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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판2차

Duet


만나고 싶지 않은 원수를 볼 수 있는 곳이라 했다. 잊어버린 친우를 만날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리운 사람을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1.
"가지마요. 돌아온 사람이 없잖아."

그녀가 올려다보며 나를 붙잡았다. 서로가 밝힌 이름 뒷자리가 같아서일까. 피도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미코테 여성은 어느새 진짜 내 여동생이 되어 있었다.

"내가 붙잡지 않음 평생 후회할거같아서 그래. 가지마."

그녀는 나에게 하프를 건넸다. 부숴진 곳을 투박한 전사의 손으로 어떻게든 봉합한, 금방이라도 부숴질듯한 악기였다. 네가 갈 곳은 그 곳이 아냐. 다시 예전처럼, 예전처럼 살 수 없을까?
"그 일" 이후에 내가 내 손으로 부숴버린 하프. 나는 하프를 가져가 가볍게 튕겼다. 느슨해져 다신 당길 수 없는 하프 줄은 힘 없는 소리를 냈다. 더 이상 음율이 아니었다.
씩 웃는 내 웃음을 보고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바닥으로 한두방울 떨어지는 물방울. 그녀가 잡을 수 있는건 내 소매자락 뿐이었다.

2.
채석공방. 우연하게 밝혀진 고대의 미궁은 초보 모험자와 몇몇 광부들만 드나들던 한적한 곳을 북적하게 만들었다. 고대의 비밀을 얻고자 하는 학자들, 명예를 쫒는 모험가들, 뿔의 아이가 만들어주는 무기를 바라는 전사들. 흥분과 기대로 가득 찬 그 공간에서 나 홀로 텅 비어있었다.
빛나는 활을 손에 쥐었지만 별 감흥이 없었다. 지하로, 지하로, 요기(妖氣)가 섞여 음습해진 공기도 이미 무거워진 내 마음에 한 톨 무게도 지우지 못했다.

"아..."

그리고 지하 43층의 한 구석, 핏빛 정원의 한 구석에서 널 발견했다.

어쩜, 내 기억속의 너 그대로인지.
너는 마물들 한 가운데에 있었다.
자의식이 없는 에테르체인 소환수를 어루만지던 너. 한낱 꼭두각시에 불과한 에기를 쓰다듬으며 잘 부탁하던, 명령에 조금이라도 늦게 응해 다칠거 같으면 에기야! 하고 소리치던 네가, 지하에서 악취를 풍기는 마물들을 쓰다듬고 있었다.
예전의 네가 푸른 하늘 아래, 저 위의 풀밭에서 그랬듯 너의 친구들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역겹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건 아니다. 네가 끈적한 고름같은걸 내뿜는 마물들 사이에 있는게 싫어 그곳에 불을 지르고 싶었다. 불이 붙은 화살을 시위에 걸어 당겼다. 그극, 하고 시위가 울었다.

"...이런 결말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어. 하지만 후회는 안해. 나는 나름 만족하고 있어."

너의 말을 듣기 전까진 말이다. 팽팽히 당겨진 시위는 네 목소리를 듣자 다시 느슨해졌다.

3.
"걔가 늘 경고하긴 했어. 그렇게 크고 무서운 야만신을 계속 몸에 깃들게 한다면 언젠간 심하게 다치고 말거라고. 사실 그놈이 걱정한건 내가 그 야만신이 되는거겠지. 알고 있었어. 내 뒤에서 마력이 깃든 노래를 불러주면서도 늘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는걸. 그래서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잖아."

말의 내용과 다르게 너는 밝게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 그립고, 또 사무쳤다. 잠시 고개를 숙인채 마물을 쓰다듬던 넌 다시 밝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행인건 있지? 이거봐! 나는 아직 작은 라라펠이거든? 그 무서운 야만신이 아냐!"

팔을 양쪽으로 쭉 뻗으며 익살스럽게 말한 그녀는 다시 입을 닫았다. 그러고는 한참 후에야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만약 내가 야만신이 되버린다면 그놈이 날 처치하러 올거야. 뭐, 걔 실력을 못믿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라도 내가 그 녀석을 죽이면 어떡해 해."

그리고 두번째로 다행인건... 그녀는 숨을 돌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곳에서 그 누구도 다치지 않았어. 모두 다 지킬 수 있었어. 이기지 못할 전투였고, 특히 모두를 지키려고 했던 대장이나 부대장이 죽을 수도 있었어. 그들이 없다면 부대가 원래대로 유지되지는 않을거야. 아르가 실력이 대단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부대 운영같은걸 맡을 사람같진 않고. 모두가 여우네 부대에 의탁하는것도 민폐잖아."

정말 다행이야. 그치? 그녀는 어깨 위에 앉아있던 박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진짜, 진짜 다행인건... 체셔쿤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내 뜻에 따라줄거란걸 알아서야."

내 이름이 나오자 나는 놀라 무심코 소리를 낼 뻔했다. 입술을 깨물어 소리를 죽인 내 존재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연신 다행이야. 다행이야. 라고 말했다.

"그때 내가 마나가 없었거든. 바하무트를 부를 기운이 없었어. 아니, 에기까지도 유지할 힘이 없었어. 그리고 그녀석은 내가 약간의 마나라도 있었다면 바하무트를 부를거란걸 알고 있었어. 당연히 나보다도 뒤에 있던 녀석인데 전황이 절망적이라는것과 이걸 뒤집으려면 무모한 수를 둘 거란걸 알았겠지. 내가 그 때 바하무트를 불러 힘을 해방한다는게 자살이나 다름 없단걸 알고 있었어. 하지만 그는 불러줬어. 음유시인 아니랄까봐 노래는 들을 만 하더라. 아니, 내 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듣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였어."

입을 다문 프마는 목을 내려다봤다. 목에는 내가 초보 보석공예가일 시절 서툰 솜씨로 가공한 반지가 매달려 있었다. 그 반지를 만지며 프마는 쓴웃음을 지었다.

"좀 미안하긴 해. 이거 돌려줄걸, 여기까지 갖고온거 있지?"

내 목에도 그것과 같은 반지가 있었다. 단 한번, 그녀가 나에게 물건을 건네준 것 외엔 반지의 힘을 쓴 적이 없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수십번이고 반지의 힘을 불러내려 애를 썼지만 반지는 자신의 짝이 있던 곳으로 날 데려가지 못했었다.

누가 반지를 만들어 줬나요? 주례는 물었었다. 그... 친구요. 친구가 만들어줬어요. 졸지에 언약자를 친구로 뚝 떨어뜨린 그 언약식에서 나는 투정을 부렸다. 친구 맞잖아. 우리 친구 아냐? 프마는 입을 비쭉 내민 내 다리를 토닥이며 말했었다. 나 목아프다. 앉아줄래? 그녀의 말 한마디에 나는 예복의 순백색에도 아랑곳 앉고 식장에 주저앉았었다.
"친구"가 만들어준 반지, 그 찬란한 추억들을 뒤로한 채 프마는 계속 말했다.

"그러니까, 그는 마지막까지도 내 뜻을 이해해줄거야. 내 말을 들어줄거야. 내가 그를 좋아하는것보다 그가 날 더 좋아하거든. 그치 너굴아?"

그녀가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마주봤다. 말이 끝나자 작게 그녀의 입술이 달싹였다.

-미아즈라-

주문이 퍼지고, 그녀가 쓰다듬던 마물의 움직임이 순간 둔해졌다. 내 존재가 드러나자 그들은 뿔뿔히 흩어지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아아... 알다마다."

태산을 끌어안듯 무릎 한 쪽을 꿇고 활을 하늘로 향해 시위를 당겼다. 하늘의 문이 열리고 빽빽한 화살이 그녀와 마물들에게로 향했다.

궁수자리 화살.

기술의 힘을 알아챘는지 전송석탑이 화살보다 먼저 빛을 발했다. 이게 그녀의 뜻이겠지. 하지만 난 그녀의 부탁을 끝까지 들어주진 않았다.

적들을 애도하는 추모의 인사 대신 나는 화살의 비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그녀의 작은 어깨를 끌어안았다.

4.
한가한 날이었다. 나는 방에서 악기들을 조율하고 있었다.

똑똑. 문의 아랫쪽에서 노크소리가 나더니 프마가 들어왔다. 무슨 일인지 묻지도 않았는데 "심심해서."라며 그녀는 씩 웃었다.

내가 악기를 조율하는걸 바라보던 그녀가 건반악기의 의자 위로 기어올랐다. 뚱.땅.땅. 건반을 두드리던 그녀가 이내 작은 선율을 연주했다.

"악기를 다룰 줄 알았어?"

"음. 예전에,잠깐... 뭐 초라하지만..."

버릇처럼 자신없게 그녀는 말했다.

"초라한건 혼자니까 그래."

나는 건반악기의 의자 한쪽에 기대앉았다. 늘 가지고 다니는 하프를 꺼냈다.

"연주해봐. 풍성하게 만들어줄게."

"엥? 음유시인인데? 내가 너무 밀리는거 아냐?"
그녀는 머뭇거리더니 소심하게 연주를 다시 시작했다. 그에 맞춰 내가 현을 퉁겼다. 담백하던 음율 둘이 섞이며 조화를 이뤘다.

조화를 이루는 기쁨. 화음의 기쁨에 그녀가 씩 웃는다. 그녀가 주도하는 메인 멜로디에 내가 응하는 선율.
그렇게 연주는 한동안, 한동안 이어졌다.

5.
-독주곡은 외롭잖아 그치? 오늘은 내가 메인 멜로디를 맡을래.
-이미 메인은 나였거든?

하늘에서 화살이 쏟아지기까지의 찰나. 우리는 눈으로 대화를 나누며 웃었다.

내 마지막은 그렇게 협주곡으로 끝났다. 원한다면 우아한 시인으로 끝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우아한 시인 대신 협주곡의 연주가이기를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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