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나를 단지 자살을 하게 된 젊은 여성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학업에 대한 불안이나 우울증 등, 내 죽음의 이유를 다양하게 가정하고 이 유서를 통해 그 가설을 검증하려 하겠지.
하지만 내가 장담하건데, 이 글을 읽고 난 후의 당신은 나를 미친 여자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지금 내가 죽는 이 순간에 내 삶에 대한 모든 것을 털어놓고자 한다.
나는 지금 자살을 하려고 한다. 그 이유는 내가 너무나도 늙었기 때문이고, 늙은 나의 기억은 점점 빛이 바래지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내가 아버지를 떠올리면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그분에 대한 애잔한 슬픔이 가슴 깊숙히서 올라오곤 했었다. 하지만 저번 주, 우연히 그분을 반추하던 나는 매우 놀랐다. 내가 그분에 대해서 아무런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분에 대한 슬픔이나 사랑은 여전히 남아있다. 하지만 그 감정은 내 것이 아닌,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때 떠오르는 감정과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때, 나는 자살을 결심했다. 내가 "그 사람"에 대해서 '아, 그런 사람이 있었지.' 하고 회고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는 아직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이 생생한 지금,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남겨두고 떠나려고 한다.
나는 수백년을 살아왔다. 내가 살았던 곳은 지금은 동유럽의 한 작은 영지었다. 영주는 과학을 신봉했으나 영지의 백성들은 아직 미신을 믿었다. 영주의 어린 아들은 먼 동쪽을 탐험했고, 거기서 내 부모를 데리고 왔다. 처음에 그들은 내 부모에게 호기심을 느꼈지만 곧 사그라들었고 그렇게 내 부모는 영지의 한 구석, 숲 속에서 백성들의 허드렛일을 도우며 살았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백성들의 가축보다도 더 천한 신분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만난 것은 내가 열아홉이 되던 때였다. 내가 열아홉이던 그 때, 열아홉이란 나이는 결혼을 하고도 아이가 있을 나이었다. 하지만 짐승만도 못한 나는 결혼을 할 수 없었고 설상가상 몸이 약했던 나는 시름시름 앓게 되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단지 나는 그 사람을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선생님은 어느 날 불쑥 영지에 나타났고 영주의 성에 기거하며 보름에 한두번, 영지로 내려와 무료로 몸이 아픈 백성들을 고쳐주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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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떠돌이 연금술사이다. 내가 주로 하는 일은 이 영지에서 저 영지로 떠돌아다니며 금이나 불로불사를 쫒는 영주들의 비위를 맞춰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로 나는 짧으면 5년, 길면 10년 이상 살 곳을 마련할 수 있었다. 내가 주로 가는 영지들은 숲으로 둘러쌓인 폐쇄적인 곳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곳일수록 소문은 영지 안에서만 돌기 마련이었고, 나의 비밀스러운 식사를 숨겨주기에도 적당했다.
이번에 내가 가는 곳 또한 무식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 주민들은 전염병이 신의 저주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영주는 스스로를 지식인이라고 생각하면서 불로불사의 비밀을 찾고 있었다. 그런 그를 현혹하는 것은 쉬웠다. 나는 그의 성에 기거하면서 한동안의 "식사"를 해결하려고 했다. 영지는 국왕이 사는 성이나 다른 영지와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렇기에 내가 여기를 떠난다 하더라도 이 곳의 수상한 사건들은 아주 먼 후에야 알려질 터였다.
외지에서 온 연금술사가 성에만 박혀 있다면 흉흉한 소문이 돌기에 열흘에서 보름에 한 번, 마을로 내려가 잔병치레를 하는 마을사람들을 고쳐주곤 했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나는 마을로 내려가 마을 주민들을 사냥했다.
그 날은 구름 속에 달이 가려진 밤이었다. 느긋하게 사냥을 마치고 숲 속에 시체를 버린 채 돌아오던 나는 낯선 소녀와 만났다. 물동이를 들고 가던 그녀는 마을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소녀였다. 주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짙은 쌍커풀도 없었고 키도 마을의 아이들보다도 작았다. 하지만 그녀에게서는 숙녀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전체적으로 그녀는 마치 길가에 아무렇게나 핀 들꽃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국적인 외모에 무례임에도 한참을 넋을 놓고 바라보는데 그 소녀가 먼저 말을 걸었다.
"당신이 마을에 새로 온 선생님이라는 분인가요?"
"응. 그러는 너는 누구니? 마을에서 본 적이 없던 것 같던데."
친절한 웃음을 띄며 대답했지만 피냄새가 날까 무심코 두세걸음 뒷걸음질을 쳤다. 내 질문에 소녀는 대답을 하려고 입을 열었고 그와 동시에 허리를 굽히며 심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두세걸음 뒤로 물러난 나는 황급히 그녀의 옆으로 뛰어갔고, 바닥에 무릎을 꿇은 그녀를 부축했다.
피, 피였다. 입을 막은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방금 마친 식사 덕분인지 나는 그 피냄새에 영향을 받지 않고 소녀의 곁에 다가갈 수 있었다.
"너 괜찮아?"
쓰러지려는 아이의 등을 쓸어 기침을 진정시키고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눈 아래에 새카만 그늘이 드리워졌고 혈관이 비칠 정도로 창백한 뺨이 나보다도 더 흡혈귀같은 존재였다.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아이는 내 손을 밀어내고는 일어서려고 했다. 하지만 당연히도 그 다리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소녀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나는 땅에 넘어지려는 그녀를 간신히 안아들었다. 긴 고동색 머리 사이로 보이는 뒷목이 앙상했다. 무시해도 될지도 모르는데 왜일까. 나는 아이를 안아들었다. 어찌나 말랐는지 그 몸에는 무게마저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이는 부끄러운지 괜찮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나는 그런 아이의 말을 무시했다.
"집이 어디니? 데려다줄게. 아파보이니 진료도 좀 해야겠구나."
"아뇨, 저희 집은 돈도 없고 선생님께서 저희 집에 오셨다가는 선생님의 이름에 먹칠이 됩니다. 이러지 마세요. 그리고 저는 아직 시집도 가지 못한 여인입니다."
"사람을 고치는데 이름에 먹칠이 되는건 어디 얘기야, 그리고 나 또한 여인이니 그런 것은 상관치 마렴. 어서 집을 안내해라."
내 말이 이상하게 들렸을까, 소녀는 한참 조용해지더니 손을 들어 집으로 가는 길을 안내했다. 사람들이 많이 사는 마을과는 한참 멀어진 곳, 숲과 가까운 곳에 그녀의 집이 있었다. 허물어가던 낡은 집이 멀리서 보였다. 등불을 켤 여유도 없는지 어두운 집 앞에서 희미한 달빛을 맞으며 늙은 노인이 서 있었다. 마을 사람들조차도 피하는 더러운 일을 하던 늙은 사내었다. 그는 나와 내 품에 안긴 아이를 보자 허둥지둥 내 앞으로 뛰어와 깊숙히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는 서둘러 내 품에서 아이를 데리고 갔다.
"아이고, 선생님께서 여기엔 무슨 일입니까. 제 딸년이 무슨 짓이라도 했나요?"
이년이 왜 귀하신 분의 품에 안겨있느냐, 사내는 아이의 등을 떄리며 나에게 연신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그 손에는 힘이 들어있지 않았고 딸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는지 그의 눈은 딸의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있었다.
"댁의 여식이 몸이 안좋아 쓰러져 있는 것을 내가 발견했네. 진료를 해야겠으니 방으로 안내해주지 않겠나."
나는 늙은 아비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집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
소녀의 상태는 심각했다. 폐가 많이 상해 숨을 쉬는 것도 힘들어보였고, 부족한 영양상태는 소녀의 얼마 남지 않은 생명도 단축시키고 있었다. 소녀는 어렴풋이 자신의 상태를 알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소녀의 아버지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있는지 내 옆에서 기대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네. 식사를 잘 하고 푹 쉬면 나을거야."
하지만 나는 적당히 말하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오늘 내가 이 곳에 온 것은 단순히 재수가 나빠 내가 숲에서 나오는 장면을 들켰기 때문, 그 뿐이었다. 몇 푼의 돈을 탁자에 놔두고 서둘러 일어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남성은 나의 이 말만으로도 딸의 병이 낫기라도 한 듯 나의 손을 꽉 부여잡았다. 그의 뜨거운 손이 나를 붙잡자 깜짝 놀랐다. 내 손의 온도가 자기들보다 훨씬 낮다는 것을 알면 그들은 나에 대해서 뭐라고 입방아를 찧어댈지 뭐라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차라리 여기서 이 둘을 모두 죽이고 가는 것이 나을까, 마을 사람들은 그저 들짐승에 의해 이들이 죽은 줄 알 것이다.
"아이고, 선생님 손이 차시네요. 식사라도 하고 가세요."
한사코 거절했지만 사내는 막무가내었다. 다 썩어가는 나무 의자와 식탁. 허여멀건한 양배추 스프와 딱딱한 빵. 그나마 나의 접시에는 양배추와 감자가 한 숟갈에 한두개씩은 걸려들었다. 나에게 주고 남은 건더기들은 딸의 접시에 있었으나, 사내의 접시에는 야채 우린 물 뿐이었고 빵도 먹지 않았다.
"애 엄마가 얘를 낳고 세상을 뜨는 바람에... 저에게 남은 핏줄은 이 아이밖에 없습니다. 선생님이 자비로우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드시고 더 드시고 싶으시면 말만 하세요. 얼마든지 준비하겠습니다. 남성의 말은 겉치레가 아니었다. 자신의 딸을 어루만져준 나를 위해서는 자신의 살까지도 베어 식탁에 올릴 생각인 듯 했다.
그런 그들과 함께 나는 어색한 저녁식사를 마쳤다.
사내의 고향은 동쪽의 작은 나라라고 한다. 아주 어릴 적, 아내었던 여인과 함께 영주에게 붙잡혀 동쪽의 작은 나라에서 몇 달을 걸어 이 곳에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 이 곳에서 그들은 인간과 짐승의 중간 정도의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 외로운 사내에게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 이 죽어가는 소녀, 송하나.
선생님 감사합니다. 소녀는 짚으로 된 침대의 바닥에서 자신의 가장 귀한 보물이라며 반짝이는 돌맹이 몇개를 건넸다. 그렇게, 나는 매우 불편한 기분으로 집을 나서려고 했다. 습관처럼 들고 다니는 왕진가방에서 책이 한 권 떨어졌다. 책이 펼쳐지며 인체에 관한 복잡한 그림이 그려진 페이지가 펼쳐졌다. 하나는 그것을 주워 나에게 건넸다. 책을 주워 나에게 건네는 그 짧은 시간, 소녀의 눈은 책의 페이지를 탐욕스럽게 바라봤다.
"글을 배우고 싶니?"
하나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 집의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나 답지 않은 말을 하고 있었다.
"괜찮다면 글 정도는 가르쳐주마."
***
"선생님, 오늘부터는 일찍 돌아가세요."
햇빛을 맞으며 책을 읽는데 맞닿은 등에서 웅웅 아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하나의 집 안은 공부를 하기에는 너무 어두웠고 그런 곳에 있는다면 누구라도 병에 걸릴 만한 환경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숲 속의 공터에서 하나에게 글을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하나는 배우는 것이 빨랐다. 이제 글을 읽는 것에는 문제가 없고 짧은 글이라면 쓸 수는 있다. 그 정도라면 생활을 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겠지. 하지만 날 볼때마다 활짝 웃으며 다가오는 아이의 얼굴, 발갛게 달아오르는 볼을 보며 나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움찔거리지도 않고 차가운 손을 잡아주는 것에 하나, 또 눈가의 그늘을 보며 무리하지 말라며 걱정해주는 그 마음씨에 하나 더, 아이에게 세상의 지식을 알려주고 내 마음을 전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아는게 참 많으시네요. 그 나이에 언제 이렇게 다 배우셨나요?' 눈을 반짝이는 아이에게 내 몸의 진실을 고백하기는 힘들었다. 그렇게 책갈피 사이사이에 숨은 마음을 드러낼 수 없었다.
글을 쓰던 그녀가 고개를 들어서일까, 하나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풋풋한 그녀의 들꽃내음이 배어 있었다. 등에서 등으로 그녀의 따뜻한 체온과 맥박이 전해진다. 송곳니가 서는 느낌에 등을 떼고 하나와 마주본다.
그녀는 여전히 파리한 낯빛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업을 시작하게 되면서 내가 식재료를 가져다주기 때문일까. 몇 달 전보다는 확실히 볼에 살이 올라 있다.
"왜, 바쁜 일이 있니?"
"그게 아니라 마을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어서요. 숲 속에서 피를 빨아먹는 들짐승이 나타나기 시작했대요. 마을의 가축들도 하나둘 없어졌다가 숲 속에서 피가 모조리 빨린 채 발견되었다네요. 나무꾼인 파울로 아저씨가 사라진것도, 사냥꾼인 베드로 아저씨가 없어진것도, 또 그 외의 사람들도 그 들짐승의 소행이라고 하고요. 어떤 사람은 들짐승이 아니라 악마의 소행이라고도 해요."
"그래서 무섭니?"
"선생님이 다치실까 무서워요."
아이가 볼을 붉히며 말한다. 그 마음씨가 고마워 나는 가만히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래. 앞으로는 저녁만 먹고 일찍 돌아가마."
"아뇨. 노을이 지기 전에 돌아가세요."
보통이라면 내가 간다 하더라도 손을 잡고 식탁에 앉힐 아이의 입에서 예상 외의 말이 나왔다. 앙다문 입술에는 결의가 느껴졌다.
"오늘 밤부터, 영주님이 사람들을 이끌고 숲 속을 뒤진다고 해요. 숲 속에서 피 빨아먹는 짐승을 붙잡아 악마는 없다는걸 마을 주민에게 보여준대요.
그러니 이제는 해 진 후에 숲에 계시면 안돼요."
꼭 그렇게 해주세요. 아이는 몇번이고 내 손을 붙잡고 다짐을 받았다. 결국 나는 아이의 손등에 손을 포개고 알았다고 약속을 할 수밖에 없었다.
*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약속을 깰 수밖에 없었다. 내 몸에서는 필수적으로 생명체의 피를 갈구했다. 공개적으로 내가 먹는 음식들은 피가 모두 제거된 음식들이다. 이런 음식을 먹다보면 나는 점점 이성을 잃어갈거고, 결국은 나의 정체를 만인 앞에서 드러내고 말 것이다. 그렇기에 결국 나는 구름에 숨은 달에 의지해 숲 속을 헤맸고, 겨우 잡은 들토끼의 목에 이를 박아 갈증을 해결하고 있었다.
얼마나 정신없이 뜨거운 피를 마시고 있었을까. 멀리서 피냄새에 흥분한 사냥개의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나의 정신머리에 혀를 차며 토끼의 시체를 바닥에 집어던지고 짖는 소리가 들리는 곳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사냥개를 속이기 위해 영지의 숲을 크게 빙 돌며 마을로 달려갔다. 운이 좋다면 들키지 않을 것이고, 운이 나쁘더라도 영지를 떠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왜일까, 떠나기 전에 먼 발치에서라도 보고싶은 얼굴이 생각났다. 그리고 멀리 그 곳이 보였다. 손톱보다도 작은 불빛이 그녀의 방 안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돈이 없어 등불도 켜지 못하는 그녀의 집에서 등불의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선생님, 어서 오세요!" 아이는 평소보다도 더 상기된 얼굴로 나를 향해 손짓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말에 이끌려 창문을 넘어 그녀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가 서둘러 천으로 나의 손과 입을 닦아줬다. 그제서야 내가 송곳니도 감추지 않은 흡혈귀의 모습 그 자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아이는 놀라지도 않고 내 손을 이끌고 침대로 갔다. 그리고는 나를 침대 옆에 서게 한 채 이불을 뒤집어썼다. 개 짖는 소리는 집의 바로 앞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그와 함께 집이 울릴 정도로 누군가가 문을 두드려덌다.
"선생님은 아픈 저를 간호하시느라 종일 집에 계신거에요, 알겠죠?" 하나가 눈을 반짝이며 나에게 다짐을 받아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방문이 거칠게 열렸고, 그와 동시에 아이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하나의 아버지와 시종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주변에서 수상한 것 보지 못했나? 아니, 선생님께서는 이런 곳엔 무슨 일이신가요?"
영주의 시종이 코 끝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리고 그 질문을 묻을 기세로 아이가 크게 기침을 했다. 아이는 입에 아까 내 손을 닦아주었던 수건을 대고 있었다.
"...아, 여기 아픈 환자가 있다고 해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네."
아이가 이불 속에서 내 허벅지를 꼬집은 덕분에 시종의 말에 적절히 둘러댈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질문에도 시종은 계속 코를 찌푸리고 있었다. 그래, 내 옷에 묻은 피와 수건에 묻은 피. 이 방은 피비린내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사냥개가 피냄새를 쫒아 이 곳까지 왔습니다....헌데..."
"이 아이가 폐가 상해 기침을 하고 있네. 전염되는 질병은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어. 나도 곧 성으로 갈테니 자네는 다른 곳을 찾아보는게 좋겠네."
이 말을 끝으로 나는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하나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그녀의 얼굴은 긴장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콩콩 뛰는 맥박이 보이며 다시 목 안에서 갈증이 느껴졌다. 곧 시종이 문을 닫고 그녀의 아버지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더니 집에서 나와 사냥개를 몰며 떠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방 안에 침묵이 가득 찼다.
"알고 있었니?"
"네."
"언제부터?"
"선생님이 한달에 두어번씩 눈가에 그늘이 짙어질때부터요. 그럴때마다 저에게서 멀리 떨어져 앉으셨지만 정작 떠나는 것은 밤 늦게였어요. 하루는 하도 걱정이 되어서 조용히 뒤를 쫒다가..."
흡혈귀면서 뒤에서 따라오는 아이의 기색도 눈치를 채지 못하다니. 나는 자조감에 웃음이 나왔다. 내 웃음을 다르게 해석했는지 하나도 나를 따라 웃었다.
"그럼 너는 내가 무섭지 않니?"
"날 물 기회는 언제든 있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처음 만난 날만 해도 물 수 있으셨겠죠. 하지만 선생님은 짐승만을 잡아 드셨잖아요. 그냥... 좀 식성이 특이하신 분이라 생각해요."
그리고... 아이는 말을 잠시 멈추더니 내 손을 잡는다. 그러고는 자신의 뺨에 내 손을 갖다 댄다. 예민해진 감각 덕분에 손 끝을 통해 아이의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진다.
"...선생님은 좋은 분이시니까요. 저도 그런 선생님이 좋구요."
***
"참 신들은 비슷한거 같아요."
하나는 요즘 성경을 읽고 있었다. 나는 내 무릎을 베고 성경을 읽던 아이를 들여다봤다. 아이는 날 보고 씩 웃더니 이야기를 이어갔다.
"예수는 사랑을 실천하라고 했잖아요. 그러면 천국에 갈거라고. 저희 부모님이 사시던 곳에서는 부처님을 믿었어요. 부처님도 사랑을 베풀고 깨달음을 얻으면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난다고 했어요. 그런걸 보면 사랑은 정말 중요한거 같아요."
아이는 말을 잇다가 기침을 하기 시작한다. 나는 하나를 일으켜 등을 쓸어준다.
"선생님은 신을 믿나요?"
등을 쓸어주던 손이 멎는다. 신을 믿냐고? 그 질문에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몰라 입만을 우물거리고 있는데 아이가 내 대답을 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하나님도 선생님을 사랑할거에요. 그건 제가 장담해요."
"어째서지?"
"선생님은 사랑을 하실 줄 아니까요? 선생님은 날 좋아하잖아요."
"너는 나에게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니?"
아이의 맑은 눈을 보며 나는 불쑥 물었다. 넌 피를 갈망하는 나에게서 신이 구원해줄 영혼을 느끼니? 아이는 이런 나의 가시돋친 질문에 한치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선생님의 눈을 볼 때마다 늘 느껴요. 선생님도 영혼이 있어요."
"영혼이 있는 것은 언젠간 죽기 마련이야.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말씀하셨어요. 사람에게는 혼과 백이 있다고...."
아이가 내 말을 가로막고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쓰기 시작한다.
"사람이 죽으면 혼은 하늘로 올라가 신의 앞에 서고 백은 땅으로 흩어진다고 하죠. 거기다 아버지는 덧붙이셨어요. 흙이 된 백은 다시 새로운 생명체로 태어나 다음 삶을 살게 된다고. 선생님은 그저 혼과 백이 하나가 된 것 아닐까요? 때문에 이렇게 제 옆에 있어주시잖아요. 그리고 선생님이 영원히 살아계시리란 보장도 없잖아요. 그저 오래, 오래오래 사시는 것일수도 있어요."
아이가 손을 뻗어 내 볼을 감싸쥔다.
"마을 사람들을 가엾게 여기시니 최대한 참았다가 깊숙한 숲 속에서 식사를 하셨고, 저를 좋아하시니 글을 알려주셨고.... 그리고 저희 아버지도 좋아해주시고... 그러니까 제 몸이 괜찮다는 거짓말을 하시잖아요."
아이의 마지막 말에 몸이 굳는다. 내 굳은 표정에 아이는 웃으며 내 가슴에 몸을 기댄다.
"선생님처럼 거짓말 못하시는 분은 없을거에요. 애초부터 다 티 났다고요. 선생님 말을 믿는 사람은 제가 나을거라고 믿는 저희 아버지 뿐일거에요."
크득크득, 아이가 웃다가 다시 말을 잇는다.
"그러니까 선생님, 선생님께 영혼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나는 나중에도 선생님을 꼭 만나고 싶거든요. 이쪽의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늘나라에 가서 선생님을 만나던, 아니면 수많은 윤회의 수레바퀴를 돌다가 또 우연히 만나든..."
다시, 언젠가는 만나고 싶어요. 아이는 내 품에서 속삭인다.
"나에게 화 나지 않니? 널 속인거잖아."
한참 후 겨우 입에서 나온 말은 이것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고개를 젓는다. 만족스러워요. 행복하구요. 선생님 품에 있으니 더 좋아요. 아이는 그렇게 내 볼에 입을 맞추고는 따뜻한 햇볕을 이불삼아 낮잠을 잔다.
잠든 하나를 내려다보다 하나의 얼굴에 나 또한 가볍게 입을 맞춘다. 고개를 들다 아이의 목덜미에 눈이 멈췄다.
내가 아이를 물면 아이는 적어도 죽진 않을 것이다. 나와 함께 영생과도 같은 삶을 살 수 있겠지. 하지만...하지만... 그녀의 영혼은.
나는 아이의 몸을 좀 더 편하게 해 주고는 나무에 기댄다. 그래. 하나가 가는 그 순간까지 그녀를 행복하게 해 주자. 그녀도 나와 같은 고뇌를 겪게 할 수는 없다. 그렇게 시간이 멈춘듯한 이 풀밭에서 짧은 낮잠을 잔다.
**
핏빛 노을이 지고나서야 나는 부스스 눈을 떴다. 하나는 아직도 잠에 빠져 있었다. 아이의 얼굴을 쓸어보니 볼이 제법 따끈한게 약간의 열이 있는거 같았다. 집에 가서 편히 자게 해야지. 나는 그녀를 깨워 집으로 함께 천천히 걸어간다. 저 멀리서 가을의 낙엽을 태우는지 검은 연기가 하늘 위로 오르고 있었다.
아이의 집으로 가면 갈수록 연기는 짙어졌다. 아니, 연기가 나는 곳이 하나의 집이었다. 낡은 그녀의 집이 활활 불타고 있었다. 그리고 늙은 남성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네놈이 흡혈귀지?"
마을 사람 몇몇이 하나의 아버지를 빙 둘러싸고는 매질을 하고 있었다. 이미 그는 정신을 잃은 채 피떡이 되어 반사적으로 신음을 내뱉고 있었다. 쓰러진 그의 앞에는 내가 먹은 동물의 사체가 놓여 있었다.
"이 동물들은 숲 속에서 나온 동물들이야. 숲에 가장 가까이 사는 사람들은 네 놈과 네 딸년이지."
"저번에 영주님의 사냥개가 간 곳도 너의 집이었다. 네놈이 흡혈귀지? 말 해! 딸년은 어디에 있어?!"
이미 말 할 기운도 없는 늙은이를 둘러싼 폭행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나는 이를 악문채 손에 힘을 줄 수밖에 없었다. 내 손아귀에 잡힌 하나의 팔을 놓친다면 하나 또한 그녀의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걸어갈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나는 손에 힘을 준 채 하나를 품에 끌어안았다. 아이가 내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격렬하게 나를 밀어냈다.
그들이 의식을 잃은 하나의 아버지를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불더미 속으로 집어던졌다. 나는 차마 그 광경을 보지 못하고 아이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남성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검은 연기를 타고 하늘을 뒤흔들었다. 그와 함께 날 밀어내던 힘이 사라졌다. 아이는 의식을 잃고 쓰려졌다. 나는 무너지는 아이의 몸을 꽉 붙잡았다.
"딸년도 찾아 함께 불태워야 해. 그렇지 않으면 이 일은 계속 반복될거다."
그들의 말에 내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그녀를 지켜야 했다. 그녀는 나에게도 영혼이 있다고 굳게 믿어준 사람이었다. 내 거짓말에도 상냥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말해준 사람이었다.
이곳에는 나와 그녀, 그리고 몇몇의 마을사람만 있을 뿐이었다. 그래. 몇몇 뿐이었다.
나는 하나의 볼을 가볍게 두드렸다. 아이가 부스스 눈을 떴다.
"하나야. 내 말 잘 들어."
입을 열려는 아이의 입을 한 손으로 가볍게 덮었다.
"네 말대로 나에게 영혼이 있다고 믿는다면 날 기다려 줘야해. 내 이름은 레나. 레나야. 언젠간 너의 곁으로 찾아갈거니까 꼭 기억해줘. 정신을 차리면 이 곳에서 멀리멀리 도망가. 그리고 이제껏 너에게 이 말을 하지 못해서 미안해. 진짜 고마워 하나야, 그리고 사랑해."
이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아이의 목덜미를 물었다.
그녀의 피는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달았다. 그리고 내 눈물 때문인지 짠 맛도 난 것 같았다.
황홀경에 빠진 그녀를 바닥에 눕혀두고 나는 숲에서 나와 그들에게 걸어갔다. 하나를 구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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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잠깐 뿐이었다. 그 후에는 마약을 들이마신듯 황홀한 기분이었고 나는 의식을 잃었다. 의식을 되찾았을때엔 내 집도 아버지도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집 앞에는 아버지를 죽인 사람들이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시체가 되어 있었다.
저 멀리에서 횃불이 보였고, 본능적으로 그들이 나를 찾으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날 찾을 수 없게 도망가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들은 나를 찾지 못하고 영지로 돌아갔다.
몇일 후, 나는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흡혈귀를 잡았다는 소문이 이웃 영지까지 퍼졌기 때문이었다. 지금 가면 그녀를 살릴 수 있을지도 몰라. 나는 그 생각 하나만을 가지고 내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너무 늦었었다. 광장의 한 가운데, 검게 탄 십자가가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그녀가 매달려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이후로 수백년, 그녀를 기다리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그녀에 대한 기억도 점점 퇴색되어가는 지금, 나는 내 믿음이 틀린건 아니었을까. 하는 조바심이 든다. 그리고 그 생각 자체가 그녀에 대한 배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래, 나는 이제 죽으려 한다. 아버지에 대해서도 그녀에 대해서도 절절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나는 내가 아니기에...
***
내 메일함으로 유서를 보낸 나는 차 시트에 몸을 파묻었다. 지금 이 스위치를 누르면 차에 설치해놓은 발화장치에 의해 시간이 지나면 차는 불타게 될것이고, 그렇게 나는 그녀의 뒤를 따를 것이다.
스위치를 쓰다듬으며 그녀의 얼굴을 마음 속으로 그리는 그 때, 톡톡, 누군가가 차창을 두드렸다. 무시하려고 했지만 그러다 내가 저지를 사고에 이 사람도 휘말릴까 걱정되어 창문을 내렸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길 좀 물어보려고요!"
제멋대로 뻗친 갈색 머리. 같은 색의 눈동자. 등에는 커다란 배낭을 매고 있는 것이 배낭여행을 하던 도중인걸까.
그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이 곳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저기요? 그녀가 넋을 놓고 있는 나를 다시 한번 부른다.
"아, 예. 이 곳은 이 길을 따라 쭉 가시면 돼요."
"길을 잘못 든 것은 아니구나. 감사합니다!"
싹싹하게 웃으며 그녀가 멀어져간다. 아....
스위치를 주머니에 넣고서는 차에 시동을 건다.
"저기요! 태워다 드릴까요?"
"정말요? 감사합니다!"
그녀가 서둘러 달려오더니 가방을 뒷좌석에 놓고는 조수석에 앉는다.
"저는 레나 옥스턴이라고 해요! 정말 감사합니다."
"고맙긴요, 제가 더 고맙죠. 저는 송하나라고 해요."
이상한 나의 인사에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나는 그저 웃으며 목적지를 향해 차를 운전한다.
그녀가 룸미러를 통해 나의 얼굴을 흘끗흘끗 엿본다. 왜요?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내가 묻자 그녀가 멋쩍은듯 입을 연다.
"이거 작업멘트라고 오해하실까 걱정되는데요... 그래도 궁금해서 물어봐요. 혹시 우리 만난 적 있나요?"
"글쎄요. 작업멘트가 아닌건 알겠는데, 작업멘트같긴 하네요."
나는 웃으며 그녀의 눈을 바라본다. 내 웃음에 그녀가 얼굴을 붉힌다. 하지만 내 눈을 피하지는 않는다. 그래, 아픈 소녀를 안아주던 그 따뜻한 눈 그대로, 나를 마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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