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주변을 둘러본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보지 않은 척, 눈을 돌린다. 게중 몇몇 눈치 없는 사람들은 우리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그리고 더 눈치가 없는 사람은 옆사람을 툭툭 치며 '송하나야, 송하나 아냐?'라는 말을 한다.
그리고 그 무리들의 뒷편, 안보이는 곳에서는 분명히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있다. 내일 신문 연예면 맨 앞장에 대문짝만하게 낼 사진. 그 사진을 찍으려고 대포같은 카메라를 나에게 조준하고 있다.
식은땀이 흐른다. 어떻게 하지. 남들보다 아주 많이 우수한 내 머리로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눈을 돌려서 앞에 앉은 사람을 본다. 아직도 아랫입술이 나와 있다. 평소에 강아지처럼 동그란 눈도 내리깔고 있으니 차가워 보인다.
'아...진짜
죽겠네…"
빨리 결정을 내려야 한다. 타이밍은 이 때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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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기야! 이거 봐! 자기 얼굴이 있는 티셔츠야! 오오! 이건 꼬맹이 피규어야! 진짜 비슷해!"
언니가 흥분했다. 평소에도 피에 각성제가 항상 흐르는것처럼 흥분해 있지만 지금 저 상태는 평소 상태에 에너지 음료를 대여섯캔 마신 정도로 흥분해있다.
이곳이 언니가 충분히 흥분할만한 곳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렇게 미칠듯 흥분할줄은 몰랐다.
'길 잃음 골치아프니 내 손 잡고 다녀야 해.' 라고 말을 해서인지 손은 꼭 잡고 있다. 하지만 목줄을 팽팽하게 당기는 강아지같이 언니는 앞으로 튀어나갈거 같다.
스타리그 결승전, 암암리에 준우승자에 대한 토토가 열리고 있다. 준우승자 명단 중 최고 배당금은 송하나. 즉, 나의 우승은 이미 기정사실이다.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스타리그 결승전은 송하나 온리전처럼 변해버렸다. 메카 피규어, 나와 누군가를 엮은 동인지, 티셔츠, 머그컵 등… 나와 관련된 상품들이 팔리고 있다.
나는 이 곳을 지나는게 너무 거북하다. 그도 그럴것이 자신의 얼굴이 사방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는데 누가 그곳을 당당하게 걸어갈까.
하지만 내 옆에 있는 이 강아지, 아니 언니는 이 곳을 꼭 지나가야겠다는 강한 의지를 피력하고 있다. 저 언니를 데리고 있으려면 반드시 이 곳을 통과해야 한다.
언니와 부끄러움. 나는 이 두개를 사이에 두고 잠시간 저울질을 한다. 그리고 결정.
"언니, 여기 꼭 들를거지?"
"응! 여기 재밌는거 많은데. 자기는 안 갈거야?"
"응. 나는 곧 있으면 경기니까 좀 집중도 해야 하고…"
강아지의 귀가 처진다.
"그럼 언니, 경기시간에 맞춰 경기장으로 와. 경기장은 경기시간이 되면 사람들이 가장 몰리는 곳이니까 헤메진 않을거야."
꼬리가 파다다닥, 보이진 않지만 언니는 정말 강아지같다. 정말? 그래도 돼? 내가 옆에 없어도 될까? 언니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입에 담는다. 적어도 그런 소리를 할거면 손에 지갑을 들고 하지 않았음 한다.
"응. 그럼 경기장에서 봐. 뭐 언니가 일방적으로 나를 보는거겠지만."
나는 손을 흔든다. 보통이면 뽀뽀도 해주고 껴안아주겠지만 여기는 바깥, 아니 언니는 지금 나에게 신경을 쓰지 못하는거 같다. 내가 흔드는 손을 무시하고 부스들을 향해 돌진한다.
점멸은 사용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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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환호성, 헤드폰을 착용하면 환호성은 잦아들고 게임 음성만이 들린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게임을 진행한다. 진다는건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그렇다고 설렁설렁 할 생각도 없다.
하지만 게임을 하고 있는 부스 밖에서 언뜻언뜻 안으로 비치는 대형 전광판의 영상이 묘하다. 잠시 눈을 돌려 전광판을 바라본다. 아, 나는 곧 그것을 왜 봤을까 후회한다.
보통 전광판에는 게임 화면을 보여주거나 선수들이 경기를 진행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오늘은 카메라가 다른걸 찍고 있다.
옷은 언제 갈아입은 걸까. 내 얼굴이 프린트된 티셔츠를 입고 있다. 위장용 선글라스를 꼈지만 저 보잉 선글라스를 쓴 영국 여자는 언니밖에 없다. 의자 아래에서 삐죽하니 전신 베게가 보인다. 수트를 입은 내 전신이 인쇄된 베개이다. 카메라가 언니의 전신샷을 담는다. 수북하게 놓여있는 저 쇼핑백을 보니 부스에 있는 모든 물건을 털어온거 같다.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나는 알 수 있다. 저 언니가 얼굴이 시뻘겋게 되어서 소리를 지르는건 나를 응원한다는 것임을.
이건 축구경기가 아니다. 몇번 프리미어리그를 볼 때 맥주캔을 흔들어대며 목에 핏대를 세우는 언니를 보긴 했다. 근데 그 응원을 e-스포츠에서도 할 줄은 몰랐다.
다시 화면이 경기화면으로 넘어간다. 아차, 언니에게 정신을 파느라 손을 놀게 하고 있었다. 화면을 보니 내 본진에 적 유닛이 돌아다니고 있다.
언니가 목에 핏대를 세운게 그거구나. 어쩐지 입모양에 F 발음이 많긴 했어. 나는 애써 침착하게 경기를 진행한다. 일단 이기고, 이기고 나서 언니랑 차분히 얘기를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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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하나 선수. 오늘도 당연히 우승을 했어요, 우승 소감이 어떻습니까?"
"우유삐깐 쏭하나! 싸랑해요 쏭하나! 휘이이이이익!!!"
준우승자가 상금과 준우승 트로피를 받은 후, 내 인터뷰가 시작된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내가 올라오자 마자 밑에서 어눌한 한국어로 내 이름을 열창하는 언니의 목소리 때문에 머릿속이 새하얗다.
경기를 하러 오기 전에 언니들이랑 아저씨들이 조언을 해 줬는데…
----- 하나, 너의 우승소감은… 다소 겸손하지 않아.
----- 타인 덕분이라고 하는게 겸손해 보이죠.
----- 운이 좋아서, 라고 하는게 좋지.
----- 그냥 웃어.
----- 격언도 덧붙이는게 좋아요. 1%의 재능과 99%의 노력이라던가...
"운이 좋아 결승전에서 홍진우 선수와 만난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 아나운서의 얼굴이 굳는다. 저 멀리 준우승자인 홍진우 선수가 나를 노려본다.
다른 말을 해야지.
"역시 우승을 하기 위해서는 99%의 재능과 약간의 노력이 필요한거죠."
아.. 망했어. 웃자, 웃자.
억지로 입꼬리를 들어올린다. 아나운서의 이마에 땀이 비친다. 내일 연예계 뉴스 헤드라인이 눈 앞에 보이는 듯 하다.
<99%의 재능을 가진 송하나, 홍진우를 결승전에서 만난게 다행.>
아래에서는 언니가 계속 환호성을 지른다. 아… 모르겠다.
아나운서가 다른 질문으로 유도한다.
"송하나씨는 한국 나이로는 스무살, 만 나이로는 이제 열아홉이신데, 이상형은 어떻게 되시죠?"
언니를 보고 있어서일까. 나도 모르게 답이 술술 나온다.
"활기찬 사람일까요. 웃을때 햇빛이 느껴지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잘 뛰는 사람. 그리고 진지할때 멋있는 사람이요. 어… 무엇보다 저보다 게임은 잘해야해요."
말하다 보니 언니를 설명하는거 같아 뒷 말을 붙인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진다.
"아, 송하나씨보다 게임을 잘해야 한다고요? 그런 사람이 있을까요? 하하하."
자연스럽게 아나운서가 웃음을 유도한다. 나도 웃는다.
"그럼 지금 연애를 하고 있는 사람은 있나요? 나이를 보면 사랑 한 두번은 이상하지도 않은 나이인데…"
어떻게 대답을 하지? 늘 준비한 대답은 있다. 하지만 아래에서 언니가 나를 보고 있다. 언니, 카메라, 아나운서, …..
"아뇨, 아직은 없어요. 저는 바쁘니까요."
카메라를 바라보며 결국 준비한 대답을 한다.
눈을 내리니 그새 언니가 사라졌다. 운이 좋았으면 이 대답을 듣지 않았을수도 있다.
그 다음의 질문은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대충대충. 모든걸 적당히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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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오래 기다렸지! 나 이겼어! 잘했다고 칭찬해줘!"
언니에게 고개를 들이댄다. 보통이라면 '잘했어 꼬맹이! 역시 자기는 대단해!' 하며 뽀뽀세례가 날아왔을 것이다.
"응.. 잘했어. 역시, 잘하더라."
뽀뽀 대신에 머리로 언니의 손이 올라온다. 두번, 세번, 쓱쓱 쓰다듬고는 언니가 내 앞으로 걸어간다.
"가야지, 밥이나 먹을까?"
내 인터뷰 내용을 들었구나. 어떻게 하지. 근데 저 햇살같은 언니도 삐지긴 하는구나.
언니의 뒤를 따라간다. 따라가던 도중, 내 앞에 팬들이 가로막는다.
"송하나언니! 팬이에요!"
나이가 이십대 중반은 되어보이는 언니가 나에게 언니라고 한다.
종이와 펜을 내민다. -Love D.va-라고 적는다. 그 언니가 나에게 포옹을 한다. 나도 함께 포옹을 해 준다.
연이어서 언니뻘, 여동생뻘, 이모뻘 되는 여자들도 종이와 펜을 건네고 악수나 포옹을 해 준다. 간간히 남자들도 나에게 온다.
그리고 저 멀리에서 언니가 나를 본다. 언니의 표정이 묘하다.
그래, 햇살같은 언니에게도 먹구름이 끼는구나.
서울의 날씨는 맑았다. 하지만 우리 위에는 먹구름이 껴 있다.
언니와 함께 많은 곳을 들렀다. 경복궁, 남산타워 등등.. 이 모든 곳은 언니가 고른 곳이었다.
'너무 고리타분한 데이트 코스야 이거', 하고 투정을 부렸지만 '고리타분이 아니라 클래식이라고 하는거야.' 라며 고집을 피운 곳이다.
'재밌을거 같아! 자기랑 한국에서 데이트!' 하며 흥분했었다. 심지어 전날 밤에는 잠도 못자고 방방대기에 내가 꼭 안고 움직이지 못하게 해서 겨우 잠에 들게 했다.
하지만 결과는 이렇다. 먹구름이 우중중, 이걸 봐도 흥. 저걸 봐도 흥. 팔짱을 끼면 쓰윽, 하고 빠져나가고 셀카를 찍자고 해도 '그닥..' 하며 빠져나간다.
평소에 내가 자주 끼지 않던 팔짱이다. 하지만 내가 안겨와도 언니의 표정은 뭔가 찜찜한듯 시큰둥, 하다.
아..미치겠네. 머리를 벅벅 긁는다. 이대론 안돼.
언니를 붙잡아 근처의 패스트푸드점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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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잠깐 화장실에 다녀올게."
나는 화장실에 다녀온다는 핑계를 대고 밖으로 나온다. 벤치에 기대 앉아 한숨을 쉰다.
내가 왜 그러지.. 하나가 하는 인터뷰를 들은 후로 기분이 쭉 나쁘다.
--"아뇨, 아직은 없어요. 저는 바쁘니까요."--
머릿속에서 저 목소리가 구름이 되어 나의 마음에 천둥번개를 내리찍는다. 속이 뜨겁고 답답한거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휴대전화를 든다. 이 때 내 마음을 정리해줄 사람이 있다.
"어, 아저씨. 잠깐 시간 돼?"
-레나, 여긴 새벽이야.
"시간이 된다는거네. 내 말좀 들어줄래?
윈스턴이 한숨을 쉰다. 뭐 괜찮잖아. 갈때 바나나 사갈거니까.
-잠깐, 레나.
"응?"
한참을 내 말을 듣던 윈스턴이 내 말을 끊는다.
-너 지금 말을 평소보다 더 두서없이 하네.
"내가?"
-응. 처음에는 하나가 경기에서 이겨서 좋다고 했다가. 하나가 유명인이니 연애 사실을 밝히지 않는걸 이해한다고 했고, 그 다음에는 하나가 어떻게 단칼에 연애를 하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다고 하고. 집에 가는 길에 팬에게 일일히 웃으며 악수를 한다고 하나가 매너가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가 어떻게 아무 사람에게나 사랑을 담냐고 투덜댔어.
윈스턴이 하나하나 정리를 하며 이야기를 한다. 아아, 나 정말 두서없구나.
"내가 왜 이러지?"
-레나. 나는 과학자야. 그런 추상적인 일은 내 전문이 아니라고.
"그래도. 너는 논리적이고 나보다 아는게 많으니까 더 잘 알겠지."
전화 넘어에서 한숨이 들린다. 머리를 벅벅 긁는 소리, 이래봤자 가져오는건 바나나일텐데. 하고 그가 투덜댄다.
-레나, 너 그거 질투하는거 아냐?
"질투? 내가? 왜?"
혼란스럽다. 내가 질투를 한다고? 이 답답하고 짜증나고 묵직한게 질투야?
-지금 너는 하나가 너와 연애사실을 숨긴거가 불편한거잖아. 아, 물론 이해는 하겠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한다고 적어주는 것도 짜증나고. 아, 물론 팬에 대한 예의라고 이해는 하겠고.
내가 말을 끼어들려 할 때마다 그가 내 말을 막는다.
-근데 네가 하는 그 이해는 이성적인거고, 질투는 그보다 훨씬 감성적인거야. 아이 같은거지. 소유하고 싶은거고 떼 부리고 싶은거잖아.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해? 이거 싫은데."
-인정해, 그러면 될거야. 하나양 앞에서 언제까지 언니 노릇을 할거야. 원래 너는 애였어. 인정해.
"뭐가 애야!"
나는 윈스턴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 통화를 종료한다.
하나에게 나는 언니이고 싶은데.. 어쩌지.
뒷꿈치를 바닥에 툭툭 친다. 그래도 한국에 와서 하나에게 이런 얼굴을 보여주고 싶진 않다.
그래. 윈스턴의 말을 듣자. 그는 고릴라지만 나보다 아는 것도 많고 어른인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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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에 돌아오자 하나가 안절부절 못하며 앉아있다. 테이블 위에는 콜라 두 잔. 컵을 만져보니 물이 주르륵, 흐르는게 내가 오랫동안 밖에 있었음을 알려준다.
나는 하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컵을 물기를 손으로 훑는다. 나이 스물여덟에 질투라니. 너무 애같잖아. 부끄럽다.
"저기
언니…"
하나가 나에게 말을 건다. 고개를 들어보자 빨간 얼굴의 하나가 어깨를 떨고 있다.
놀라서 입이 벌어진다. 하지만 하나는 고개를 숙인채 다다다, 말을 한다.
"언니, 내가 연애 안한다고 인터뷰해서 미안해. 근데 그렇게 말하는게 버릇이 되어서 나도 모르게 나왔어. 그래도 그 전에 한 인터뷰에서 말한 활기차고 웃는게 멋진 사람이라는건 언니를 말하는거였단 말이야. 그러니까 나는 언니가 제일 좋아. 또 팬들 모두에게 포옹하고 악수해서 미안해. 근데 그 언니들 나랑 포옹을 안하면 안가겠다는 눈빛이었다고. 포옹을 안하면 망태기에 담아 집에 가져가겠다는 표정이었어, 그거 알아? 근데 미안해, 그게 언니가 기분 나쁠거라는거 몰랐어…"
엄청난 속도로 고개를 들지도 않고 나에게 미안하다며 사과를 한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거 같아 웃기다. 근데 왠지, 지금 웃고싶지는 않다.
그래, 질투란 말이지… 이게 질투고 아이같은 감정이면, 더 아이같이 나가도 괜찮을거야.
손으로 입을 막는다. 꾹꾹.. 입가를 손으로 눌러 웃음기를 지운다. 컵의 빨대를 바라보며 딴 생각을 한다. 슬픈 생각..슬픈 생각… 작전에 나갔다 왔더니 자리야가 내 간식을 다 먹었던 기억, 예방접종을 해야 한다고 앙겔라가 나를 붙잡았던 기억, 하나가 다쳤던 기억…
아 울적해진다. 고개를 돌려 하나를 보니 하나와 눈이 마주친다. 안돼.. 웃음이 터질거 같아. 고개를 돌린다. 참아 레나 옥스턴, 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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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에게 사과를 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는데 언니는 말 없이 빨대만을 들여다보고 있다. 언니의 볼이 살짝 붉다. 미간도 살짝 찌푸린게 아직도 화가 난 걸까.
눈이 마주친다. 언니가 내 눈을 피하고 고개를 돌린다.
아...아직 화가 났나봐.
언니가 화 났을때 어떻게 했더라… 생각하자 송하나. 생각…
생각이 났다. 예전에 게임을 하느라 언니 얼굴을 세시간동안 보지 않았던 적이 있다. 신기록 갱신 중이라 바빴던건데, 그간 언니는 많이 서운해했었다. 등을 돌리고 토라져있던 언니에게 뽀뽀 한번 해주자 언니가 금새 배시시, 하고 미소를 지었었다. 그리고 강아지처럼 내 배에 얼굴을 부벼댔지.
근데.. 문제는 장소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릴 보고 있다. 간간히 대포 카메라도 보이는게 파파라치들도 있는거 같다. 고개를 돌려 언니를 본다.
생각해.. 그리고 선택해. 양갈래 길에서 어디로 설래 송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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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언니가 잠시 눈을 돌려 나를 바라본다. 하지만 금새 고개를 모로 꼰다. 흥, 그렇단 말이지. 나도 이젠 몰라.
언니의 볼을 잡는다. 그리고 언니의 입에 입맞춤을 한다.
우워어어.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무시한다. 아니, 일단은 무시하고 싶다.
언니가 당황한듯 손을 잠시 허공에 둔다. 하지만 금새 자리에서 일어나 내 뒷머리를 잡고 나의 입 안으로 혀를 밀어넣는다.
잠시 후, 언니가 입을 뗀다. 그리고 잠시 나를 쳐다본다. 씩 웃는다. 역시, 언니는 단순해.
"후우… 자기, 이래도 돼?"
"응. 이래도 돼. 근데 언니."
"응?"
나는 손가락을 들어 사람들 틈에 있는 여러대의 대포를 가리킨다.
"저거, 뺏어. 들키면 우리 내일 집에 못가."
내 눈앞에서 순식간에 언니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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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우리 정말 이래야만 해?"
언니가 옆에서 우는 소리로 묻는다. 언니, 조금만 참아. 어쩔 수 없으니까.
캐리어를 밀고 공항으로 들어간다. 마스크와 모자, 언니는 가슴의 시간가속기를 가리기 위해 펑퍼짐한 점퍼까지 추가되었다.
갑갑해~ 하고 언니가 옆에서 칭얼댄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안그러면 우리 비행기를 놓칠거니까.
하지만 역시 한국인. 스텔스를 뚫어본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몰려든다. 아아아.. 어떻게 하지.
"레나 옥스턴씨! 멋져요! 사인 부탁해요!"
"악수 한번만 해주세요!"
"그곳에서 정말 멋졌어요!"
사람들은 나를 뒤로하고 언니 주위로 몰려든다. 언니가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나도 비슷한 눈을 하고 있을 터였다.
언니가 차근차근, 사람들에게 사인을 해 주고 악수와 포옹을 한다.
흐음… 괜히 기분이 나쁘다. 속에서 꾸물꾸물, 답답한게 차오른다.
한참을 언니를 바라본다. 웃으면서 마지막 사람에게 인사를 해 주고 사진까지 찍어준다.
그리고 나에게 온다.
"꼬맹이! 많이 기다렸지?"
괜히 입에서 볼멘소리가 나올거 같아 몇번을 입을 열었다가 닫는다. 언니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언니에게 더 미안해진다.
그때 볼에 언니의 입술이 느껴진다.
"우리 꼬맹이 질투해?"
"아니거든?! 질투는 무슨!"
에이~ 질투하네~ 우리 자기 질투하는구나 오구구, 하는 언니의 말을 뒤로 하고 나는 앞서나간다. 사람들이 아직도 주위에 많다. 빨리 이 곳을 벗어나고 나서 언니에게 투정이든 짜증이든 내고싶다.
언니가 나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같이 가 자기야. 나 자기 없음 길 잃는다고."
언니가 걸어가며 내 정수리에 볼을 부빈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는 언니의 행동에 가슴 속에서 자라나는 답답한게 서서히 내려앉는다.
나도 한 손을 뻗어 언니의 허리에 감는다.
"근데 자기, 정말 이상형이 나야?"
"당연히 아니죠! 제 기준을 그렇게 낮게 잡진 말아줘요!"
"에이~ 활기찬 사람! 웃으면 햇살이 느껴지는 사람! 딱 나, 레나 옥스턴이잖아!"
"한가지가 빠졌네요."
나는 혀를 쏙 뺴물며 말한다.
"언니 게임 엄청 못하잖아."
그렇네.. 하고 풀죽는 언니의 손을 잡고 나는 게이트를 통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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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저 왔어요, 언니는요?"
"아, 하나양. 지금은 수액 다 맞고 일어나 있어요. 가 봐요."
내기도 좋지만 적당히 부탁해요, 박사님은 웃으며 덧붙인다.
"자기! 준비한거 가져왔어?"
언니가 쾌활한 목소리로 묻는다. 저 바보가…
자, 하고 나는 옷을 내민다.
언니가 한국에서 사왔던 내 티셔츠, -Love only Lena, D,va-
이야아! 하며 언니가 바로 티셔츠를 벗어던지고 그 옷을 머리에 끼운다. 가뜩이나 날아가던 머리가 더 까치집이 되었다.
"방에 들어가서나 입지, 벌써 입어?"
나는 투덜거리며 언니의 머리를 정리한다.
"어떻게 얻은 건데! 이건 이렇게 입다가 나중에 액자에 넣어 정리할거야!"
언니가 나에게 웃으며 대답한다. 눈 밑에는 아직도 검은 기운이 남아있다.
"언니가 그렇게 바보같을 줄 몰랐어."
의무실을 나와 숙소로 가며 언니에게 말한다. 언니는 뭐가 좋은지 아직도 싱글벙글이다.
문제는 인터뷰였다. 내가 말한 이상형. 활기차고 웃을때 햇빛이 느껴지며 게임을 나보다 잘 하는 사람.
언니가 그렇게 사소한 것까지 집착할줄은 몰랐다. 그 마지막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 언니는 몇날 몇일을 샜다.
언니가 침대에 눕자 나는 언니의 옆에 앉아 이불을 여며준다.
"이젠 내가 그 이상형 맞지?"
까무락거리는 눈을 억지로 뜨며 언니는 묻는다.
"그래 맞아. 그러니까 더 자."
하품을 하는 언니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럼 뽀뽀, 나는 자기의 이상형이잖아. 언니가 입술을 내민다.
쪽, 하고 입을 맞추자 언니는 씩 웃더니 금방 잠에 빠진다.
"대단해 정말.." 나는 언니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침대 앞, TV에는 아직도 아까의 게임 화면이 떠 있다.
레이싱 게임. 노란 옷을 입은 캐릭터-닉네임 T-racer-가 폴짝거리며 뛰고 있다. 그 옆에서 푸른 옷을 입은 캐릭터-닉네임 D.va-가 엎드려 울고 있다.
T-racer는 3일만에 D.va를 이겼다. 3일 전, 단 한번의 패배 이후로 언니는 밥도 먹지 않고 TV앞에 앉아 있었다.
신기한 일이네, 하고 윈스턴 아저씨도 모두모두 와서 구경을 하고 사진을 찍어갔다.
심지어 휴게실 게시판에는 <레나 옥스턴이 가장 엉덩이를 땅에 오래 붙인 기념> 이라는 사진도 걸렸다.
몇시간 전, 언니는 나에게서 게임을 이겼다. 총 3판 2선승제의 게임에서 연속 2연승으로. 그리고 우승상품으로 받은것이 언니가 입고 있는 티셔츠.
티셔츠를 주문하자 마자 언니는 쓰러졌다.
"무식하지만 대단해…"
나는 같은 말을 반복한다. 할 말이 이거밖에 없는걸.
언니는 그새 도롱, 하며 코까지 골고 있다.
언니가 일어날때까지, 나는 언니의 옆에서 나는 그저 언니의 머리를 쓸며, 대단해.. 라고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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