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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판2차

[알리모험알리] 인연

 기존의 파이널 판타지 14 온라인의 설정과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인파 속에서도 단번에 널 발견할 수 있는건 왜일까. 성년의 날이 지나기 무섭게 키가 쑥쑥 자라 사람들 틈에서도 머리 하나는 불쑥 솟기 때문이라고 하면 너무 멋없는 표현일 것이다. 그래, 햇빛에 반사하는 은발과 그 끝에 맨 붉은 댕기 탓이라 하자.

"재밌어?"

북적이는 인파를 헤집고 네 뒤에 설 때까지도 너는 얇은 책에 고개를 묻고 있었다. 내 목소리에 깜짝 놀란 넌 황급히 책을 덮는다. 잠깐만, 당신...! 뭔 내용인데 그래. 한번 보자. 구기면 안돼, 파는 책이란 말야! 그럼 내가 사면 되겠네. 얼마에요?

점원에게 동전을 건네며 알리제의 손에서 책을 빼앗는다. 책을 찢으면 안된다는듯 체념하며 책을 넘겨주는게 그녀의 오빠를 떠올리게 한다. 부끄러운 일이 들킨 아이마냥 이마가 붉게 달아오른 네가 귀여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책은 잡지였다. 주간 레이븐의 2월 특집호라... 발렌타인 데이가 있는 2월이라 연분홍과 붉은 색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페이지를 한장한장 넘기자, 네가 읽고 있었던 페이지가 나왔다. 사랑. 인연. 천생연분. 동방의 전설...

"그냥 궁금해서 읽어봤어! 요즘 초콜릿이니 장미니 하도 요란스럽기에...!"

참 낭만적이야, 그렇지? 일반 시민들은 이렇게 한가하다니!! 하! 하! 하!

"알았으니 진정해. 지나가던 사람을 치겠어."

기다란 귀 끝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모습은 누가 말려주지 않는다면 금방이라도 터질거 같았다. 나는 허우적대는 알리제의 손을 당겨 인파에서 벗어난 카페로 향한다.


**


발렌타인 데이 특별 메뉴인 퐁당 오 쇼콜라와 진한 커피 두 잔이 나왔음에도 당신은 그 잡지에만 눈을 두고 있었다. 글자가 잘 안보이는지 눈을 찌푸리고 글씨를 읽어가는게 싫어 나는 당신의 팔을 툭툭 쳐 현실로 불러왔다.

"안경 쓰고 봐. 내가 맞춰줬잖아."

"아. 어디에 뒀지? 잠시만...여기있다."

주머니를 한참 뒤지던 당신은 다리가 휘어진 안경을 꺼내 소매로 대충 안경알을 문대 닦았다. 안경을 썼지만 잡지를 읽자 다시 인상을 쓴다. 그냥 책을 읽을 때의 버릇일까. 한숨을 쉬었다. 대체 저 책의 어떤 점이 당신의 관심을 끈거야?

"응? 왜 한숨을 쉬어. 무슨 일 있어? 케이크 나왔다. 먹자."

이거 봐. 여기 한 가운데를 가르면 초콜릿이 흘러 나온다고. 반죽은 익히면서 이 초콜릿은 흐를 수 있게 하는게 고급 기술이야.

당신은 신난듯 설명하며 쇼콜라의 한 가운데를 포크로 갈랐다. 주르륵, 흐르는 초콜릿을 케이크에 묻혀 입으로 가져가는 당신을 보며 다시 한번 큰 한숨을 내쉰다.

"대체 왜 한숨을 쉬는거야? 초콜릿 싫어해?"

"당신이 저 책을 사서 그래. 이번엔 날 어떤 곤경에 빠트리려고 그러는거야?"

"곤경이라니! 그저 여기에 나온 기사가 재밌어서 그러는거지."

당신이 펼친 페이지에는 '사랑하는 그이를 위한 특급 초콜릿. 분홍빛 연심을 전하세요!' 라고 적혀 있었다.

"초콜릿이나 만들어볼까 하고 있어. 하루 시간을 내 쿠쿠루 버터를 사러갈까봐."

당신은 너무나 순진무구한 얼굴로 요리를 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여기엔 당할 수 없어 이마를 누르곤 몇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다 좋은데 새벽으론 들고 가지 마."

"응? 그건 왜?"

"왜냐니?! 저번 성년의 날 특별호 잡지가 새벽에 갔을땐 어땠는지 기억 안 나? 산크레드가 입에 장미꽃을 문 채 나에게 와서 '여린 꽃봉오리의 개화는 아름답지 않아?' 하고 말을 걸었다가 알피노가 주먹질을 했잖아! 덕분에 알피노가 몇주간 손에 붕대를 감고다닌줄 알아?"

그건 그렇네. 이번에도 산크레드가 엄한 짓을 했다간 알피노가 고혈압으로 넘어갈거야. 당신은 내 열변에 동감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에 남은 케이크를 커피와 함께 넘겼다.

"근데, 알리제는 뭐가 재밌었던거야?" 초콜릿 레시피엔 재미 없어하잖아.

당신은 이번달 잡지가 발렌타인데이 특별호가 아니라 초콜릿 요리책이라도 된다는듯 물었다. 그리곤 이 페이지를 읽고 있었지? 하며 방금 전 내가 집중해 읽었던 곳을 내밀었다.

- 동방에는 월노(月老), 또는 월하노인(月下老人)이라는 신에 대한 믿음이 있다. 이 신은 인연을 이어주는 신으로 부부가 될 한 쌍을 "인연의 붉은 실"로 둘의 새끼손가락을 엮는다고 한다...-

"만약 이 붉은 실이 보인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말도 안되지만 아름답잖아. 이 세상이 수없이 많은 붉은 실로 연결돼 서로가 서로를 끌어당긴다면...당신과 나의 손가락에도..."

당신은 아무 말 없이 내 말을 듣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있을지 묻지 않아도 안다. 지금 세상이 평화롭지 않아서... 나는 이 세계를 지키는 빛의 전사라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나보단 다른 좋은 사람을 찾아봐... 아직 너는 어리니까...

수없이 많은 나의 고백을 당신은 자신의 어깨 위에 짊어진 짐들로 거절했었다. 내 고백이 당신에게는 또 다른 짐이 될거란걸 알면서도 나는 또 고백을 했고, 또 당신은 늘 그렇듯 나보다 더 미안해하는 눈빛으로 거절할 것이다. 애초부터 불가능한 인연이라는 것은 나도 알고있다. 서로가 서로의 손을 잡는것보다 칼자루를 잡을 날이 더 많고 상대의 눈을 보는것보다
생을 달리하는 아군의 눈과 적군의 눈을 보는게 더 잦다. 함께 누워 잠을 청하기보단 부상당한 상대의 침대 머리맡에서 생존을 기원할 날이 더 많겠지... 안된다는걸 알지만 목이 메었다. 아무렇지도 않은척 하려 쓴 커피를 입안에 담았다.

당신을 그런 날 모른척하려는지 가방을 뒤적인다. 당신이 고개를 들기 전에 진정시키려 밖으로 눈을 둔다. 환한 밖으로 눈을 돌려서일까. 눈부신 빛이 들어오자 일순간 눈이 부옇게 보이는듯하다. 천장으로 눈을 돌려 눈에 매달린 물기를 잠재운다. 당신이 내 옆자리로 다가온다. 제발, 다가오지마. 위로하지 않아도 되니까.


**


오늘 이렇게 한가하게 다른 사람들의 사이에 있을 수 있게 된 것은 나의 부상 탓일거다. 신은 날 빛의 전사로 만들었지만 내 몸은 강철로 만들어주지 않았다. 때문에 나가 맞서 싸울 신들은 수백이지만 그때마다 나의 몸은 부서지고 금이 갔다. 그 금간 틈을 억지로 메우고 붙이는 짧은 시간이 오늘이었다.

신이 날 빛의 전사로 만들었기에 나는 어제까지 싸워왔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인 내가 누릴 권리는? 몇번째일지 모를 고백 후 고통을 감추려 눈물을 말리는 알리제를 보며 나는 신에게 물었다. 그리고 대답을 듣지 않고 먼저 움직였다.

가방에서 꺼낸 무명실은 아주 예전에 내가 직접 짠 실이다. 소녀였던 알리제의 뒷머리에 매달려있는 붉은 리본이 아름답다 생각해 염료로 붉게 염색했는데 생각처럼 아름답지 않아 가방에 처박아둔 것이었다. 가방을 열자 실의 붉은빛이 꼭 그때 소녀의 머리에 매달린 리본의 빛깔과 너무도 닮아 절로 손이 갔다.

붉은 실을 여러줄 꺼내 서로 엮어 단단한 하나의 굵은 실로 만들었다. 알리제의 손을 가져다 손목에 대 길이를 가늠해본다. 수없이 잡아봤고 또 수없이 몰래 눈을 줘서인지 어림짐작해 만든 실팔찌는 그녀의 손목에 딱 맞았다. 흰 손목에 묶인 붉은 실은 수년 전 그녀의 은발에 매달린 리본과 닮았다.

야무지게 묶인 실팔찌를 꿈꾸듯 바라본 알리제를 보며 나도 내 손목을 내밀었다. 나도 해줘.

알리제는 서툰 손길로 내 손목에 할 팔찌를 만든다.

"손가락보단 손목이 더 단단히 묶일거야."

한참 후, 겨우 묶인 팔찌를 바라보며 말했다.

"왜 받아준거야?"

"그냥."

나는 그녀의 손등을 쓸었다. 그녀가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예전처럼 소독약 냄새가 날거라며 그녀를 내치지 않았다.

"그냥. 나도 자랐나봐."

픽 하고 알리제는 웃는다. 그리고 이내 가늘게 떨린다.

"이제 겨우 용기가 났나봐."

나는 그녀의 머리타래에 입을 맞추며 고백했다.


**


"알리제, 잘 들어. 내가 뛰어나가면 사람들을 데리고 피해. 지하에 출구가 있을거야. 쭉 따라가면 그대로 비공정이 있는 곳까지 갈 수 있어."

"나도...!"

내 말은 잇따른 폭격음에 묻혔다. 겨우 재건된 작은 마을은 흙먼지로 돌아가고 있었다.

"내 걱정은 마. 나는 지상으로 도망갈거니까."

나도 같이 싸울래, 나는 칼집에서 세검을 반쯤 뽑았다. 당신이 신호하면 나도 공격할테니까.

"아니, 저들을 지켜줘. 저들이 무사히 이곳에서 도망갈 수 있도록 싸워줘."

그녀는 내 손을 꼭 쥐었다. 손잡이에 얹은 손을 쥐어 세검을 다시 칼집으로 집어넣은 당신의 손목을 보았다.

- 이게 뭐야?
- 코우진족이 줬어. 예쁜 구슬이지? 당신 하나 나 하나. 팔찌에 장식하면 예쁠거 같아서 달라고 했지.
- 내가 돕고 다닐땐 쉬지도 않고 남 돕고 다닌다며 뭐라 하더니...
- 도운거 아냐. 수영이 재밌어서 종종 방문하다보니...

실 뿐이었던 밋밋한 붉은 팔찌는 다양한 사람들의 선물로 찰랑거렸다. 화려한 장식은 곧 당신의 화려한 무훈을 의미했다. 당신이 지켰던 이 세계의 수많은 사람을 의미했다. 그 장식들은 내 팔찌에도 그대로 옮겨와 있었다. 당신과 같이 한 시간이 나에게도 당신과 마찬가지의 책임을 주었다.

당신의 눈 안에는 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뒤에 서서 겁에 질려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도 내 눈 안에 그들을 담아야만 했다.

"자, 준비됐어?"

저 앞에 있는게 거구의 야만신이라면. 차라리 내가 도울 수 없는 것이었다면 쉽게 포기할 수 있었을까. 아니. 그런 야만신이라면 오히려 당신이 물리쳐줄거란 믿음이 있었다.
바깥에 있는건 나와 같은, 내가 벨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당신이라면 한둘쯤, 아니 수십쯤은 벨 수 있겠지. 하지만 저 너머의 수천도, 수만도 가능한거야?

"알리제. 날 봐."

내 두려움을 읽었는지 뺨에 와닿는 손은 뜨겁고 볼에 부딪히는 팔찌의 장식은 가볍게 떨렸다.

"나도 도망치는거야. 다만 다른 길로 갈거니까."

"만날 수 있는거지?"

"약속해."

그럼 갈게. 준비해.

나는 지하로 통하는 바닥문을 열어 사람들을 내보냈다. 마지막으로 내가 문 아래로 양 다리를 내리자 당신은 등 뒤의 검 손잡이에 손을 얹고 살짝 웃었다.

"조금 있다 보자."

문을 열자 횃불의 더운 불빛이 눈을 찔렀다. 고함소리와 발포음. 나는 어둠으로 뛰어내렸다.


**


후우-

가슴에 꽂힌 검을 뽑을 때 눈은 이미 다음을 향해 있었다. 날 향하는 총구. 십여명의 병사가 총을 들고 있으면 총구까지 수십개의 눈이 날 바라보는듯 하다. 눈들이 계속 싸울거냐. 라고 비웃듯 묻는다. 발사! 방벽을 만들 에테르가 고갈되었는지 몇발의 총알이 흉갑에 와 부딪혀 뒤로 몇걸음 물러난다.

뒷주머니에서 에테르병을 꺼낸다. 이것이 마지막 병. 하지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면 그들이 구하러 와줄거야. 내용물을 마셔 다시 에테르 방벽을 세운다. 그리고 다리에 힘을 준다. 암흑의 힘으로 불가능한 도약을 해 저들 사이로 들어간다. 검의 이가 나가는지 휘둘러 깨끗이 베지 못하고 마지막 사람의 가슴에 검이 박힌다.

상대의 면갑에 드러난 눈과 마주친다. 가슴이 절반쯤 베인 사람은 내 흉갑에 총구를 마주댄다. 그는 이를 딱딱 부딪히면서도 방아쇠를 당기려 안간힘을 쓴다. 검을 빼내야 하는데. 발로 걷어차야 하는데. 무릎을 들어올리는 것이 너무도 힘들다.

"죽어... 제발"

피거품을 입에 물며 그가 말한다.

죽어 제발. 그가 날 겁내하는게, 얼마나 간절히 집으로 가고자 하는지 머릿속으로 들어온다. 집에서 기다리는 소중한 누군가의 얼굴, 그에 대한 애절한 마음. 나는 다시 한번 입술을 깨물며 팔에 힘을 준다. 너덜너덜해진 입술에서 피가 흐른다.

"지켜야해. 집에 가야해."

알리제가, 기다리고 있어.
겨우 무릎을 들어올려 체중을 실어 걷어 찬다. 걷어찬 반동 때문인지 뒤로 쓰러진다.

땅에 검을 박고 간신히 다시 일어난다. 흉갑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몸이 다소 가벼워진듯 하다.

"알리제. 약속했어."

검을 바닥에 끌듯 낮추고 다시 달린다. 수많은 눈들이 날 향하고 또 쓰러진다.


**


도망이라고 하는건 최대한 피해를 입지 않고 안전한 곳으로 몸을 피하는 것이다. 당신은 분명 도망친다고 했었다.

많은 일반적인 상식에서 당신과 나는 달랐지.

도망이고 유인인게, 이렇게 모두의 시선을 끌며, 적들을 격퇴하며 하는거라곤 생각도 못했어. 야만신을 물리친 힘이라는게 이렇게 클거라곤 생각도 못한거지.

후퇴하는 적들을 몰아내는 군인들 틈에서 나는 당신을 찾았다. 사실 찾는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았다. 마치 당신만이 이 땅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존재인냥 걸어오고 있었으니까.

"...."

그녀의 눈에 내가 비치자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달싹이는 입술은 뭐라 말하는거 같았지만 당신을 안으러 가는 짧은 시간 내에 들을 순 없었다.

"약속했어."
무게가 사라진듯 가벼워진 당신을 안아들자 귀에 당신의 목소리가 들린다.

"응. 약속했어. 지켜줘서 고마워."

계속해서 가벼워지는 팔 안의 연인에게 회복마법을 걸며 나는 웃어주려 노력했다. 창백한 당신의 뺨에 다시 붉은기가 돌길 바라며 치료마법을 걸고 또 걸었다. 세검이 쉴새없이 빛을 발하다 결국 빛이 꺼진다. 더 이상 에테르가 남아있지 않은 내 몸은 더 이상의 치유마법을 걸 수 없다.

"백마도사분... 어디 백마법 쓰실 수 있는 분 없나요? 잠깐만 기다려줘. 당신 조금만 참아줘."

내가 주입하는 생명력은 총탄이 스친 당신의 몸을 복구하는데에는 한계였다. 아니, 당신의 몸은 여기까지 오는게 이미 한계였겠지. 하지만 생각조차 하면 안되는 그런 진실들을 몰아내며 나는 소리쳤다.

"백마도사를...! 강한 백마법을 쓸 수 있는 도사가 필요해요! 도와줘요! 이 사람은 빛의 전사에요!"

당신은 눈물이 쏟아지는 내 얼굴을 닦아줬다. 고통도 없다는듯 편안한 그녀의 눈빛을 마주하자 그녀의 생각, 감정이 쏟아져 들어온다.

지켜야 할 사람에 대한 책임감. 무기를 쥔 손바닥의 땀, 흥분을 감추는 미소

그리고 알리제. 알리제. 알리제.

죽는게 두렵다. 다시 한번만 더 네 얼굴을 보고싶어. 너랑 만나야 하는데...

내 얼굴이 떠오른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이름을 부르는 나.

다행이다. 다시 만났어.
맞지? 약속을 지켰지? 꼭 다시 만난다고 했잖아.
미안해, 알리제.

*

"알리제님... 영웅님을... 씻겨드렸습니다."

난민들을 수용하기 위해 간이로 만든 천막은 조악했다. 하지만 나와 당신만을 위해 천막 하나를 내 준다는 것 자체가 당신에 대한 존경의 표시겠지.
문가에 선 사람을 바라보자 그 사람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죄인이 된 양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저 사람의 살아남은 죄책감이 머릿속으로 밀려들자 두통이 일어 머리를 살짝 흔들었다. 당신은 이런걸 언제나 느끼며 살아왔던거야?

"네. 곧 갈게요."

인상을 펴고 고맙단 인사를 전했다. 당신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러 간다.

나뭇가지를 얼기설기 엮은 제단 위에 깨끗한 흰 옷을 입고 당신은 누워있었다. 당신이 쓰던 수많은 무기는 당신의 발치 아래에 있었고, 마지막까지 모두를 지킨 대검은 양 손 위에 올려져 마지막 여행의 길동무가 되어 있었다.

당신의 주변에 빙 둘러싼 여러 소지품, 그 안에서 나는 붉은 실로 된 팔찌를 발견했다. 내 서툰 손으로 만든 팔찌는 이번 전투를 이겨내기엔 무리였는지 끊어져 당신의 무기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검게 그을린 붉은 실, 손으로 살짝 만지자 불에 탄 끝 부분이 바람에 흩날렸다. 남아있는 부분을 잡고 당신의 손목에 다시 묶는다. 당신이 어딜 가던, 나는 당신과 함께 연결되어 있는거야. 금방 맞이하러 갈거니까. 당신이 걸었던 그 길. 그대로 걸어 따라갈거니까.

수많은 횃불이 제단에 바쳐지고 어두운 밤이 내내 낮처럼 밝도록, 당신은 밤을 밝히며, 그렇게 떠났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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