러기에 티셔츠 말고 셔츠 입고 있지.. 굳이 그걸 입어야해?"
"셔츠는 단추가 많아서 불편하다니까. 어서 이리 와."
하나가 침대의 한 켠을 팡팡 두드린다. 아까까지는 몰랐는데 갓 씻고 나온 향기가 방 안에 가득 퍼지자 갑자기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여기야 여기. 하나가 손을 뻗어 어깨 위에 말려올라간 티셔츠에 내 손을 갖다 댄다.
응, 으응. 하고 티셔츠를 끌어내리려는데 하나의 몸에 물기가 덜 말라서였을까, 티셔츠가 잘 내려가지 않았다. 한번 더 힘을 주려는데 손이 쓱 미끄러지며 나도 모르게 어떤 것을 잡고 말았다.
말캉한 감촉, 순간 내가 무엇을 만졌는지 감이 잡히지 않아 한동안 손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곧 내가 "그것"을 만졌다는 것에 놀라 황급히 손을 더듬거리며 위로 올려 말린 티셔츠를 잡아 천천히 내려주었다.
꼬맹이가 싫어하겠지. 토끼처럼 나에게 발차기를 할지도 몰라. 눈을 꼭 감고 고개를 숙인 채 그녀의 응징을 기다렸다.
"아, 앞으로는 셔츠 입을게요. 미안 언니."
멍하니 있는 나를 뒤로 하고 하나는 옷가지를 집어들고는 밖으로 나간다.
가만히 손의 감촉을 되새긴다. 매끄러운 살결과 부드러운 감촉, 튀어나온 쇄골의 느낌. 실례를 범했어. 아, 부끄러워.
쾅쾅, 침대를 양 손으로 두드리다 깜짝 놀란다. 분명히 임무 도중에 옆구리가 베어서 크게 다쳐서 아직은 아플텐데... 손으로 옆구리를 만져보니 보송한 살이 상처 위를 덮고 있다.
아, 인핸싱이구나. 꼬맹이는 정말, 정말 특별했다. 하지만 이 특별함은 나만 알고 있을거다.
**
"참, 계기도 부끄럽네. 그럼 지금은 괜찮아요? 어디 아프지 않아?"
"응. 지금 엄청 기분 좋아. 부드럽고, 따뜻하고, 아프지도 않고."
"정말이죠? 하여간... 이런 능력이 나에게 있는걸 알았다면 진작에 알려주지 그랬어요. 언니만 아프고 이게 뭐야."
"그냥...나는 자기가 좋은거지 가이드가 필요한건 아니야."
"그래도요! 아프면 말을 해요. 내가 속상하다고요, 내가."
하나가 내 등을 탁탁 두드린다. 아마 내가 아플까봐 크게 힘은 주지 못하는 거겠지. 기분이 좋아 나는 하나의 배에 고개를 비빈다. 간지러워요, 하나가 볼멘소리를 하지만 목소리로 미루어볼때 그녀의 입가가 웃음을 띄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자기가 필요해. 아프거나 힘들 때 하나만 생각나. 가이드 말고."
기분이 좋아 한번 더 진심을 말해본다.
"내가 가이드인데요?"
"아니, 자기는 가이드이기 이전에 송하나야. 내 토끼 송하나."
"그게 무슨 차이에요. 그런 식이면 나는 송하나이기 이전에 가이드에요."
"아니... 나는 가이드가 필요한게... 아니야... 자기가 필요해...."
다시 잠이 쏟아진다. 지금이 너무 평화롭고 행복해 오히려 불안함이 밀려왔다. 이렇게 눈을 감았다가 떴는데 하나가 없어지면 어떻게 하지? 다시 빈 침대에서 마약을 한 채 누워있는 나를 발견하면 어떻게 하지? 허리를 감은 손에 힘을 준다. 하나가 천천히 내 볼을 쓸어준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입술을 움직인다.
"어디 가지 말고... 여기... 있어줘... 응? 나 일어...났을때... 여기 있는거야..."
"어딜 가긴 어딜 가요. 아, 내일 치글러 박사님에게 이거 알리러 가야 하는건가? 조금이라도 특이한거 나오면 연락 달랬는데."
찬물을 뒤집어쓴듯 잠이 확 깬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하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엄한 표정을 짓는다.
"아니, 가지마."
박사님이... 하고 다시 말하려는 하나의 말문을 다시 한번 더 막는다.
"언니가 가지 말라면 가지 마. 가서 너에게 득 될거 하나도 없어. 실험실에서 실험이나 왕창 당하고 다른 가이드들에게 가이딩하라고 강요할지도 몰라. 나는 네가 다른 센티넬에게 가이딩 해주는게 정말 싫어. 내 옆에만 있어. 너는 내 토끼야."
하나의 손을 꼭 잡고 다짐을 시킨다. 꼭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 알았지?
"알았어요. 알았어. 애도 아니고 욕심부리긴. 절대 말 안할게요. 피곤하니까 자자, 언니."
조금 놀랐는지 멈칫하던 하나가 이내 내 머리를 쓸어주고는 자기 옆의 베개를 손으로 톡톡 친다. 그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 베개를 베자 하나가 내 볼을 양 손으로 쓸어준다.
그녀의 손짓 한번에 금새 내 마음이 진정된다. 쿵쿵거리던 심장이 천천히 뛰고 그렇게 다시 무거운 잠에 빠진다.
*
심장이 엄청나게 빠르게 뛰었다. 내 몸이 내 의지와 다르게 숨을 가쁘게 쉬었다. 폐가 하도 빠르게 팽창과 수축을 반복해 찢어질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심장이 천천히 뛰었으면 좋겠어서 가슴에 손톱을 세웠다. 또 다시 "그것"이 오는 것 같았다. 하나가 깨면 안되는데 입에서 나도 모르게 끙끙거리는 신음이 튀어나왔다.
"언니! 언니 괜찮아요?"
내 우려대로 이미 잠에서 깼는지 하나가 내 몸을 잡고 흔든다. 그녀가 내 팔을 잡는 촉감이 점점 무뎌지는걸 보면 "그것"이 머지 않았다.
"저...절대...말하면...안돼... 나도...너도... 금ㅂ..방...올거니까...!"
이 말만은 전해야 한다. 나는 숨을 고르려 노력하며 하나에게 꼭 전해야 하는 말을 반복해서, 반복해서 내뱉는다. 하나가 기관에 연락을 취하려는지 내 팔을 떨치려고 한다. 내 팔을 떼내려는 하나의 손을 더 강하게 붙잡는다.
"제발! 약..속해! 말하며..ㄴ! 안...ㄷ..."
미처 그녀에게 약속을 받지 못한채 내 몸의 감각은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눈 앞이 환해졌다.
***
한 밤중, 어디선가 끙끙대는 소리가 들려 짜증이 났다. 하지만 그 소리를 낼 곳이 언니밖에 없다는 사실이 머리에 떠오르자 누군가가 머리에 얼음을 붓는 것처럼 온 몸에 털이 쭈뼛 섰다. 옆을 보자 역시 언니가 가슴을 쥐어뜯으며 격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언니 괜찮아요? 바보같이 나는 이 질문만을 반복했다. 기관의 누군가를 불러야 해. 센티넬의 폭주, 인핸싱의 부작용, 언니 자체가 가지고 있던 선천적인 질환. 그게 무엇이든 지금 머릿속에는 치글러 박사님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는 생각만이 가득 찼다. 침대 옆에 둔 휴대전화에 손을 뻗으려고 날 꽉 붙잡은 언니의 손을 떼려는데 언니가 다시 내 손을 붙잡고 아까와 같은 말을 반복했다.
말하면 안돼. 약속해. 이 말만을 남긴채 정말 마법처럼, 언니는 눈 앞에서 사라졌다.
지금 이 상황이 뭐지? 언니가 돌아올수는 있는걸까. 혹시 이게 언니의 마지막 모습이라면?
나는 손톱 끝을 잘근잘근 깨무며 언니가 없어진 자리를 노려보았다. 어두운 방 안, 창 밖에서 흘러들어오는 달빛에 비친 언니가 있던 자리에는 언니가 거칠게 움직였던 시트 자국만이 남아있었다.
말하면 안돼. 약속해. 언니는 이렇게 말했었다. 대체 왜? 지금 언니가 어떤 상태인지 말해주지도 않았잖아.
혹시 내 인핸싱 능력이 언니를 뭔가 위험에 빠트린 것 아닐까, 그래서 치글러 박사님이 나에게 연락을 취하라고 한 것 아니야?
언니가 있다면 나에게 답을 알려줄텐데. 왜 연락을 하면 안되는지 차근차근 알려줄텐데.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휴대전화를 든 채 한참을 망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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