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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판2차

수호천절

일주일 전까지만 하더라도 화덕에 풀무질을 하면 땀이 비오듯 쏟아져 머릿수건을 서너개나 갈아썼는데.
가루렌은 머릿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생각했다. 벌써 가을이라고 땀이 적게 나는군. 또 몇주 뒤면 화덕에 언 손을 녹이겠구나.
이렇듯 시간은 티 나지 않으면서도 사소한 곳에서 변화를 부른다.

화덕은 이제 풀무질이 필요하지 않은지 딱딱이는 소리를 내며 장작을 살라먹고 있었다. 어제 일을 끝내며 오늘 할 일을 적어둔 목록을 들여다보며 렌이는 오늘의 마수걸이는 누가 할 것인지 내심 기대를 했다.

"오늘 일은 양손검을 만드는검다..오늘 의뢰가 들어오지 않는다면 아마 오늘은 놀겠군요."

주변에 늘 사람들이 있었어서일까. 그는 버릇처럼 자신이 할 일을 허공에 알리곤 일을 시작했다. 뭐, 지금 자신이 집이자 일터로 쓰는 이 작은 집엔 자신 외의 누구도 없다. 하지만 허리에 찬 단조망치를 집어드는 그는 자신의 이 쓸쓸한 버릇이 버릇인줄도 모르는 듯 했다.

그는 화덕에 주괴들을 집어넣곤 풀무를 밟았다. 훅훅 풀무서 바람이 나와 화덕의 온도를 올렸다. 한참을 쉬지 않고 밟으니 벌겋게 달아오른 주괴에 변화가 일어났다. 그제야 풀무질을 멈춘 그는 달아오른 주괴를 집어들고는 단조망치로 그것을 내리쳤다. 한참 내리쳐 얇게 변한 판을 물에 식히곤 반으로 뚝 분지른다. 분지른 두 판을 다시 달군 그는 그걸 겹쳐 또 두드리길 반복한다. 얇은 판들이 여러겹 겹치게 된 이 과정은 검을 점점 더 강하게 만든다.

붉게 달아오른 금속을 두드리는 그는 이 검을 휘두를 검사를 상상한다. 자신을 믿는 동료를 위해 적들의 시선을 뺏는 검사. 동료들은 내가 지켜야 할 짐이 아니다. 내가 적들의 시선을 끌면 끌수록 역으로 이것은 나를 덜 다치게 해준다. 촘촘히 달라붙는 이 금속판처럼 우린 서로가 서로를 믿었었다.

"우리가 서로를 안 믿은건 아님다. 단지 이젠 서로를 못 지켜줄거 같아서였죠."

쓸데없는 감상이 끼어들었다. 이런 마음으론 검을 만들수 없어. 그는 망가진 금속판을 집어던졌다. 가을이기 때문일까. 오늘은 망치를 들 기분이 아니었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는데 문에 단 경종이 짤랑이며 운다. 젠장, 빨리 문을 닫을걸. 그는 재빨리 손님을 맞이하는 카운터로 간다.

"어서옵쇼. 단단한 갑옷부터 날선 단검까지. 모두다 취급하는 가루렌의 대장간임다."

"여기 주문제작도 가능한가요?"

후드를 뒤집어쓴 라라펠 손님이다. 후드를 입은걸 보면 마법사일까? 마법사라면 여기보다는 가죽공예점이 나을텐데...

"네. 가능합니다만, 대체 뭘 주문하시려고..."

"도끼를 주문하려고 해요. 라라펠 여성이 쓰는 전투도끼요."

"아, 도끼요. 손님이 쓰실검까?"

"음. 그건 아니고 선물할건데, 빠르게 되었음 좋겠어요."

"재료에 따라 다르죠. 제가 재료까지 구해야 한다면 구하는 시간에 따라 이삼일 걸립니다. 뭐, 그만큼 비용도 세지고요. 또 재료가 고급 재료라면 그 단단함 때문에 또 오래 걸리죠."

"그럼 빨리 이야기를 진행해야겠네요. 주괴는 가져왔어요. 그리고 오늘 안에, 가능하면 저녁 안에 끝났으면 좋겠어요."

카운터에 놓은 라라펠 발판을 딛고 올라선 손님은 까치발을 들고 주괴가 든 주머니를 카운터에 올려놨다. 자루를 열고 들여다보니 보통 단단한 금속이 아니다. 오늘 하루는 문을 닫고 이것만 해야할듯 하다.
렌은 주문서를 꺼내 가격과 기간을 적었다. 그 사이에 카운터에는 길이 담긴 주머니가 올라왔다.

"그리고 장식을 달 수 있나요?"

"달겠다면 달 수 있슴다."

"손잡이...는 그렇고 이걸 폼멜로 만들어 도끼에 달 수 있나요?"

상대가 건넨걸 보니 뿔이다. 무슨 뿔이지? 오거같은 마물의 뿔도 산양같은 짐승의 뿔도 아니다. 뿔을 들여다보는 사이에 주문자는 서류의 빈 칸을 채우곤 접혀진 종이를 내려놓는다.

"선수금에 배달비도 포함해 넣었어요. 꼭 오늘 저녁까지, 여기로 가져와주세요."

폴짝, 발판에서 뛰어내린 오늘 첫 손님은 급한듯 소매를 휘두르며 나갔다.

무슨 뿔인지 묻지도 못했는데... 주문자 이름은 뭐지? 렌은 주소가 적힌 쪽지를 펼쳤다. 그리고 놀란듯 몸을 떨었다. 허둥지둥 가게 밖으로 나가봤지만 그 사람은 그새 사라진듯 비슷한 모습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귀신이라도 본듯 렌은 한참을 서 있었다. 귀신인지 사람인지. 확인할 길은 망치를 드는 것 뿐이었다.


***

수호천절, 수호성인들이 하늘로 올라간 틈에 여러 마물들이 사람들을 괴롭힌다는 날이다.
이 날을 믿는 사람들은 낮에 최대한 모든 일을 하고 일찍 방 문을 닫고 하루를 마감한다. 그리고 이 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짖궂게도 마물의 차림을 하고 밤새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놀래키곤 한다.
수호천절에 정말 성인들의 가호가 사라지는지는 증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확실한건 낮의 수호천절은 어느정도 시끌벅적한 분위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날의 이딜샤이어에 나타날 리 없는 모습이 나타났다.

챙이 넓은 흰 모자와 흰 원피스는 농가의 아가씨같기도 하다. 하지만 내리깐 눈으로 좌판의 물건을 바라보는 그 눈빛은 마녀의 것임이 분명했다.

--

"내일 좋은 물건을 내놓을거니 꼭 오세요."

"거짓말. 대체 거짓말을 하면서도 날 부르는 이유가 뭐지?"

"그러게요, 제가 왜 거짓말을 했을까요. 그냥 아르가유라님이 오신다는 소문만 나면 장터에 사람들이 몰리니 그렇죠. 내일은 수호천절이라 보통보다 더 많은 물건이 풀릴거라고요."

"그만큼의 모조품이 풀린다는 소리 아냐?"

"에이. 아르씨를 위해 제가 준비한 선물도 있을겁니다. 그러니 부디... 그냥 아침 일찍 왔다 가셔도 되니까요. 네?"

--

오죽 급했으면 나에게 연락을 했을까. 이런 감정을 가지게 되다니 나도 많이 무뎌졌나봐. 아니, 그냥 심심한걸까. 양산을 펴고 슬슬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 거리를 걷는 아르는 자신에게 연락을 보낸 상인과 눈을 마주쳤다. 이미 아침 일찍 집으로 소포가 도착해 있었다. 금과 루비로 장식된 상자를 열면 안에 펼쳐진 무도회장에서 자그마한 인형들이 손을 마주잡고 짧은 춤을 춘다. 태엽이 아니라 고대의 마법으로 작동되는 오르골 장난감. 흡족하진 않았지만 귀엽네, 할 정도의 물건이었다.

어?

길을 걷던 그녀를 붙잡은건 짧은 오르골 노래였다. 아침에 들은 자신의 오르골과 화음을 이루는 노래. 옆을 가리던 양산을 들고 노래가 들리는 곳을 바라봤다. 누군가가 상자를 열고 노랫소리를 듣고 있었다. 은과 사파이어로 장식된 상자. 분명 자신의 것과 짝인 오르골이다.

"저거 살게요."

아르가유라는 가격을 묻지도 않고 오르골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먼저 들고 있었는걸요? 이거 제가 살게요. 얼마죠?"

그 누군가는 아르의 말에 반박하며 오르골 상자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후드를 뒤집어 써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라라펠 여성이었다. 상인인걸까? 귀찮네. 아르가유라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아직 가격을 말하지 않았죠? 생각한 가격보다 높은 가격으로 살거니 내게 파는게 좋을거에요."

"제가 먼저 왔죠? 설마 돈에 따라 움직이는 신의없는 상인인거에요?"

"상인은 원래 이윤을 많이 남기는 사람이에요."

"신뢰도 이윤의 한 종류라 생각하는데요?"

얼마만에 하는 말싸움이지? 그녀는 살짝 웃었다. 우스운 일이야. 성가시기만 했는데 없으니 재미 하나가 사라졌잖아.

쓸쓸한 기분으로 그녀는 앞에 앉은 라라펠의 뒤통수를, 그리고 상인을 바라봤다.

곤란한건 상인이었다. 신뢰도 돈도 잃고싶지 않았다. 그런 그가 매달릴 것은 운 뿐이었다.

아르가유라가 주사위 세 개를 잡고 굴렸다. 돌바닥에 주사위가 다라락, 구르더니 멈췄다.

4...6....6

상대 또한 주사위를 잡고 굴린다.

6...6...

마지막 주사위 하나는 돌바닥의 틈에 한번 걸리기라도 한 건지 딱,딱, 튀어오르더니 한 면을 위로 보인채 멈췄다.

"네. 결과는 결과니까요. 이 오르골은 라라펠 손님에게 팔겠습니다. 구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시감이 밀려왔다. 물건을 가지고 한 실랑이. 주사위 놀이. 그리고 웃기지도 않은 주사위 운.
있을 리 없는 사람이었다.
기시감이 주는 현기증에 아르가유라는 머리를 살짝 흔들었다.

감사합니다. 많이 파세요. 종이로 포장된 오르골을 든 채 라라펠 여성은 멀어진다.

"저기..."

붙잡기도 전에 후드를 뒤집어쓴 여성은 에테르의 흐름에 몸을 맡긴다. 살짝, 부는 바람에 후드가 살짝 젖혀진다. 가려져있던 머리칼이 살폿 보인다.

있을 리 없는 사람.

아르가유라는 인파 속에서 꼿꼿히 몸을 세우곤 그녀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본게, 마물의 장난은 아니겠지? 누군가에게 묻고 싶었다.

***

백오는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어떤 미친놈인지 모르겠지만 단단히 실수한 것이다. 그 마물은, 아니 언니는 내 손으로 죽였다. 바위로 짓이긴 머리통, 땅에 떨어져 박살나버린 토마토같은 그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하다. 그 증거로, 뿔을 가져왔었잖아. 그걸 불멸대의 책상 위에 던지듯 올려놨었다.

- 프마언니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이 마물에게 죽은게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이 뿔은 가져가겠습니다. 언니에 대한 복수의 의미로...-

오래 전 일이 머릿속에서 재생된다. 나는 패잔병이었다. 하지만 내가 알려야 할건 승전보였다. 그 모순 속에서 내 목소리는 볼품없었다.

무슨 복수야. 언니를 죽인건 나야. 쓴웃음을 머금은 그녀는 손에 든 지팡이를 흘끗 바라본다. 그 끝에 장식된 언니의 뿔.

---

"백오야. 누님 말야, 누님... 죽은거 맞지."
"백오. 내가 프마를 본거같아."

---

도망치듯 부대를 도망쳐놔왔다. 그리고 즐거움을 찾아 뛰고 또 뛰었다. 그 일로부터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을까. 두 사람에게 동시에 같은 연락이 왔다. 둘 모두 혼란스러운 목소리였다. 또 이런 질문을 한다는게 매우 미안해하는듯한 목소리였다.

"응. 죽었어. 내가 죽였잖아."

그래서 아무렇지 않은듯 대답했다.

"오랜만에 만나서 밥이나 먹을까. 너굴씨네에 가서. 모처럼 프마 언니 이야기도 하고 그랬으니."

그래서 보고싶었다. 프마언니도, 너굴씨도, 아르도, 그리고 렌이도. 또 다른 사람들도, 다른 친구들도.
만나서 프마언니를 흉내낸 그 사람을, 우리 부대, 아니 연성부대의 마음에 상처를 준 그 사람을 잔뜩 욕하고 싶었다.

"너굴씨!"

저 멀리 체셔쿤이 보인다. 도끼에 지팡이, 무거운 차림이었지만 그를 보자마자 뛰어간다.

"어유, 무슨 일이야?"

빗자루로 집 앞을 쓸던 그가 환하게 웃으며 날 반긴다. 그가 저런 웃음을 짓게 된게 얼마나 되었지. 도시에서 벗어나 매일 무덤을 관리하기 때문일까, 그의 얼굴은 예전처럼 건강함으로 빛나진 않는다. 꺼칠해진 얼굴을 보니 가슴이 아파와 정강이를 걷어찼다.

"밥 제대로 챙겨먹으랬지? 프마언니 집을 관리할거면 건강해야 하잖아!"

무릎을 꿇고 정강이를 쓰다듬는 그는 피식 웃는다.

"그러게, 일이 많으니 살이 빠지나봐. 근데 무슨 일이야. 연락도 없이. 바쁘진 않아?"

"뭐, 나 없어도 다들 잘 사니까. 나도 가끔씩은 쉬고싶어."

"그래. 프마에게 인사도 하고 몇일 푹 쉬다 가. 안 그래도 술이 잘 익었는데. 혼자 안 마셔도 되니 다행이다."

"그래? 잘됐네. 사실 오늘 여기에 렌이랑 아르도 올거야."

"다른 사람들은? 꾸꾸나 무아스나..."

그가 손가락을 접으며 연성부대에 속한 이들의 이름을 말한다.

"다른 사람들은... 바빠."

느르흐는 학자의 길을 접었다. 뭐가 그의 마음에 변화를 준 것일까. 최근 소식으로는 신쿤과 함께 도마에 가서 새로운 전투술을 배운다고 했다.

무아스는 길드의뢰로 바쁘다. 자신이 앞에서 방패를 들지 않은 죄책감일까. 강해지겠다며 모습을 감추고 간간히 소식만을 전해듣고 있다.

그리고... 그리고... 에오르제아를 떠나 아예 다른 곳으로 떠나버린 이들도 있었다.

너굴씨가 묻는, 오랜만에 듣는 이름들이 하나하나 내 가슴을 찌른다. 세상서 아예 멀리 떨어진 그는 천진한 표정으로 그들의 안부를 묻는다.

"...그렇구나. 프마 만나볼래?"

내 말에서 다른 뜻을 읽은걸까. 그는 고개를 끄덕이곤 날 무덤으로 이끈다.
유골은 한 점도 묻히지 않은 무덤. 언니의 머리색과 같은 흰 비석을 만진다.

언니, 여기있는거 맞지? 내가... 언니를 죽인거 맞지?


***


속속들이 사람들이 도착했다. 기다란 나무상자를 든 렌이, 작은 상자를 든 아르.

"선물은 필요 없는데..."

스튜를 끓이던 그가 국자를 내려놓고 기분좋게 손님을 맞이했다. 하지만 둘 모두 매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형아꺼 아님다. 주문이에요."

"체셔씨 것이 아니에요. 그냥 오늘 이걸로 할 얘기가 있어서요. 수호천절에 맞는 귀신 이야기랄까."

"남의 집에 오면서 빈손은 실례야. 무려 잘 익은 술이 있는 집이라고. 근데 무슨 얘기고 주문이야?"

등을 돌리고 사람 수만큼 스튜를 담으며 너굴씨가 투덜대듯 물었다.
우리 셋은 모두 서로의 눈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한참 후에, 아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프마를 본 거 같아서...."


"....주문 용지를 보니 주소지가 여기였어요. 그리고 주문자는... 그냥 다른거 없이 'P'라고만 적혀 있었고요."

시각은 자정을 넘겼다. 식탁 위의 음식은 그 누구의 손도 닿은 흔적이 없었다. 대신에 너굴씨가 자랑한 잘 익은 술은 몇 병이고 비워져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멈춘 오르골 음악이 주는 침묵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래. 그래서 백오에게 다 연락을 했구나."

너굴씨가 침묵을 깼다. 백오는 이에 대해 뭐 아는게 없어?

"나도 아는건 없어..."

"정말 고약하군. 죽은 사람을 가지고 장난을 치다니."

"장난도 이 정도면 도가 지나쳐. 마음 속 상처를 후비는 거잖아."

아르씨가 오르골의 뚜껑을 다시 열었다.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경쾌한 춤곡. 인형들의 춤. 누군가의 놀음에 맞춰 꼭두각시가 된 느낌.

-"!!!"-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모두가 어깨를 움찔인다. 누구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란듯 다시 한번,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진동에 맞춰 천장에 매달린 램프가 흔들린다.

"누구세요?"

너굴씨가 긴장한 목소리로 묻는다. 답은 없다. 대신에 한번 더, 문이 흔들린다.

"열지 마십쇼. 오늘은 수호천절임다. 이 늦은 밤에 오는건 수호성인들이 없는 틈에 사람을 놀리려는 귀신이나 마물이죠."

-"!!!"-

아르는 의자 옆에 기대놓은 지팡이를 쓰다듬는다. 먼지를 털어내는듯한 사소한 몸짓이었지만 그것이 너굴씨에게 뭘 알려준걸까. 너굴씨는 문을 열었다.

달도 별도 없는 칠흑같은 바깥. 곧 있음 밤이 저물고 새벽이 오리라는 징후였다. 램프 빛에 한 라라펠이 반사된다. 지나치게 큰 로브와 후드는 그의 턱조차 가려주었다.

"모였구나...다...는...아니지만."


***


집 안의 모두는 얼어붙어 자신이 들고있는 무기를 집어들었다. 하지만 가장 먼저 행동을 보인건 무기가 없는 체셔쿤이었다.

눈 앞의 라라펠을 번쩍 안아올리더니 꽉 끌어안는다. 그러곤 무릎을 꿇는다.

"꿈이 아니겠지?"

"꿈은 아냐. 하지만 수호천절의 장난일수도."

"꿈이 아니라면 상관없어."
체셔쿤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놓치기 싫다는듯 두 팔은 힘을 더해갔다.

"이제야 구분할수 있겠군. 그 목소리의 주인은 하나 뿐이야. 그리고 우리 눈 앞에 있어서는 안돼."

아르가유라는 식탁 위에 두 손을 올리고 일어섰다. 긴 시간이 그녀에게 준 경험은 눈 앞의 사람을 마냥 기뻐할순 없다는 것이었다.

"....프마누님?"

가루렌은 모두가 머릿속에 떠올린 이름을 입에 담았다. 미치도록 그리운. 동시에 보고싶지 않은.
체셔쿤의 품 속에 안긴 이는 체셔쿤의 어깨에 손을 댔다. 자신을 껴안은 팔의 힘이 느슨해지자 그녀는 후드를 뒤로 젖혔다. 은빛 머리칼이 드러났다.

"모두 안녕... 다들 내가 반갑지 않은거야?"


***


"반갑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누님은 대체 뭡니까. 누님이긴 한 검까?"

"그 누님은 맞을거야. 하지만 중요한건 어떻게 여기에 왔냐는거지. 그녀는..."
우리가 죽인걸. 아르가유라의 뒷말은 백오의 몸을 더욱 굳게 했다.

"오늘이니까. 오늘은 세상의 균형이 깨지는 날이니까. 성인들이 보호하는 장소에 나같이 있으면 안되는 것들도 오는 날이니까."

"왜 온거지?"

"오고 싶으니까. 전하지 못한 말. 주지 못한 선물. 받지 못한 포옹과 인사 때문에."

"너는 전과 같은 존재야?"

"전과 같을리가. 일단 난 유령이야. 마물...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일단 뿔은 없네?"

아르가유라의 심문과도 같은 질문에 프마는 유쾌하게 대답했다.
보고싶은 사람이었다. 악연이었지만 친구였고 동료였다. 저 사람의 마지막을 볼 사람은 나였지만 그런 식은 아니었다.

체셔쿤의 품에서 나온 프마는 아르가유라에게 걸어갔다. 품에서 꺼낸건 작은 오르골박스.

"네가 맞구나."

"응. 아침의 그 사람은 나였어. 오랜만에 싸우니 즐거웠지?"

"...지겨웠어."

"그렇구나. 나는 정말 재밌었는데. 할 일 없는 귀신이라 그런걸까?"

프마는 낄낄대며 웃었다. 그 천진한 웃음에 아르가유라의 입꼬리도 살짝 풀어졌다.
프마는 아르가유라에게 오르골박스를 건넸다.

"그 자리 그대로 있어줘서 고마워. 나랑 다퉈줘서 고맙고. 나의 마지막까지 함께 있어줘서 고마워. 이건 내가 주는 선물. 마지막까지 재밌게 싸워줘서 고맙다고."
 
"성가신 너와 놀아준 값으론 적당한가? 잘 모르겠지만 그래. 받아줄게."

프마는 옆 자리의 가루렌에게 갔다.

"누님을 다시 볼거라곤 생각도 못했어요. 가게에서 알려줬으면 더 일찍 알았을텐데..."

"그랬다면 이렇게 모두가 모이기도 전에 너에게 잡혀서 신나게 놀다가 하루가 다 갔을거야. 주문한 물건을 보여줄래?"

가루렌은 긴 상자를 열었다. 하루라는 짧은 시간동안 만들어낸 도끼는 그 짧은 시간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교했다. 푸르스름하게 날이 선 도끼의 단 하나뿐인 장식은 손잡이에 달린 뿔 장식 뿐이었다.

"내 기대보다 더 잘 만들어줬네. 시간이 촉박했을텐데..."

"선수금이 어마어마해서요. 누님을 본 것만으로도 값은 넘치게 치뤘으니 돈은 이제 됐어요. 저도 누님을 한번 안아봅시다."

렌도 프마를 힘껏 껴안았다. 개성이 뚜렷한 부대원들의 뜻을 꺾지 않으면서도 하나의 길로 이끌어준 가루렌의 든든한 팔. 프마는 그 팔에 안겨 고마워, 하고 속삭였다. 투사의 길을 놓고 대장장이가 된 그의 손을 잡으며 프마의 눈썹이 슬픈 듯 내려갔다.

"도망치는 뜻으로 대장장이가 된거야?"

"아뇨... 도망치는 건 아녜요. 다만 부대를 이끌고 모두를 지키기에는 제 힘이 모자란걸 느낀거죠."

"아냐. 그냥 사고일 뿐이었어."

"사고여도... 일은 벌어진검다. 우리가 서로를 못 믿는건 아니에요. 다만 자기 자신을 못 믿게 된거죠.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킬 수 있으리라 믿었었거든요..."

"사랑하는 사람을 너 혼자 지키려고 하지 마. 네 옆의 사람이, 네 뒤의 사람이 같이 지켜줄거야."
잘 생각해봐. 프마는 어린 동생에게 충고하듯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몸을 돌렸다. 유일하게 아직까지 아무 말 없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그녀를 그 누구보다도 따랐던 사람이었다.

"백오."


언니가 무서운건 아니었다. 근데 나는 왜 돌아온 언니를 반갑게 맞이하지 못하는걸까. 무서운걸까? 이 감정은 뭘까?

"언니..."

의자에서 내려온 백오는 찬찬히 프마를 살펴봤다. 자신이 뭉개버린 그 얼굴은 상처 하나 없이 말끔했다. 아니, 자신이 죽인 요마와 지금 눈 앞의 귀신이 같은 인물이었는지도 모르겠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프지 않았어? 미안해. 정말 미안했어. 내가 더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면, 내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면... 언니 실망했지? 도망이나 치고, 남의 뒤에서 숨어 있다가 책임을 진다면서 회피한 일을 그제서야 처리하고. 그러고서는 언니라는 사람이 없는 듯 다시 도끼를 든 모험가가 되고."

쏟아져나오는 두서없는 말과 함께 백오의 큰 눈에서도 눈물이 떨어졌다. 부대의 중임을 맡고 있는 부 부대장이었지만 그녀는 어린 소녀였다. 살리고 싶은 사람은 살리면 안 될 사람, 아니 마물이었다. 그래서 발을 돌렸다. 마물이 돌아와서 모두를 크게 다치게 하고 나서야 그 마물을, 아니 언니를 죽였다. 죽인 마물이 언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언니의 머리를 뭉갠 것은. 그래서일까. 내가 백마도사의 길에서 벗어나 도끼를 잡게 된 것은.

아냐, 아냐 백오야. 아냐. 프마는 백오를 끌어안았다. 잘게 떨리는 어깨를, 터져버린 울음을 가슴으로 끌어안았다.

"아냐 백오야. 우리야말로 미안해. 너 혼자 모든 걸 짊어지게 해서 미안해. 너는 아직 어린 아이인걸.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이렇게 매일매일을 살아줘서 고마워. 나는 그 말을 하러 왔어. 백오가 열심히 살아줘서 고맙다고. 날 잊지 않아줘서 고맙다고."

프마는 백오의 지팡이를 손 끝으로 쓸었다. 백마도사로서 활동하지는 않지만 십자가마냥 등에 짊어지고 있는 지팡이에는 프마의 뿔이 장식되어 있었다. 끝내 잊지 못한 언니를 그렇게라도 추억하는 양. 언니의 죽음까지도 자신의 어깨에 짊어진 소녀의 등에서 그녀는 십자가를 살짝 내려놨다.

고마워. 고개 숙이지 마. 너 덕분에 모두가 죽지 않고 살아있는걸? 프마는 백오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날 잊지 않고 이렇게 추억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죄책감으로 날 떠올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렇게 널 안아주는 언니, 그리고 너에게 투정을 부리는 언니로 기억해주길 바라. 그런 뜻에서, 자. 선물이야 받아줘."

프마는 가루렌에게서 받은 도끼를 백오에게 건넸다. 렌은 손잡이 끝에 달려있는 뿔 장식의 정체를 이제야 알 듯 했다. 프마의 뿔을 항상 봐 온 백오 또한 도끼자루 끝의 폼멜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알아차린것 같았다.

"날 기억해줘. 잊지 말아줘. 네가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살던, 나는 그 모습을 응원할거야. 다만 그 삶에 내가 십자가가 되지 않았음 해."

도끼를 백오의 손에 쥐어준 프마는 그 손등을 자신의 손으로 덮었다. 백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고마워. 백오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프마는 체셔쿤을 바라봤다.

"시체도 없는 무덤을 지키고 있던 거야?"

"너와의 추억을 되새기고 있던 거지."

"너는 살아있는 사람이잖아. 네 삶을 살아야지. 사람은 추억을 먹고살순 없어."

"그렇지...나는 괜찮아."

그는 평소에 보여주던 웃음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가 고집이 센건 알고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말은 하지만 분명히 자신과의 추억에 매달려 살고 있었고 또 죽어가고 있었다.

프마는 그 앞으로 걸어갔다. 자신 앞에 있으면 그는 아무데서나 주저앉아 자신과 눈을 맞췄다. 리트리버종의 강아지처럼 충실한 눈. 그 눈에 씻을 수 없는 고통과 슬픔.

"너는 날 어느정도 잊어도 되겠다. 추억만 되올리고 다시 씹어 내린다면, 너 또한 누군가의 추억만이 될거야."

추억... 이지. 추억이라면 추억이야. 프마는 그의 눈에 묻은 추억들을 지우려 머리를 쓰다듬던 손으로 눈가도 두어번 쓸어주었다.

"너도... 너무 우리 걱정하지마. 자유롭게 떠나도 되니까."

모든 것은 죽으면 에테르로 돌아간다. 즉, 세상으로 에테르가 환원된다.
그녀가 이렇게 우릴 만나러 올 수 있는건 그녀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 죄책감 때문인걸까. 그녀의 에테르에 우리의 마음이 묻어 날아갈수도 없이 무거워진걸까.

체셔쿤은 걱정스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프마에게 애써 웃어보였다. 그리고 문을 열었을때와 마찬가지로 프마를 꽉 끌어안았다. 안개가 가득 낀 눈으로 백오를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백오는 체셔쿤의 뜻을 안듯 지팡이를 높게 들었다.

---
떠나간자여
그대와의 이별을 바라지 않았소
붙잡고자한 미련, 슬픔, 사죄가
그대의 날개를 붙잡은건가.

떠나간자여
날아가시게 어머니 계신 곳으로
그대의 걱정, 웃음, 울음은
우리가 대신 하겠네.

떠나간자여
곧 다시 만나세
들로, 강으로 하늘로.
그대를 잊지 않겠네.
---

활을 내려놓았다 해도 체셔쿤은 음유시인이었다.
마력을 담은 노래가 방 안을 울렸다. 백오는 체셔쿤의 뜻에 따라 에테르를 정화시키는 주문을 외웠다.
프마라는 한 여인을 구성하는 에테르가 서서히 흩어졌다. 노래처럼 들로, 강으로, 하늘로 날아갔다.

"잘가. 언니."
"안녕. 내 언약자."

체셔쿤의 품 안이 서서히 가벼워졌다. 먼 하늘서 희미한 빛이 퍼지기 시작했다.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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