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쿤(@nerf171)님의 썰을 기반으로 작성했습니다. : http://sinkoonote.tistory.com/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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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말하면 안돼.-
언니는 내 팔을 꼭 붙잡은채 이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가장 이성적인 대처방식은 기관의 사람들을 호출해 지금 언니에게 왜 사라졌으며 대체 어디로 갔는지 찾아보는 것일 터. 하지만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휴대전화만 손에 들고 있었다. 언니를 도와줄게는 뭐가 도와줄게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차라리 누군가가 와서 이 사태를 알아채줬으면.' 하는 생각만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몇일의 낮과 몇일의 밤이 지났다. 언니 자체가 내 세상의 중심이었는지 언니가 사라지자 내 세상의 시간 또한 그대로 멈추었다.
<송하나님 정기검진이 있습니다. 내일(21일) 11:00까지 B연구실 지하 1층 B105호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매 달 행하는 가이드와 센티넬의 정기검진일이 다가왔다. 건강관리 뿐 아니라 연구실에서 행하는 가이드와 센티넬을 대상으로 한 연구 자료를 수집하는 목적으로 혈액과 뇌파를 측정하는 것이 이 정기검진이다. 아프다고 얘기를 해야 할까, 하고 잠시 고민을 했지만 아프다고 할 경우 집에 와 언니가 집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누군가가 이 사태를 이해해주길, 이렇게 생각한 것이 막상 현실이 되자 두려움이 밀려왔다. 언니는 자신이 사라지는 것에 대해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이렇게 되는 것은 내가 밖으로 얘기한 것이 아니니 괜찮지 않을까.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짐을 다른 누군가에게 모두 털어놓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수신된 메세지에 제대로 확인해서 읽었음을 알리고 언니의 휴대전화에 온 메세지 또한 읽었음을 알리려고 했다. 하지만 언니의 휴대전화를 열자 어떠한 문자도 와 있지 않다. 페어의 경우 같은 날에 검사를 받기에 언니에게 안내 문자가 오지 않을 리 없는데. 조금 늦게 오는가 해서 핸드폰을 꼭 잡고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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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침이 와도 문자는 오지 않았다. 정말 가야 하는 것인가, 하고 고민을 하다가 겨우 간 B연구실 지하 1층 B105호로 갔다. 보통 내가 가던 곳은 A연구실이었고, 거기에 가면 가이드와 센티넬 페어들이 함께 와 검사를 받았다. 그런 걸 보면 가이드만 있는 지금 이 B연구실은 페어가 없는 가이드, 혹은 센티넬만을 상대로 검사를 실시하는 곳인 듯 했다.
그리고 난 그곳에서 예상치 못한 인물을 만나게 되었다.
"모리슨씨?"
"응. 오랜만이야."
"아저씨도 가이드였나요?"
"아, 몰랐나보네. 나도 가이드야. 지금은 페어가 없는 상태지만. 한두시간 일찍 왔음에도 아직 집에 보내주질 않는구만."
사무실에서 상관으로서 봤던 엄격한 모습과 다르게 서글서글한 삼촌과 같은 모리슨 아저씨의 모습은 색다르게 다가왔다. 그런데 잭 아저씨가 가이드?
"아저씨가 가이드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왜 아직 페어가 없어요?"
"내 센티넬은 오래 전 떠났어."
센티넬과 가이드간의 유대관계를 생각해볼때 짝이 떠난 후의 남은 사람이 느낄 상실감은 매우 클 것이다. 말 실수를 한 것 같아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머리 위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오래 전 일이고말야. 모리슨 아저씨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럼 검사 시간이 오래 걸리는건 새 페어를 찾기 위해서...?"
"아니. 그건 아니고 내 몸 자체가 기관에게는 엄청난 것이라서 그래. 페어를 잃은 그 그날, 내 능력 중 하나가 눈을 뜬거야. 그때부터 난 좀 특이한 가이드가 되었어... 인핸서(Enhancer)라고 아니?"
"아. 센티넬의 능력을 증폭시켜주는..."
"그래. 매뉴얼을 잘 읽었나보네."
최근에 알게 된 새로운 가이드의 능력. 레나 언니를 통해 그 능력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 능력이 왜 페어와 관련이 있는 것일까. 그는 내 표정에서 질문을 읽은 것일까, 가지런히 무릎 위에 손을 모은 모리슨은 먼 곳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 능력은 센티넬의 치유능력을 비롯해 전반적인 능력을 키워주는거야. 센티넬이 가지고 있는 능력, 그러니까 만약 힘이 센 센티넬들은 더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고, 염동력을 가진 센티넬들은 더 무거운 물체를 움직일 수 있거나 다수의 물체를 움직일 수 있을거야. 그러니 인핸서가 된 가이드들은 센티넬과 가이드 중간의 위치에 서게 되는거지. 그들과 함께 전투현장에서 함께 싸우게 되는거지. 그런 인핸서를 한 센티넬에게만 묶어둔다면 문제가 발생하지."
언니가 나에게 보여준 집착을 생각해보면 그의 말이 이해가 갔다. 그러고 보니 그의 손등과 얼굴 이곳저곳에는 전투에 의한 상흔이 남아 있었다.
"그러면 페어를 못 찾게 하는건가요? 가이드가 인핸서인건 어떻게 알죠?"
"어떻게 하겠어, 당연히 실제로 가이딩을 시켜보는거지... 그런데..."
그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인핸서라고 마냥 센티넬에게 도움이 되는건 아냐. 너무 과한건 부작용을 부르지. 역시 평범한게 제일 좋은거같아. 조금이라도 다르면 관심도 공격도 어마어마하게 받게 되거든."
마치 뭔가를 알고 있다는 듯 그는 씩 웃었다. 그가 뭔갈 알고 있는 것 같아 입을 열려는데, 연구원들이 내 이름을 부른다. 피를 뽑고 뇌파를 검사하고 나오니 이미 그는 사라진 뒤였다.
언니가 사라진 일에 대해 결국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그렇게 저녁이 되고 말았다. 연구실 내 구내식당에서 풍겨나오는 저녁식사 냄새를 맡고 나서야 하루가 다 지나간다는걸 알게 되었다.
오늘로 언니가 사라진지 정확하게 일주일이 되는 날이다. 대체 어디로 사라진건지, 밥은 먹은건지 모든 걱정이 밀려와 한숨으로 빠져나왔다. 현관문을 열면 늘 들려오던 언니의 반가운 목소리 대신에 정적과 어둠이 날 반겼다.
오늘도 언니는 오지 않는걸까, 나는 불을 켤 기운도 없어 거실 한가운데에 주저앉고 말았다.
***
과거의 날 보기도 했고 미래의 날 보기도 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설명할 단어를 찾지 못해 그저 머릿속에 꾹꾹 새겨두려 노력을 했다.
수 없이 많은 시간대와 공간대에 도착한다. 내가 아는 목소리의 주인이 있는 곳, 아예 처음 듣는 목소리들만이 있는 장소에 떨어진다. 그 곳에서 나는 이방인일 뿐이다. "지금이 몇년, 몇월 몇일인가요?" 아무리 크게 물어봐도 그들은 날 봐주지 않는다.
확실하게 특정할 수 있는 시간대를 이동하기도 했다. 내 눈을 무지막지한 철제 도구로 뽑는 필립 크라이머, 소리를 지르는 나, 그리고 내 손에 죽는 그.
하나와 처음 만났을 때. 약국에서 나를 잡아 준 교복을 입은 나의 송하나. 토끼를 만지고 손을 벌벌 떨며 기겁을 하는 나, 그걸 보며 허리를 접으며 웃는 하나.
그리고 이윽고 내가 도착한 곳은 내가 처음 보는 곳이었다. 하나와, 한 사내와, 그리고 나. 배에서 피를 흘리는 그녀.
"빨리 하나를 데리고 도망가! 네가 할 수 있는건 그것 뿐이잖아!" 나는 고함을 친다. 하지만 눈이 먼 나는 바보처럼 손을 더듬어 하나의 상처만을 누르고 있을 뿐이다. 하나의 입이 뭐라고 뻐끔거린다. 하지만 바보같은 나는 그 모습도 알아채지 못한다.
하나를 끌어안고 그 말을 듣고싶어 그녀에게 달려가 그녀에게 팔을 뻗는다. 하지만 내 팔은 마치 연기처럼 나 자신과 하나를 뚫고 들어간다. 하나가 미소를 지으며 나의 볼을 쓰다듬는다. 다행이야. 그녀가 속삭인다.
뭐가 다행이야. 나는 만져지지 않는 그녀를 만지려고 허공을 움켜잡는다. 하지만 이내 시야는 다시 빛으로 물들고 처음 보는 풍경이 눈 앞에 펼쳐져 있다.
부드러운 잔디밭, 그리고 그네의자, 거기에 포개듯 앉은 하나와 나. 내 위에 앉은 하나는 나의 얼굴을 사랑스럽다는 듯 잡고 입을 맞춘다. 그 모습은 너무도 익숙해 마치 우리가 부부인 양 보였다. 한참 눈을 감고 입맞춤을 즐기던 "내"가 눈을 떠 나와 눈을 마주친다. "나"는 나를 보며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 짧은 웃음을 끝으로 나는 다시 다른 시간대로 이동한다.
혼란스러운 광경들을 머릿속에 넣어두기 위해 입술을 깨문다. 내가 보는 것은 미래와 과거 뿐 아니었어? 방금 본 그 장면들은 뭐지?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거야? 내가 드디어 미쳐가는건가? 나는 이제 어디로 가는 거고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앞으로 내가 볼 풍경들을 받아들일 각오가 나지 않는다. 나는 눈을 꼭 감고 내 어깨를 끌어안는다.
"언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하나가 나를 부른 것일까, 아니면 이 곳의 또다른 나를 부른걸까?
"...내, 내 말 들려요?"
하지만 나는 용기를 내 손을 풀고 질문을 던진다. 제발, 내 질문에 대답을 해 줘.
"언니!"
그녀가 내 품으로 뛰어든다. 나에게 닿는 그녀의 무게가 너무 반가워 손을 뻗어 그녀를 단단히 붙잡는다. 어깨가 아픈지 하나가 끙, 하는 신음소리를 낸다. 지금은 내가 아는 지금일까?
"지금이 언제야? 몇년 몇월 몇일?"
***
어둠 속에서 난데없이 사람이 나타났다. 도둑? 강도? 수많은 생각들이 왔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저 익숙한 그림자, 저 사람은...
"언니?"
나는 언니가 있는 곳으로 다가간다. 내 움직임에 반응해 거실의 불이 환하게 켜진다. 정말 언니다. 설마, 일주일 전처럼 사라지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내 말이 들리는걸까? 나는 무서워 손을 뻗지 못한 채 언니를 불렀다. 평소에도 곧은 자세를 하고 있지는 않지만 유난히 몸을 움츠리고 있는 언니는 자신의 어깨를 끌어안고 있다 내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언니는 조심스럽게 "내 말이 들려요?" 라고 나에게 묻는다.
"언니!"
나는 내 몸을 생각하지도 않고 언니에게 뛰어든다. 언니가 나를 붙잡아줬음에도 아직 완벽하게 낫지 않은 어깨가 비명을 지른다. 언니는 나를 붙잡은 손을 위로 올려 내 어깨를 꽉 붙잡는다. 아, 하고 비명을 지르지만 내 비명은 아랑곳 않고 언니는 나에게 지금이 언제냐고 묻는다. 날짜를 묻는 언니의 손이 가늘게 떨린다.
"언니! 어디에 갔다 왔어요? 내가 얼마나 찾았는데!"
"그게 중요한게 아냐! 지금이 언제야? 자, 자기는 지금 몇살이고 내가 사라진지 얼마나 되었어? 하루? 한달? 일년?"
일주일만에 나타나 한다는 질문이 겨우 몇월 몇일이냐고? 나는 언니의 태도에 속이 상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언니는 내 질문을 무시한 채 자신의 말만을 했다. 나를 바라보는 언니의 붉게 상기된 볼, 그리고 내가 아는 그 눈. 움직임에 따라 이리저리 형광등 불빛이 이곳저곳으로 반사되는 그 눈. 나의 언니였다.
점점 내 어깨를 잡아오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손을 통해 언니가 느끼는 혼란과 두려움이 전달된다. 일단은 언니를 진정시켜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일주일, 일주일 지났어요. 오늘은 10월 24일... 2071년이에요."
아픔에 말이 도중에 끊긴다. 그제서야 내 어깨가 아프다는걸 알아챘는지 언니가 급하게 어깨에서 손을 뗀다. 하지만 이번에는 한 손은 내 손을, 그리고 반대 손은 내 얼굴을 쓰다듬는다.
"아무에게도 말 하지 않았어?"
"응. 말 안했어. 언니가 하지 말라고 했으니까요. 언니는 괜찮아?"
내 대답을 듣고나서야 언니의 몸에서 힘이 빠진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그대로 주저앉는다. 내 팔을 잡은 채 주저앉아서 나 또한 언니를 따라서 제자리에 앉는다. 흥분이 가라앉은 언니의 얼굴은 피로와 두려움으로 헬쓱해져 있었다. 그 동안 어디에 간거야? 밥은 제대로 먹었어? 잠은?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금방이라도 울거같은 언니의 얼굴을 손으로 쓸어줬다.
하아, 언니가 가느다랗게 떨리는 한숨을 뱉더니 내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언니..."
"잠시만... 잠시만 이렇게 있어줘."
"무서웠구나... 우리 언니..."
"응... 무서웠어. 돌아오지 못할까봐. 늘 돌아왔지만. 그래도 무서웠어."
"나도 무서웠어요. 언니가 어디로 사라져서 돌아오지 못할까봐."
"미안 하나야. 1년에 한번씩, 내 능력 때문인지 가끔 이래. 내가 어떻게 조절할 수 있는게 아니야. 이 때의 나는 과거, 미래, 어디든 돌아다녀. 그리고 거기서..."
언니의 말은 도중에 끊겼다. 그리고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그제서야 내 손에 닿는 언니의 몸이 차디차다는걸 느꼈다.
"밥은 먹었어? 잠은?"
언니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이동할때는 배도 고프지 않고 졸리지도 않아..."
이동할때는...이라. 그럼 이제 일주일간 먹지도 자지도 못한 언니의 몸이 신호를 보내겠구나. 언니의 얼굴은 못 볼걸 본 듯 굳어있었다. 난 언니의 가이드로서, 하냥 이렇게 있을 수는 없었다.
"자, 일어나 언니."
"응?"
"씻고 와요. 그럼 언니가 좋아하는 칩 샌드위치 해 놓을게. 감기 들지 않게 뜨거운 물에 몸 담그고 나오면 훨씬 나을거야. 그치?"
"그냥 자기 안고싶어...정말...나..."
언니는 아직 불안하다는 듯 내 품으로 파고든다. 하지만 나는 언니의 손을 잡고 욕실로 데리고 간다.
"괜찮아. 이제 언니는 어디 안 갈거에요. 왜냐면 지금 언니는 배가 고플거고, 졸리기도 할거니까. 내가 언니에게 맛있는 칩 샌드위치를 해줄거니까."
씻고 식당으로 와요. 나는 언니를 욕실에 둔 채 주방으로 간다.
**
젖은 머리 때문일까, 어깨에 빠진 힘 때문일까, 언니는 기운없는 걸음으로 조용히 걸어와 식탁에 앉는다. 따뜻하게 구운 햄버거 빵 사이에 갓 튀긴 감자튀김을 수북히 올리고 케첩과 머스타드 소스를 듬뿍 뿌렸다. 남은 감자튀김은 샌드위치의 주변에 소복히 쌓아 언니에게 전해주었다.
이 음식은 언니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그래서 나도 특별히 만드는 법을 배워 언니에게 몇 번이고 만들어줬다. 처음 몇 번은 마지못해 맛있다는 말을 하며 먹었지만 어느새 실력이 늘었는지 최근에 만든 것은 맛있다며 하나 더 달라고 떼를 썼었는데... 식사를 못한지 꽤 되었을텐데도 언니는 손끝으로 감자튀김을 건드리기만 했다. 개운하게 씻고 나왔지만 언니의 얼굴에 낀 그늘에서 언니가 미처 해결하지 못한 걱정이 있음을 느낀다.
"대체 뭘 보고 온거에요?"
"그냥..."
우물쭈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언니가 답답해 입을 열어 다그치려다 그만둔다. 대체 뭘 봤으면 이렇게 무서워하지? 언니가 무서워할건 무엇일까? 언니의 죽음? 크게 다치는 모습? ...나?
"혹시 내가 다치는걸 봤어요?"
내 질문에 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나의 죽음이나 부상이라... 내 자신이 다치거나 죽게 된다니, 그런 소리를 듣는 나도 마음이 편치 않다. 하지만 나는 언니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언니의 접시에 있는 감자튀김을 집어들고 태연한 목소리를 낸다.
"괜찮아요. 언니가 보는게 진짜 이루어진다는 보장도 없잖아요?"
"아냐."
언니가 단호하게 내 말을 끊는다. 그 단호한 말에 놀라 손에 든 감자튀김을 바닥으로 떨어뜨린다. 감자튀김을 주으려 식탁 밑으로 고개를 숙이는데 머리 위에서 언니의 울적한 목소리가 울린다.
"아냐, 하나야. 내가 본 것은 일어났던 과거이자 정확하게 일어나게 될 미래야."
과거이자 미래. 언니가 보고 온 것은 한 치의 변화도 줄 수 없는걸까. 나는 감자튀김을 집어든채 한참을 고민한다. 그렇게 우리 사이에 정적이 흐른다. 나는 어떻게든 언니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싶어서 머리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린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나의 생각들...아...
"언니, 언니가 보는건 정확한 과거이자 미래라고 했죠?"
언니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과거는 바뀔 수 없지. 정해져 있으니까요. 마치 이 감자튀김이 과거에 감자였던 것처럼."
나는 잠시 말을 끊고는 말을 다시 잇는다. 부디 이 급조된 생각이 언니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해 주었음 한다.
"하지만 미래는 바뀔 수 있잖아? 이 감자가 썰려서 같은 감자튀김이 되었지만 하나는 지금 접시 위에 있고, 하나는 내 손에 들려있고 하나는 언니가 먹을 빵 사이에 끼워져 있지. 언니는 미리 보고 왔잖아..."
감자튀김을 들고 열심히 설명을 했지만 나 자신이 든 비유가 적절하다고 확신을 할 수 없었다. 반대편에 앉은 언니의 얼굴은 조각상마냥 변화가 없다. 반응없는 청중과 설득력 없는 근거에 점점 목소리가 작아진다.
"미안... 내가 생각해도 설명이 엉망이다. 근데 언니가 어떻게든 해주리라 믿어.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언니가 기분이 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사과를 하며 눈치를 본다. 언니의 보석으로 된 눈은 어떤 감정도 담지 못한 채 여전히 아름답게 반짝이기만 할 뿐이다. 눈은 감정을 담고 있다고 하는데, 대체 언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걸까. 한숨을 쉬려는데 언니가 픽, 하고 바람이 빠지는거 같은 웃음소리를 낸다.
"언니? 지금 나 비웃은거야?"
"아니. 그럴듯해서. 그렇네. 결정권은 나에게 있었어. 내가 그만한 힘을 갖고 있었는데... 또 잊고 있었네. 고마워 하나야."
기운이 나는지 언니는 손을 뻗어 접시에 담긴 샌드위치를 들어 한 입 베어문다. 음 맛있다! 샌드위치를 덥썩덥썩 베어무는 언니를 보며 나는 의아함을 느꼈다.
"정말? 정말 내 말을 듣고 기운이 나?"
"응. 내가 봤던건 다 이루어졌어. 그럼 앞으로 이루어질걸 미리 알면 바꿀 수도 있잖아. 자기 손에 든 감자튀김이 떨어질걸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그 감자튀김을 먼저 먹었을거야. 역시 자기는 똑똑해."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해주니 나야 고맙지마.....언니! 보인다고요? 언니 눈이?"
하나 더 집은 감자튀김이 또 식탁 아래로 떨어진다, 아니 떨어지려고 했다. 이번에는 언니가 떨어지는 소리를 어떻게 들었는지 손을 아래로 뻗어 그걸 잡아 입에 넣었다.
"응. 더 신기한건데 이제야 물어보네. 나 이렇게 시간을 돌아다닐때엔 과거나 미래를 생생히 볼 수 있어. 비록 내가 본 것을 제대로 설명할 어휘는 부족하지만... 그래, 여튼 볼 수 있어."
"그럼 거기에 가서 뭘 할 수도 있어요?"
"아니. 그냥 볼 수만 있어. 만약 내가 뭘 할수 있었으면 자기를 구하고 왔겠지. 그래서 더 무서워. 그렇게 계속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볼 수만 있을까봐... 이런 안좋은 이야기는 더 하지 말자. 나 배고파."
언니는 애써 밝은 척을 하며 크게 샌드위치를 베어문다. 하지만 그 밝음 뒤에 아직도 두려움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과거의 언니에게는 가진 것이 없었다. 그렇기에 가장 무서운것이라 하면 자기가 죽는 것 정도이겠지. 하지만 자신의 가이드가 생긴 센티넬이라면, 집착에 가까운 소유욕을 보인 가이드의 죽음을 지켜보기만 할 수 있다면 어떨까. 센티넬, 레나 옥스턴의 두려움과 절망감은 어떨까.
"떠돌아 다니는거 아냐."
그래서 가이드로서의 나는 불안에 떠는 내 센티넬에게 해 줄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해주기로 했다.
"응?"
"언니는 과거도 미래도 보고 온다며. 그리고 그 미래는 앞으로 바뀔 수도 있잖아. 그런거면 떠돌아 다니는게 아니라 여행하는거지. 비록 외부인의 입장이지만 그 시간대를 보는거잖아. 조금이라도 좋게 생각하자면... 그래, 언니는 시간여행을 하고 오는거야."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나는 손을 뻗어 소스가 묻은 언니의 입가를 닦아준다.
***
신기한 애야. 어떻게 내가 가진 두려움과 불안을 한번에 날려보낼수 있지? 이게 가이드의 힘일까? 아니. 이건 꼬맹이가 가진 원래의 성품일거라 생각한다. 내 꼬맹이는 존재 자체로 주변 사람들을 편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다. 정말 고마워서, 그리고 또 사랑스러워서 나는 꼬맹이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왜, 또 무서워? 괜찮아. 어디 안 갈거야. 여기 있어."
하나는 내가 또 무서워한다 생각했는지 내 머리를 쓸어준다. 그 감촉이 기분좋아 난 하나의 반대편 손을 끌어다 입가에 가져다댄다. 평소라면 기겁을 했을거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어서인지 내 행동을 눈감아주는거 같다. 이것 봐. 가이드라면 내 감정이 어떤지 알텐데 가이딩을 하고 있지 않으니 내 감정을 모르잖아. 그녀의 상냥함이 기분좋아 크득크득 웃는다.
"왜 웃어? 뭐 좋은 일이라도 생각났어?"
"응?"
아니라고 말하려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미래가 확실히 들어맞는다는거... 처음 확신한게 몇 달 전이야."
"몇달 전? 무슨 일이었는데?"
"자기를 만난거."
"나를 만나? 연구실에서? ....아..."
하나도 그제서야 기억이 났는지 그걸 봤어요? 하고 묻는다.
"응. 6년 전에. 주변에 있던 여자애들과 비슷한 옷을 입었고... 넘어진 나를 도와주다 손이 부딪혔고. 6년 전에 있었던 시간 여행에서 몇달 전의 일을 보며 본능적으로 알았어. 아, 이 애가 나의 가이드구나. 하고."
"신기하네요. 거긴 왜 갔는지 몰라... 근데 왜 여태 얘기를 하지 않았어요?"
"거길 간건 가이딩 약물을 받기 위해서 간 거였고, 너라면 다짜고짜 내가 널 봤었다고 얘기하면 그렇게 쉽게 믿지 않을거잖아. 그냥 나만의 분홍빛 비밀로 감춰두려고 했지."
"분홍빛 비밀은... 아저씨같은 농담 하지 말라고 했죠."
농담을 섞어 대답을 하자 그녀가 내 볼을 가볍게 잡아당긴다.
"그리고 또... 우리 미래도 보고 왔어. 우리 부부 같더라. 그리고..."
어라? 정말 말이 안 되는데? 그 때는 안좋은 것을 보고 난 뒤라 정신이 없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이상하다. 내가 눈이 보인다고?
"왜요, 또 안좋은 일이야?"
머리 위에서 하나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니, 나는 그녀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을 잇는다.
"내가 눈이 보였어."
"눈이 보여? 수술같은거나 VR기계인가?"
"아니... 내 눈 같았는데..."
그 때를 다시 회상한다. 하나가 내 무릎 위로 올라가 적극적으로 나에게 입을 맞춰왔고... 나를 보는 내 눈은 지금 내 딱딱해보이는 눈을 사람의 눈처럼 바꾼 듯... 그래. 그냥 변한것처럼 보였어. 그래. 그건 내 눈이었어.
그리고 하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성숙하고, 예쁘고...또 적극적이었지... 그래, 지금의 나보다는 훨씬 나이가 많고 더 아름다운...
"언니, 얼굴이 빨간데? 왜 부끄러워 하고 있어?"
내 눈이 어떻게 된 것인지 생각하다 생각이 더 중요한 곳으로 새느라 다른 곳에 신경을 쓰지 않은 틈에 하나가 내 손을 잡고 내 감정을 읽었는지 수상한 목소리로 나에게 묻는다. 대체 언니 뭘 보고 온거야?
"아니... 내 눈은 맞아. 변한거 같아. 어떻게 변했는지는 모르겠어.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흘렀는지 자기가 지금 나보다 나이가 많아보였고 또 되게 나에게 키스를 잘 해...아야얏!"
마지막 말이 부끄러웠는지 하나가 내 손을 꽉 잡아 내가 엄살을 부린다. 엄살 부리지 마요, 언니! 하나가 나에게 으름장을 놓는다.
"하여간, 틈만 나면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어."
하나는 부끄러운지 내 턱 아래까지 이불을 끌어올리더니 퍽퍽 내 가슴을 두드린다.
"어서 자. 헛소리나 하고..."
"그래도 자기 되게 이뻤어. 정말 그게 이루어진다면 좋겠다."
"그러게요..."
"응? 자기가 이뻐졌으면 좋겠다고? 자기는 지금도 이쁜데?"
내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라며 하나가 내 팔뚝을 한 대 친다.
"내 말은! 정말 언니가 보고 온 그대로 언니의 눈이 보였으면 좋겠다고요. 안 졸려요? 어서 자."
그렇구나. 하나가 해 주는 말이 너무 고맙고 예뻐 나는 손을 이불 밖으로 꺼내 그녀의 얼굴을 만지작거린다. 그녀의 말 때문일까. 물러나있던 잠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응... 자야지..."
"그래요, 어서 자."
그녀가 내 손에 얼굴을 기댄다. 보드라운 볼을 나는 한없이 만지며 눈을 감는다.
"빨리 그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러면 자기를 꼭 안고 침대로 들어갈거야.."
무거운 입을 움직여 본심을 드러낸다.
"지금도 침대에서 끈덕지게 붙어서 안아대고 있는데 무슨 소리에요. 그래요, 그 날이 오면 내가 기꺼이 안겨드려야지."
하나는 내 말의 뜻을 잘못 이해했는지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다. 하여간, 아직 애구나. 나는 피식 웃으며 밀려드는 잠에 빠진다.
***
"그래요, 그 장애인은 돌연변이라니까요. 능력이 한두개가 아니었어."
렉스는 후드를 뒤집어 쓴 남성의 앞에서 부들부들 떨며 이야기를 했다. 건너편에 자신의 센티넬이 죽어있었다. 자신의 센티넬이 약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후드를 쓴 남성이 너무나도 강했던 탓이다. 가이드 약물 취급을 당하지 않기 위해, 살기 위해서 렉스는 기억을 쥐어짰다.
그래, 레나 옥스턴은 시간을 조종하는 능력만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날, 내가 목이 졸렸을 때, 그 때는 어떤 감정도 담지 않은 그 눈만이 기억에 박혀 있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것도 생각이 난다.
살기 위해서 그녀의 손등을 긁고 또 긁었다. 살갗이 찢어질 정도로 긁었었다. 분명히 피가 배어나오는걸 보았는데 눈 깜짝할 순간에 살은 아물고 또 아물었다.
"시간만 가지고 노는게 아니었어. 그래, 그 짧은 시간만 이동하는게 어떻게 S급이야. 그 비정상적인 회복능력, 그건 보통 센티넬보다 더 월등했다고. 그것만으로도 A급은 받을 수 있었을거야. 그래서 그 여자가 S급 판정을 받은거였어."
"그 때 그녀의 가이드는 뭘 하고 있었지?"
"뭐, 뭐?"
"두 번 묻지 않는다."
"가,가, 가이딩을 하고 있었어! 센티넬이 폭주하는거 같았으니까! 그 혈통없는 돌연변이도 나름 가이드라고 폭주는 일어나지 않았어!"
후드가 기울어진다. 지금의 이야기는 흥미있는거구나. 그래. 나는 살았어. 그가 안심하는 순간 그의 배에서 온몸으로 뜨거운 통증이 퍼졌다. 내려다보니 장갑을 낀 후드 남성의 손이 자신의 배에 칼을 쑤셔박고 있었다.
"그래. 흥미로운 이야기야. 근데 그거 알아? 그 정보를 빼고 나니 너는 쓸모가 없어."
콧속 가득한 썩은내를 마지막으로 렉스는 숨을 거둔다. 남성은 장갑으로 칼을 닦은 후에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레나 옥스턴... 그리고 송하나. 둘 다 쓸모가 있어. 송하나. 그녀는 인핸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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